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06화 (106/175)

제106화

감색 눈의 악마가 늘어놓은 수식어가 편애의 어떤 트리거를 건드렸길래, 직접 나오기까지 한 걸까?

나는 내가 들어서는 안 될 것이 있었나 고민하며 우리의 대화를 되짚어 보았다.

별 건 없었다.

편애에게 붙은 수식어 중에 씨앗의 수호자라는 수식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대성하기 위해서는 보호자의 품을 떠나야 한다는 것.

“네가 왜 내 보호자야? 기분 나빠.”

갑작스럽게 나타나 남의 코를 찌른 악마가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이질적이게 선명한 녹색 눈이었다.

“그건 저 미치광이가 헛소리하는 거야. 나도 네 보호자 하기 싫어.”

“그래, 그래. 내 보호자는 지금쯤 퇴근하고 집에 있을 거란 말이야. 여기 있으면 큰일 난다고.”

여기가 어디라고 우리 마님을 모신단 말인가. 다른 헛소리는 몰라도 보호자를 들먹이는 헛소리는 참아 줄 수 없었다. 나는 앞으로 한 걸음 성큼 나섰다. 감색 눈의 악마는 여전히 혼자만 즐거워 보였다.

“걷기 연습 다 했냐?”

“응. 오랜만에 걸어서 좋았어.”

“그럼 여기서 걷지 말고 너희 차원까지 걸어가. 소금 뿌리기 전에.”

아공간 안에 소금이 있던가? 나는 아공간 안에 넣었던 잡다한 물품들을 손에 꼽아가며 세어 보았다. 핫 팩, 수면 양말, 귀마개, 침낭…….

대부분 노숙에 필요하거나 도움 되는 물건이다. 게이트에 드나들다 보면 거기서 눈을 붙이는 일도 종종 있다 보니 챙기게 되었다.

몬스터를 잡아먹는 일은 별로 없어서 소금과 후추는 챙겨 두지 않았다.

후추는 잘 모르겠는데, 소금은 악마 퇴치용으로 종종 쓸 수도 있겠다. 집에 가서 챙기든가 해야지.

나는 악마의 반응을 기다리며 뒤를 흘끗 쳐다봤다. 새벽 4인방이 여전히 고전하고 있었다.

하람 움직이는 게 보통이 아닌데? 인간이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이걸 빨리 쫓아내야 쟤들을 챙길 수 있을 텐데. 눈치도 없이 퇴장이 느리구나.

“소금은 왜 뿌리는 거야? 날 잡아먹을 거야?”

감색 눈이 히죽거리며 물었다. 왜 소금 타령을 하는지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

“후추도 뿌리기 전에 가라.”

나는 미간을 좁히며 손을 내저었다. 이것들은 말만 악마지, 진짜 악마도 아니라서 퇴마 의식 같은 게 통하지도 않았다.

종교의 힘? 당연히 안 먹혔다.

애초에 영생을 사는 이 양아치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퇴마 같은 소리를.

감색 눈의 악마는 자기를 죽이려면 자기 영역을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하늘은 아주 당연하게 존재하는 영역이었다.

하늘의 개념에서 생겨난 저 악마를 죽이려면 하늘을 없애야 한다.

인간은 하늘이 없으면 죽지 않을까? 애초에 하늘이 없으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악마를 죽이거나 쫓아낼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같은 악마인 편애라면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시선을 옮겨 편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편애가 내 손등 위를 콕 찔렀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인 것 같았다.

“넌 봉인되어 있었을 텐데, 어떻게 봉인을 푼 거지? 자색 눈이 네가 멋대로 돌아다니게 놔둘 리가 없는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편애가 감색 눈의 악마를 추궁하듯 물었다.

싸한 얼굴이 내가 아는 그의 모습과 다르다.

백설 공주처럼 까만 머리와 하얀 피부가 그의 선명한 녹색 눈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뭐어, 다 방법이 있어. 그리고 그쪽은 내 봉인이 풀린 걸 알고 있을걸? 이쪽 차원에 들어온 지 꽤 됐거든.”

감색 눈의 악마가 편애의 물음에 답하며 느긋하게 미소지었다.

봉인이 풀렸다고? 내 모습을 한 인간이 건 봉인이 아니었던가? 그 인간은 이제 그쪽 차원에 존재하지 않을 텐데, 봉인이 왜?

“그 봉인은 아무나 풀 수 없는데, 누가 네 봉인을 푼 거지?”

편애 또한 그 점이 걸렸는지 바로 질문을 던졌다.

감색 눈의 악마는 우리 둘을 바라보며 두 손 위에 턱을 올렸다. 흔히 말하는 꽃받침 자세였다.

“글쎄. 미리 말해 주면 재미없지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는 말투가 눈을 찌푸리게 했다. 편애의 질문이 이어졌다.

“너, 이 차원에서 뭘 했어?”

“공공의 이익 실현을 위한 정보 공유?”

“어디서?”

“차원 학회인가 하는 곳.”

차원 학회. 익히 아는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교만왕의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그쪽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분명히 이 차원 세력 구도를 물어봤을 때 들었지. 나는 단말기를 꺼내 남아 있는 기록을 확인해 보았다.

◀[아니 근데 세력 구도 같은 걸 대체 어떻게 알아내는 거야? 스파이라도 심었어?]

▶[스파이요?]

▶[스파이가 있긴 하죠]

▶[그런데 이건 메시지로 못 알려 드려요]

▶[1급 기밀이거든요]

◀[나 VVIP 아니야? 이래도 안 됨?]

▶[당연하죠;;]

▶[저 이거 함부로 발설했다간 제거당해요]

▶[다시는 제 얼굴을 못 보실 수도 있다고요;; 아시겠어요?].

스파이가 있다. 그런데 함부로 말하면 제거당한다. VVIP한테도 메시지로 얘기 못 해 줄 이야기다.

◀[그래서 색욕왕이 밀리고 있다는 소리도 맞고, 외부 차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도 맞다는 소리지?]

◀[근데 출처는 1급 기밀이라서 발설 못 하니 궁금하면 직접 와서 들어라?]

[네 그니까 협회 통해서 자료만 보내지 마시고 좀 오세요]▶

[윗선에서 아레스 님 기다린다니까요]▶윗선과 통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비밀. 귀찮아질 것 같아서 꾸준히 무시해 왔던 건이다.

나는 단말기 화면을 끄고 고개를 들어 감색 눈의 악마를 보았다.

그는 지금 제 입으로 자신이 차원 학회의 내통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들은 언제부터 우리 차원에 간섭하고 있었던 거지? 이 차원은 이미 그들에게 점령당했나?

“네가 우리를 알아차리기 전부터, 줄곧.”

줄곧. 나는 소리 내지 않고 입 안에서 그 말을 굴려 보았다.

극야 또한 게이트가 열리기 전부터 우리 차원 안에 있었다. 우리 사회에 은밀하게 스며들어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인간인 척하며 살아왔다.

어쩌면 이 세계는 내 생각보다 더 빨리 침식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안일하게만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턱 밑까지 차고 올라왔다. 땅에서 물이 밀려들어 오는 걸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물에 잠겨 허우적대고 있었다.

“네 주변에 있는 걸 너무 믿지 마. 어쩌면 인간 아닌 게 있을지도 모르잖아.”

감색 눈의 악마가 히죽대며 말했다. 나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이미 차고 넘치게 있어. 너도 그중 하나니까 아닌 척하지 마.”

“그런 거 아니야. 오랜만에 너의 그런 모습을 보니까 좋아서 그래. 착한 일 하는 김에 너한테도 알려 줄까? 지금 네 옆에 서 있는 건 최악의 거짓말쟁이야.”

“내 옆에 서 있는 거?”

나는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여전히 싸한 표정의 편애가 감색 눈의 악마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응. 쟤는 언제나 자기 영역을…….”

드드드드!!

땅이 거칠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흔들리는 땅과 함께 휘청거리다가 몸을 낮췄다.

새벽 공대원들이 있는 쪽에서 비명이 마구 터져나온다. 어느 순간 편애의 녹색 눈이 반짝 빛났다.

“숨기고 싶어하거든.”

쿠구구궁-!!!

거대한 굉음과 함께 땅이 폭삭 내려앉았다. 건물이 쪼개지며 그 여파가 이쪽으로 튄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편애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보였다.

그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가자 앞으로 무너진 땅이 보였다.

특이하게도 모든 땅이 꺼진 게 아니라 감색 눈의 악마가 있던 곳만 지반이 내려앉아 있었다.

명백한 싱크홀이다.

슬쩍 올려다본 편애의 얼굴이 여전히 굳어 있었다. 나는 조금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찔리는 거 있지.”

“아니라고 해도 안 믿을 거잖아.”

“잘 아네.”

“아니. 나는 널 잘 모르는 편이지. 악마치고는.”

편애가 푹 꺼진 검은 구덩이를 보며 말했다.

맥 빠진 목소리에 묻어나는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듣는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들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힘내. 일단 너는 우리 집 악마잖아.”

다른 악마들은 몰라도 편애는 나와 계약했으니, 일단은 내 편이었다.

하지만 델리키아와 PK 같은 경우도 있는데, 이 악마를 확실히 내 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생각조차 편애가 다 듣고 있을 테니, 생각해 봤자인 부분이었다.

나는 편애의 옆에서 푹 꺼진 구덩이를 함께 바라보며 말했다.

“완전히 골로 보내 버렸네. 아까부터 그렇게 싸우더니.”

“쟤랑은 사이가 안 좋아. 처음부터 안 좋았어.”

“그래도 친구랑은…….”

친구가 아닌가.

나는 친구랑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저 두 악마가 친구인지 알지 못할뿐더러, 나는 친구라곤 하나뿐인 아싸였기 때문이다.

사태의 원흉이 사라졌으니 남은 건 뒷정리다. 복잡한 건 일이 끝난 다음에 해결하는 게 좋겠지.

나는 편애를 바라보며 물었다.

“땅 무너뜨리는 거 한 번 더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그럼 내가 쟤들 대피시킬 테니까, 너는 상황 잘 보고 한 번 더 해 봐. 저 거인은 크니까 깊게 파 줘.”

크레이터는 던전처럼 사라지지 않는 장소라 관리가 까다롭다.

하지만 이곳을 관리하는 건 보통 PK니 이 정도 난장판은 상관없을 거다.

사건 후폭풍은 자기가 감내해야지. 이게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쿵!

아직 멀쩡한 거인이 가장 앞에 선 하람을 향해 발을 굴렀다. 후에 소환된 사냥개 둘은 이미 처리했는지 근처에 쓰러져 있었다.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건 거인이니 자잘한 걸 미리 처리했구나.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나는 편애의 대답을 듣지 않고 앞으로 달렸다.

가장 뒤에 있는 것은 반서준. 나는 반서준 옆으로 다가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놀라지 않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땅을 무너뜨릴 거야. 뒤로 가.”

“…얼마나?”

“글쎄. 멀면 멀수록 좋지 않을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반서준은 망설이지 않고 재깍 움직였다.

이상할 정도로 날 신뢰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도 반서준을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전투 특성이 아닌 만큼 오랜 전투에 약한 랑은 웃음꽃이 활짝 핀 얼굴로 도망갔고, 비눗방울 또한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내 변한 모습에서 마리 씨라도 본 건지 말실수하는 모습은 유감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모두 다 끝난 일이고, 마리 씨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데.

나는 비눗방울을 보내고 하람의 옆으로 다가갔다.

가장 앞에서 거인을 상대하고 있던 하람은 이제 슬슬 힘에 부친 모양인지 자세가 흐트러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불평 가득한 생각이 들리지 않았다.

“하람 님, 뒤로 빠지세요. 한 방에 끝낼 거니까.”

과하게 몰입한 건가?

나는 하람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고개를 돌린 그의 노란 쪽 눈에 흐린 보라색이 섞여 있었다.

하람은 말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입술을 벙긋거리다가, 돌연 나를 향해 칼을 겨누었다. 아.

“넌 하람이 아니구나.”

그 말에 하람의 입술이 위로 쭉 올라간다. 일그러진 미소가 저 몸 안에 들어 있는 게 하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나는 거칠게 몰아치는 황금빛 검기에 맞서 푸른 불꽃을 피워냈다.

콰광!!

두 힘이 허공에서 맞부딪힌다. 그와 동시에 쏟아지는 거인의 공격.

나는 내 옷자락을 베고 지나가는 검의 궤적을 보며 생각했다. 배후좌라는 것들은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간을 선택하고 힘을 준다.

그럼 그 끝은 계약한 인간을 침식해 본질을 바꾸고 육체를 빼앗아가는 건가?

아니면 하람의 배후좌가 봉인되어 있기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인가. 어쩌면 아까 감색 눈의 악마가 말한 것은 이런 결과와 관련 있을지도 모르겠다.

편애가 나와 계약하고 나를 돕는 것은 결국 내게 얻어 갈 것이 있기 때문이니까.

나는 아공간에서 프라가라흐를 뽑아 하람의 검을 쳐내고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람의 배후좌는 바르바토스. 그것은 마법사지, 검을 쓰는 검사가 아니다. 본래 하람과 달리 검을 다루는 모습이 매우 서툴렀다.

검을 빼앗긴 하람의 몸을 잠재우는 것은 매우 쉬웠다. 나는 팔꿈치로 하람의 뒤통수를 세게 가격했다.

풀썩 쓰러지는 몸을 받아 내고, 거인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여전히 건물의 갈라진 단면 근처에 서 있는 편애가 보인다. 나는 목에 힘을 주어 소리쳤다.

“지금!!”

편애의 녹색 눈이 다시 빛을 발했다.

쿠구구궁!!!

땅이 다시 무너져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