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두 차원을 마음대로 오가는 존재들. 상식을 뛰어넘고, 놀라울 만큼 거대한 힘을 부리는.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살고, 인간을 한참 뛰어넘은 존재들.
외부 차원에는 신이 없다.
외부 차원의 존재들은 한때 그들을 신으로 부르며 따르고 모셨지만, 이제는 그들을 악마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마법은 신이었다 악마로 격하된 그들의 특성을 흉내 낸 것.
편애는 자신이 자아와 무의식을 다룬다고 이야기했지만, 특성이 자아와 무의식인 게 가능한가?
정말로 자아와 무의식이면, 그중 어떤 것을 다루는 거지?
감색 눈의 악마는 편애가 거짓말쟁이라고 했다.
편애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
감색 눈의 악마는 하늘을 영역으로 두고 있지만, 그가 쓰는 마법은 소환 마법이다.
그러면 편애의 영역도 환영 마법과는 겉으로 큰 관계가 없어 보일 수도 있었다.
만약 편애가 내게 거짓말을 했다면, 그의 영역은 무엇이길래 숨기고 싶어 한 걸까.
하늘 같은 것과 달리 노려지기 쉬워서 숨기고 싶어 하는 건가.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감색 눈의 악마가 내통자로 활약하고 있던 곳은 차원 학회. 오랜만에 차원 학회에 들릴 일이 생겼다.
“핑거킹 님, 한 건 크게 했네요?”
덩치 큰 비눗방울에게 쓰러진 하람을 떠넘긴 랑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는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거멓게 뚫린 싱크홀에서 두 발짝 떨어졌다.
“상황이 왜 이렇게 흘렀는지 알고 싶은데… 말해 주실 생각은 없으신 것 같고.”
“그건 저기 쓰러진 하람한테 물어보시죠. 저 사람이 다 알고 있으니까. 아니면 비눗방울한테 물어보시든가.”
“그래요? 또 나만 뒷북쳤나 보네요. 이래서 직장 동료랑 친하게 지내야 하는데 말이에요.”
시큰둥한 얼굴의 랑이 하람을 업은 비눗방울을 흘기며 말했다. 자기 공대원들이랑 안 친하다는 걸 이렇게 까다니.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은데.’
랑은 생각하는 게 표정으로 다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하긴 나라도 쟤들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겠다. 현실은 랑도 1공대라 쟤들이랑 세트로 묶여 사내 왕따 당하는 신세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싱크홀을 만들어 낸 편애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편애는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처음에 만들어 낸 싱크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거 낙원 길드 사람이잖아요. 올 때 낙원 길드 사람이랑 같이 왔어요?”
“글쎄요.”
나를 따라 편애 쪽으로 시선을 옮긴 랑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에 같이 들어온 건 아닌데, 중간에 알아서 튀어나왔지. 하지만 이걸 말하면 곤란해질 것 같은데.
여긴 크레이터 안이라서 네정좋이 공간을 열어줬다는 변명도 못 한다.
편애는 정말 허공에서 불쑥 나타난 사람인 것이다. 마치 인간이 아닌 것처럼.
‘핑거킹 님 기분 안 좋은 모양이네. 말 걸지 말아야지.’
일부러 말을 짧게 했더니 알아서 해석하고 있다.
나는 랑의 오해를 고쳐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두 싱크홀과 제법 떨어진 곳에 비눗방울과 반서준이 자리해 있었다.
하람을 업은 채로 반서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비눗방울이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내 모습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울상이 된다.
아까도 그러더니만 여전히 내게서 떠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있는 모양이다. 마리 씨는 이제 돌아올 수 없을 텐데.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나는 비눗방울을 지나쳐 반서준의 앞에 다가가 섰다.
담담한 척하기 위해 애쓰는 남자가 내 앞에서 말을 고르고 있었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에 관한 의문, 델리키아를 해치우고 그를 구한 것에 대한 감사, 그 외 잡다한 상념들.
입술을 꾹 다문 반서준이 여러 생각을 거쳐 입술을 연다. 나는 그가 말할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었다.
“감사합니다.”
“…….”
“덕분에 또 목숨을 구했습니다. 값은… 원하신다면 마땅한 대가를-”
“너는.”
말을 끊고 들어가자 그래도 감사 인사를 하겠다고 답지 않은 존댓말을 쓰던 반서준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하늘색 눈이 그치지 않는 폭풍을 눌러 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감사를 싹둑 자르고 내가 궁금한 것을 물었다.
“분하지 않아? 눈앞에서 복수할 상대를 잃었는데. 계속 엘프 공주를 물리치기 위해서 힘써 왔다고 들었어.”
“…누가?”
“하람이 말하던걸. 네가 델리키아에 대해서 알려 줬다고.”
엘프 공주의 철없는 나들이에 친구들을 잃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홀로 살아나왔다.
나는 반서준이 아니기에 그가 느꼈을 울분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칼을 갈고 준비해 온 복수의 기회를 다른 사람 때문에 놓친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허망한 기분이 들겠지.
그 정도는 나도 알 수 있었다.
델리키아는 그의 손에 죽은 것도 아니고, 내 손에 죽은 것도 아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찔린 뒤 끝내 악마를 소환하고 죽었다.
PK 때문에 시작된 이 사건. 아무것도 모르는 반서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와서 자신의 원수를 보게 되었을까.
나는 팔짱을 낀 채로 그의 하늘색 눈을 응시했다. 그는 느리게 입술을 뗐다.
“복수 같은 건 생각해 본 적 없어.”
자명한 헛소리였다.
“그날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해 준 이후로 계속 생각했어. 나도 언젠가는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모든 사람을 지키는 사람이 되겠다고. 구명을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 앞에서도 망설이지 않겠다고.”
“…….”
“계속 사람을 구했어. 그 사람이 말한 대로 살기 위해 노력했어. 아, 이 정도면 나도 그 사람한테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겠지. 당신이 있어서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모든 게 당신 덕분이라고, 그 사람 앞에서 말하려고 했는데.”
“…….”
“내가 한 발짝 나아가면 그 사람은 뒷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나아가 있어서 그럴 수 없더라고.”
말을 멈춘 반서준이 복잡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단지 그것뿐이야.”
“…….”
“복수는… 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나는 복수가 아니라 구명을 위해 살고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숨 막히게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반서준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반서준의 초조한 시선이 바닥을 오갔다.
별거 아닌 말을 한 것 가지고 후회하고 있는 그의 속마음이 들렸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어느 쪽으로든 명쾌한 대답을 줄 수 없었다.
잠깐 멋진 척하려고 던진 말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노력하면서 살았단 말인가.
내가… 한 사람의 인생을 쥐고 휘둘렀구나.
날 너무 고평가해 주는 거 아닌가. 난 그렇게 대단하고 좋은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괜히 식은땀이 뻘뻘 흘렀다. 죄책감이 퐁퐁 솟아났다.
침묵이 계속되어 좋을 게 없었다. 나는 이 분위기를 깨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네 말에는 오류가 있어.”
“…….”
“네 말대로라면 너는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좋아해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너는 날 싫어한다고 말했고.”
내 말을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반서준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생각의 파편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네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너는 왜 나를 싫어해?”
편애와 계약하기 전에는 알 수 없었지만, 편애와 계약한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싫은 게… 아니라.’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계속 버벅거리고 있는 사람. 반서준은 오류 걸린 동영상처럼 한 마디만 계속 반복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싫은 게 아니라. 싫은 게 아니라, 싫은 게 아니면 뭔데.
나는 렉 걸린 반서준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어깨라도 툭 쳐 줄 생각이었다.
당황으로 물든 그의 하늘색 눈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다 내 녹색 눈에 고정됐다. 계속 버벅거리던 인간의 얼굴에 묘한 표정 변화가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너.”
“…….”
“내 진짜 모습을 보고 있구나.”
찰나가 영겁 같았다. 반서준은 아주 커다란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완전히 얼어붙었다.
놀란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라서, 나는 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 누군가가 내 머릿속을 지우개로 싹싹 지운 것처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참을 수 없는 침묵이 부서진 무도회장 안을 가득 채운다. 이 무슨… 이게… 무슨.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을 마주하게 된 나머지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오늘 반서준의 가장 큰 비밀을 알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런 비밀 말이다.
도저히 알 수 없었던 행동들이 퍼즐처럼 맞춰진다.
랑과 비눗방울이 있는 곳을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주변에 지옥 같은 침묵이 흐르는 걸 보니 그들도 분위기 파악을 하는 모양이지.
나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아직도 싱크홀을 내려다보고 있는 편애의 뒷모습을 보았다.
감색 눈의 악마가 실컷 주절대다가 편애의 분노를 사고 바닥에 추락한 게 벌써 몇십 분 전.
편애는 짧다고 말하면 짧고, 길다고 말하면 긴 그 시간 동안 감색 눈이 떨어진 싱크홀 아래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데도 아래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는 것.
나는 이 어색한 자리에서 벗어나 편애의 옆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온다.”】
무엇이?
【“감색 눈.”】
드드드드-!!
뻥 뚫린 싱크홀 아래, 감색 눈이 추락한 자리가 거세게 진동했다.
기이이잉-.
무도회장 한복판에 거대한 남색 마법진이 생긴다.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것은,
“피해!!”
불쾌한 진녹색 천으로 겹겹이 쌓여있는 무언가의 손이었다.
콰앙-!!
무도회장 안에 소환된 그 손은 나오자마자 건물 천장을 날려 버렸다.
반서준이 다시 무기를 주워 들고, 랑과 비눗방울이 전투태세를 갖췄다. 나는 비눗방울이 미처 챙기지 못한 하람을 대충 들어 올렸다.
마법진 너머로 보이는 자홍색 하늘에 무언가의 눈이 보인다. 기이하게도 그것은 흰자위가 검은 역안이었다.
특정한 누군가를 찾기 위해 눈을 데굴데굴 굴린 그것이 편애를 노리고 손을 뻗었다.
저기서 편애가 죽기라도 하면 인간이 아닌 게 바로 들통나게 될 텐데?
나는 편애를 향해 미끄러지듯 달렸다.
쾅!!
하지만 그것은 이미 편애를 제대로 찍어 누른 후였다.
“망했네.”
빈대떡처럼 짓눌린 편애의 몸이 순식간에 스르르 복구됐다.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손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편애를 다시 한번 짓누른다.
뿌드득!!
편애가 완전히 짓눌린 자리에 인간의 형체를 완전히 잃은 부산물만 남았다.
그러나 그 부산물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새벽 길드원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모습이 보인다.
초인적인 재생 능력이 있는 헌터들도 온몸이 짓눌리고서는 되살아날 수 없다.
그것은 몸이 복구되는 시간이 숨이 멎는 시간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후로 편애를 몇 번 더 짓누른 무언가는 편애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는지 편애를 포기했다. 그리고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흰자위가 검고 홍채가 불쾌한 진녹색인 눈이 건물 안을 데굴데굴 굴렀다. 잠깐의 관찰 끝에 그 끈덕진 시선이 멈춰선 곳은.
반서준이 있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