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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08화 (108/175)

제108화

조금 충격적인 일이 있긴 했지만, 반서준을 이대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반서준이 없으면 우리나라 대표는 이제 사이비 종교 교주인 외계인이다. 한국 출신은 무슨 우리 차원 출신도 아닌 게 한국 대표랍시고 얼굴을 비추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급하게 땅을 박차고 뛰었다.

불쾌한 진녹색 눈의 검은 동공에 반서준의 모습이 비쳤다. 어느새 옆으로 따라붙은 편애가 앞머리를 휙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저건 허공에 떠 있어서 아까 같은 방법은 쓸 수 없어. 알지?”

“그래. 두 번이나 싱크홀로 엿 먹었더니 이번엔 허공에다 소환한 모양인데.”

“나는 땅 위에 있는 게 아니면 손쓰지 못하니까 저건 처리 못 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문제가 크네.”

차라리 아까 나왔던 거인같이 애매한 크기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았을 텐데, 저건 찢어진 공간 사이로 눈과 팔만 내밀고 있었다. 공간 너머에 펼쳐진 자홍색 하늘이 불길하기 짝이 없다.

“일단 하람을 깨워야 할 것 같은데. 이 사람 좀 깨워 봐. 저번에 비눗방울 깨웠던 것처럼.”

나는 옆구리에 끼고 있는 하람을 편애에게 집어던지듯이 넘겼다. 쓰러진 받아 든 편애가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이쪽은 이제 우리 집 악마가 알아서 할 거다. 지금 문제는….

“왼쪽으로 굴러!!”

이쪽이겠지.

무기를 아공간에 휙 집어넣은 반서준이 내 외침에 맞춰 굴렀다.

거대한 손이 방금까지 반서준이 있던 곳을 짓눌렀다. 나는 달리기에 박차를 가해 반서준을 휙 낚아채고 도약했다. 허탕 친 손이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천장이 날아간 2층 바닥이 세게 울린다.

금방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하지만 이 바닥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이상하지. 나는 고개를 돌려 편애가 있는 쪽을 보았다. 내가 바라볼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편애가 나를 본다. 벙긋거리는 입술이 명령한다.

‘엎 드 려.’

나는 편애의 말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엎드렸다.

저 뒤에서 랑과 함께 서 있던 비눗방울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멈춰!!”

다른 이의 말이면 몰라도 그의 말에는 힘이 있다. 바닥에 엎드린 나와 반서준을 향해 다가오던 손이 비눗방울의 외침에 그대로 멈춘다.

비눗방울은 한계 이상의 힘을 쓴 탓에 입에서 핏덩이를 토해 냈다.

소환물 손이 멈춘 사이, 나는 반서준을 끌고 손의 공격 범위를 벗어났다. 손은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언제 멈추었냐는 듯이 다시 움직였다.

랑이 붙어있는 덕에 내상을 치료한 비눗방울이 다시 한번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움직이지 마!!”

과한 특성 사용의 여파로 입는 내상을 랑이 치료하고, 비눗방울이 이어 시간을 번다.

손은 멈추고 움직이기를 끊임없이 반복했다. 쌓이는 고통이 상당할 텐데도 비눗방울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연갈색 눈이 내게서 다른 사람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다시는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각오가 그를 움직이게 했다.

초코우유는 비눗방울의 특성이 랜덤이라고 말했지만, 이 자리에 선 비눗방울의 특성은 랜덤이 아니었다.

모든 일이 그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신 차려.”

비눗방울이 기를 쓰고 벌어 준 틈이었다. 나는 거대한 적을 눈앞에 둔 채로 꼼짝 못 하고 있는 반서준에게 말했다.

친구들의 죽음을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던 대학생에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베테랑 헌터까지.

반서준이 신념을 가지고 걸어온 길은 분명히 길고 험했을 것이다.

특성을 사용하기 위해 평생 쥐어 본 적 없던 총기를 쥐고, 죽음을 각오한 채로 게이트 안에 뛰어들고, 지금까지 이룬 것에 자만하지 않고 정진하는 삶.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삶의 형태였다.

나는 그가 걸어온 길에 경의를 표했다.

“랑과 비눗방울이 애쓰고 있잖아. 저걸 물리쳐야지.”

하지만 그의 삶에는 문제가 있었다. 어찌 보면 간단하고, 또 복잡한 문제가.

아공간에서 총기를 꺼낸 그가 늘 하던 대로 손을 공격했다. 물론 아까 나온 거인조차 뚫지 못한 탄환이 저 거대한 손을 뚫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사람은 작고 얇은 샤프심이 손에 박혔다고 죽지 않는다.

반서준의 공격은 크기가 큰 몬스터와 상성이 좋지 않았다.

물론 그의 특성, ‘관통’은 훌륭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샤프심이 살갗을 뚫는 것처럼 총알이 박히긴 했지 않은가. 그게 치명적인 공격이 아니어서 그렇지.

제 공격이 먹히지 않는 것을 본 반서준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직 멈추고 움직이기를 반복하는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저거 처리 못 해. 아까 델리키아를 처리하는 데 힘을 너무 많이 썼어. 불꽃은 이제 못 피워.”

“당신이 가진 특성은 그것만이 아니잖아.”

“신체 강화? 신체 강화라고 해 봤자 몸 튼튼한 게 다인데, 너라면 저 손에 몸 갖다 박는다고 저걸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찌그러지는 걸 먼저 걱정해야지.”

누군가의 뒤를 따르는 삶은 언젠가 사람을 멈춰 서게 만든다. 아무리 따라 걸어 봤자 그 등을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그림자가 될 뿐이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자기보다 강한 사람을 부르면 된다.

하지만 내가 언제까지나 반서준의 곁에 있을 수 있을까? 지금도 가끔씩 얼굴 볼까 말까 한 사인데?

“언젠가는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모든 사람을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면서. 이래서야 마지막까지 남을 수 있겠어?”

가까스로 힘을 쥐어짜내고 있는 비눗방울이 피를 토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실핏줄이 터져 벌건 눈에 독기가 가득하다.

“하지만….”

망설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세상 제일가는 겁쟁이의 멱살을 홱 잡아챘다.

“다른 특성이라면 너도 있잖아. 네 특성은 관통밖에 없어?”

내가 알기론 반서준의 특성은 두 개였다.

관통과 응집. 평소에 별로 쓸 일 없는 그거.

아주 예전에 협회에서 반서준의 자료를 열람한 적이 있다. 그때 분명 관통 특성의 랭크가 A+였고, 응집 특성의 랭크가 C-였다.

시간이 지나 다시 그의 자료를 열람했을 때, 관통 특성은 S+로 훌쩍 올라 있던 반면, 응집은 여전히 C-였다.

더 강해지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그가 가진 특성을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다. 벽에 막혔다면 머리색이 하얀색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았다.

응집 특성을 내버려 두고 있는 것은 분명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그 이유가 어떤 것이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 특성이 우리를 이 상황에서 구해 낼 수 있느냐다. 내가 프로 상담사도 아닌데 남의 사정을 들어 주고 공감해 줄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럴 위인이 못 됐다. 되고 싶지도 않았고.

“그거 쓰자. 망해도 좋으니까 뭐든 해 봐.”

죽을힘을 다해 손을 막고 있던 비눗방울이 고꾸라졌다. 나는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그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구명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 앞에서도 망설이지 않겠다고? 네가 생각한 대로 해. 망설이지 마. 네 행동에 확신을 가져.”

“…….”

“네 스스로 가질 수 없다면 내가 네게 확신을 줄게. 너는 나를 지킬 거야.”

정말로 한계에 다다른 비눗방울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나는 반서준의 멱살을 쥔 채로 씹어뱉듯이 말했다.

“네가 나를 지킬 거야.”

“…….”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바짝 굳은 그의 어깨가 스르르 풀렸다. 확신을 가진 하늘색 눈이 우리를 짓누르기 위해 다가오는 손을 응시했다. 완전히 그림자가 져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닥쳐올 충격을 기다리며 다른 쪽 손으로 피어싱 위를 만지작거렸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대비는 충분했다. 사람은 늘 플랜 2가 있어야 하는 법 아닌가.

그러나 내 말로 반서준이 깨달은 게 있었던 걸까. 닥쳐 온 건 충격이 아니라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소리였다.

“아…….”

철퍽.

거대한 손이 젤리처럼 흐물거리더니, 순식간에 액체가 되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액체가 된 손은 땅에 닿자마자 기체가 되어 암녹색 증기로 변했다.

나는 반서준의 멱살을 틀어 쥔 손을 놓고 몬스터가 녹아내리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두 손이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자홍색 하늘을 배경으로 둔 눈마저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감색 눈의 악마가 마법진을 닫았다.

어떤 특성들은 랭크가 낮을 때, 어느 한쪽 면만을 보여 주곤 한다. 특성의 발전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뉜다. 강화와 확장.

과거 F급이었던 네가정말좋아는 연필 하나를 겨우 옮겼으나, 지금은 산 하나도 통째로 떼다 옮길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의 특성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공간.

반면에 새벽 길드의 모 헌터는 몸에서 상큼한 자몽향이 나는 특성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자신이 원하는 향기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일반 향기뿐만 아니라 사람을 미치게 하는 향이나, 몬스터를 흥분시키는 향마저도 말이다.

네가정말좋아와 달리 그 헌터의 특성은 예전과 같다고 하기 어렵다. 우리는 특성 랭크가 올랐을 때 예전과 같지만 위력이 오른 것을 특성 강화, 특성이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 것을 특성 확장이라고 말했다.

응집은 한 군데에 얽혀 뭉치는 것. 기체를 고체로 만들고 액체를 고체로 만들 수 있다면, 반대도 가능한 법이다.

반서준의 특성은 단순히 응집이 아니라 물질의 상태를 바꾸는 것으로 보는 게 맞았다.

【“너답지 않은 선행이네.”】

뒤에 있을 편애가 짧은 코멘트를 남겼다.

나는 귓가를 더듬거리던 손을 내렸다. 여차하면 새벽 길드에서 훔쳐 온 델리키아의 양산을 꺼낼 생각이었다.

손이 흘러내리며 남긴 암녹색 증기가 산산이 흩어진다. 반서준은 이 모든 일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확신을 가지라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해 본 적 없는 것을 시도해 봐야 한다.

손가락테크닉의 뒤를 쫓으면 손가락테크닉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건 애초에 잘못 설정된 가설이다. 손가락테크닉 같은 사람이 되는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손가락테크닉을 뛰어넘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해야지. 그래야지 지금보다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있지.

“이번에는 네가 구한 거야. 빚으로 달아두던가.”

풍비박산 난 2층이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반서준을 보며 말했다. 그가 그러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내가 구한 게 아니야. 아마 당신이 없었더라면… 할 수 없었겠지.”

뒤늦게 표정을 수습한 반서준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을 꺼냈다. 멀쩡한 겉과 다르게 속이 어지러웠다.

“내가 직접적으로 손쓴 건 아니잖아. 네가 한 거지.”

물론 플랜 2가 있어서 보일 수 있던 여유였으나, 이건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나는 표정 관리에 애쓰는 반서준을 보며 픽 웃었다.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이 웃겼다.

반서준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날 확신케 한 거야.”

올곧은 하늘색 눈이 장난기 한 줌 없이 진지했다. 나는 그 하늘색 눈에서 아직 눈이 검은색이던 시절의 그를 떠올렸다.

“당신은…….”

잠시 심호흡한 그가 느리게 입술을 뗐다. 그때와 변함없이 진지하고 정중한 태도로, 넘치는 감사와 존경을 담아서.

‘그때도, 지금도. 언제나 변함없이.’

“내 영웅이야.”

세월이 지나 종이가 낡고 바래도 서적에 담긴 내용이 가치를 잃지 않는 것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일을 겪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기에, 변하지 않는 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가치 있는 법이다. 나는 순수한 애정을 담긴 그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이토록 많이 바뀌었는데, 너는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어쩐지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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