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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05화 (105/175)

제105화

살면서 들은 건 부처님의 공덕 몇 쪼가리뿐인데, 악마 같은 걸 알아야 할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죽기 전에 아미타불 10번 외치면 죽어서 좋은 곳 간다는 것밖에 모른다. 편애가 한 말을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사후세계는 없는 모양이지만.

【“아니? 있어.”】

“그게 왜 있는데. 죽으면 자색 눈한테 간다며?”

【“그러니까 말이야. 궁금하면 자색 눈한테 문의해.”】이쯤 되면 극야는 대체 뭐 하는 악마인지 궁금해진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걔는 센데 넌 왜 허접해?”

【“난 허접한 게 아니야. 그게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그래.”】

“응. 그래. 내가 착하니까 너랑 계약해 준 거지, 그렇게 쓸모없으면 어디 가서 계약 못 해. 너도 스펙 좀 올리고 살아.”

【“아까 내 덕에 정신 공격 안 받았잖아. 내가 허접한 게 아니라 그건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서 그렇다니까!”】편애는 스펙을 올리라는 내 말에 분개했다. 아니, 이 대스펙 시대에 스펙 올려서 손해 볼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화내는 거야?

하도 놀렸더니 우리 집 악마의 역치가 낮아진 모양이다.

이 묘하게 인간 같은 악마는 은근히 잘 삐졌다. 이제 적당히 놀려야겠다.

부서진 왕좌에 기대어 선 악마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서 분투하는 새벽 4인방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별을 관찰하는 천체 관측자, 차원과 차원을 잇는 마천루, 누구나 동경하고 갈망하는 왕좌, 마지막으로 언제나 네 발 달린 동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

감색 눈의 악마가 나열한 것들이 뇌리에서 어지러이 돌아다녔다. 푸는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수수께끼다.

별을 관찰하는 천체 관측자. 이건 천체 마법에 관한 이야기겠지.

편애가 별 구름 너머의 존재를 이야기해 준 덕에 대충 감이 왔다.

차원과 차원을 잇는 마천루. 차원과 차원을 잇는 것은 모든 소환술사들의 기본이다. 소환물은 ‘다른 세계’의 존재를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천루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잘 모르겠다.

높은 곳을 동경한 인간이 저 하늘 높게 쌓아 올린 고층 건물. 다른 세계의 악마와 발전한 인류의 과학 기술이 무슨 연관이 있다고.

감색 눈의 악마가 늘어놓은 수수께끼는 편애와 계약할 때 그가 속삭인 말들과 닮아 있었다.

개중에서 가장 의뭉스러운 말은 누구나 동경하고 갈망하는 왕좌. 나는 입을 열어 편애에게 물었다.

“네가 저번에 주절거렸던 수식어가 뭐였지?”

“응? 나한테 물은 거야?”

저 하늘 높은 곳까지 날아올라 왕좌에 앉고자 했으나, 끝내 추락하고 만 델리키아. 그리고 그 델리키아가 남기고 간, 감색 눈의 악마.

눈을 동그랗게 뜬 악마가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물었다. 나는 괜히 귀여운 척하는 야생의 악마를 무시하고 우리 집 악마를 부추겼다.

“저번에 한 말 있잖아. 무의식의 관찰자 어쩌고.”

【“무질서의 관찰자.”】

“그래, 그거 말이야. 다시 한번 말해 봐.”

바란 적도 없는데 열심히 떠들 때는 언제고, 판을 깔아 주니까 입을 꾹 닫는다.

야, 그린 컬러 악마. 죽었어? 왜 말이 없어? 거기 너희 길드장 떴어?

편애를 애타게 부르고 졸라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오히려 말이 나온 곳은 다른 쪽이었다.

“무질서의 관찰자.”

“…그거,”

“주시하는 자, 의식의 뒤를 걷는 자. 기억의 틈새를 파헤치는 무질서의 관찰자.”

편애의 수식어를 줄줄 읊은 감색 눈이 부서진 왕좌에 기대앉아 다리를 흔들거렸다. 이어지는 목소리가 즐거움에 가득 차 있다.

“지나간 계절의 관리자, 풍요를 기원하는 횃불, 황폐한 대지를 뒤흔드는 저주, 그리고…….”

【“그만.”】

“씨앗의 수호자.”

파지직!!

감색 눈의 이마 근처에서 녹색 스파크가 튀었다.

내가 계약하며 보았던 게 촛불이 아니라 횃불이었나. 감색 눈이 머리를 부여잡고 킬킬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있었던 믿음도 죄다 사라지는 것 같다.

씨앗이고 나발이고 아무리 지껄여 봤자 나는 하나도 모른다.

저것들은 자기 할 말만 하면 다인 줄 알아. 이래서 나이 수만 년 단위로 먹은 것들은 안 된다니까. 한낱 인간의 마음을 모르지.

아무튼 감색 눈이 편애의 성질을 건드려 준 탓에 시간은 벌었다.

저것을 퇴치하기 위해 남은 것은 ‘누구나 동경하고 갈망하는 왕좌’와 ‘언제나 네 발 달린 동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

왕좌는 뒤로 미루는 게 좋겠다. 단정 짓기에는 조금 어려운 문제니까. 그럼 언제나 네 발 달린 동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

내려다보고 있는 ‘나’는 감색 눈의 악마를 말하는 것이므로 따로 해석할 필요가 없었다. 네 발 달린 동물이라면 짐작하고 있는 게 있다. 아마 네 발 달린 동물은, 【“인간.”】일 것이다.

갑자기 끼어들어 정답을 툭 내뱉은 편애가 다시 남색 눈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머리를 끌어안고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이 기막히게 정신 사나웠다.

네 발 달린 동물이 나오는 수수께끼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코 없는 스핑크스가 내는 그 문제는 너무 우려먹은 나머지 국물 우릴 뼈조차 사라져 버렸다.

그럼 남은 것은 이제 하나, 누구나 동경하고 갈망하는 왕좌.

【“우리가 군림하던 시절의 왕은 모두 몽상가였어.”】

“너희가 군림하던 시절이면…….”

【“까마득한 옛날이야. 그들은 가장 충실한 사제이자 제사장이었고, 우리의 이름을 빌려 다른 이들을 지배하는 자였다. 언젠가 우리가 사는 하늘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 우리는 하늘에서 살지 않았는 데도.”】숨이 넘어갈 듯이 웃던 감색 눈이 부서진 왕좌에 머리를 처박기 시작했다.

델리키아처럼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않은 걸 보니 이번에도 편애가 손을 쓴 모양이었다.

【“우리는 계약자의 욕망을 읽고 그자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지. 하지만 우리에게도 한계는 있어.”】

“예를 들면 어떤?”

【“음… 자색 눈이 아닌 다른 개체에게 죽은 자를 살려 달라고 한다던가? 죽음은 온전히 자색 눈의 영역이야. 나는 죽은 자가 살아 돌아왔다고 착각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진짜로 죽은 자를 살려 줄 수는 없어.”】간단하게 말해서, 횟집 가서 스테이크 시켰다는 소리였다.

횟집에서 비슷하게 연어 스테이크를 만들어 줄 수는 있어도, 그게 진짜 소고기 스테이크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소리겠지.

【“미지로부터 오는 공포는 무지한 자들 위에 군림하기 좋은 수단이야. 감색 눈의 영역에는 ‘왕좌’가 포함되어 있고, 그와 계약하면 반드시 왕좌에 앉을 수 있다. 그게 비록 제대로 된 왕이 아니라 꼭두각시일지라도, 어떻게든 계약자를 왕좌로 이끌지.”】편애의 설명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왕좌가 포함된 감색 눈의 영역.

계약자를 왕이 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악마.

나는 그제야 델리키아가 수많은 악마 중에서 그를 콕 집어 부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델리키아는 죽음을 목전에 둔 그 순간에도 왕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델리키아가 원한 것은 소환 마법의 극의인 별 구름 너머의 존재가 아니었다. 일생 내내 간절히 바랐던 왕의 자리였다.

가장 높은 곳. 모두의 머리꼭지를 바라보며 군림할 수 있는 자리. 왕의 머리 위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하늘뿐이다.

“…마천루.”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장소.”】

“하늘 위에는 우주와 천체뿐이잖아.”

【“지성을 가진 생물이 동경하고 갈망하는 미지의 영역이지.”】하늘 너무 높은 곳까지 올라간 나머지 추락한 이카루스, 하늘에 닿기 위해 쌓아 올렸던 바벨탑, 하늘 위에 있는 신이 왕을 내려준다고 생각했던 과거까지.

인간은 꾸준히 하늘에 닿기를 갈망해 왔다.

아. 엉망으로 퍼져 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차원과 차원을 잇는 마천루의 차원은 별이다. 외부 차원의 존재들은 차원을 별에 빗대어 설명했으니까.

마천루는 단순히 별을 관찰하기 가장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하늘과 가깝고 높은 곳일수록 별이 더 가까워지니까. 또한 마천루 자체가 하늘을 동경하는 인간의 결과물이다.

왕좌가 포함된 영역의 주인. 영역 가장 높은 곳에서 그 너머의 미지를 파헤치는 존재.

“감색 눈의 악마가 주관하는 영역은 하늘이구나.”

【“그래.”】

결론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왔다. 나는 왕좌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꿈틀거리는 악마를 향해 다가갔다.

눈과 똑같은 색깔의 긴 머리채가 손 한가득 잡혔다.

머리칼을 잡힌 악마가 몽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무자비한 손길로 그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쾅! 쾅! 쾅!

사람 머리가 아니라 돌을 내려찍는 것처럼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만! 그마안!”

바닥에 철퍼덕 엎어진 감색 눈이 두 팔을 바둥거리며 외쳤다.

나는 악마의 머리를 휙 놓아 버리고 왕좌에 기대앉았다. 그러자 이마에서 피를 질질 흘리는 악마가 샐쭉 웃는 얼굴로 물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어?”

“몰라, 임마.”

네 영역 하나 알았다고 널 알게 되는 건 아니란다.

내가 하람의 음흉한 속내와 놀라운 가족 관계를 알았다고 하람의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지 않은가.

“네가 누군지는 모르겠고, 너랑 계약하면 안 된다는 건 알겠다.”

“왜? 나는 너를 왕으로 만들어 줄 거야.”

“그러니까 나는 그게 싫은 거라고. 왕 안 할 거라니까?”

왕의 덕목 타령하는 것도 다 농담 삼아서 하는 거였다. 하도 왕 타령하는 인간들이 많으니까 대충 어울려 준 것뿐이다.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소리는 예솔이와의 첫 만남부터 징하게 들었다. 예솔이는 관상 타령을 하면서 왕이 될 운명을 예견했다.

나는 슬슬 예솔이에게 일을 때려치우고 점집이나 차리라는 소릴 해야 하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아니. 너는 왕이 될 거야.”

세상에는 내가 왕이 될 거라고 예견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으니까.

“너는 기억 못 하겠지만, 우리는 계약한 적이 있거든. 아, 이젠 다르니까 기억 못 하려나?”

감색 눈의 이마를 타고 흐른 피가 턱 끝에 맺혀 뚝뚝 떨어졌다.

다시 한번 입가를 손으로 가린 그가 특유의 기이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씨앗의 수호자가 무슨 뜻인지 알아?”

“뭐?”

“너는 우리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어? 내 영역은 알아?”

“하늘이잖아. 말하면 썩 꺼지겠다며? 들었으면 썩 꺼져.”

“아직 우리를 잘 모르는 거지? 그러니까 슈브랑 계약했겠지.”

감색 눈이 노래를 흥얼거리듯 묘한 리듬을 넣어 중얼거렸다.

슈브? 슈브라면 편애의 애칭이었다. 러브리스가 그렇게 부르는 걸 들은 적 있다.

“다른 애면 몰라도 슈브랑 계약한 이상, 너는 왕이 될 거야.”

“…무슨 소리야?”

【“헛소리야.”】

편애가 다급하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편애의 말을 무시하고 감색 눈의 말을 경청했다.

“걘 씨앗의 수호자거든. 곱게 키워 두면 늘 강탈당해. 그거 알아? 식물이 열매를 맺으려면 수정이 필요해. 대성하기 위해서는 보호자 품에서 떠나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뭔 소리야? 보호자가 편애야? 강탈은 누가 하는데?”

물론 경청한다고 해서 이해가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이 빌어먹을 악마들은 말을 더럽게 어렵게 해서 사람을 화나게 했다. 대화 한번 하자고 하면 온갖 비유가 날아다녔다. 나는 악마들에게 시인의 길을 추천해 주고 싶었다.

【“저런 거 들을 필요 없어.”】

중간중간 끼어들던 편애가 다소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동시에 무언가가 쑥 빠져나오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미약한 바람이 불었다. 어느새 상처를 지운 감색 눈의 악마가 눈을 가늘게 접어 웃었다.

“대화 빨리 끝내라고 알려 줄 거 다 알려 줬는데, 이상한 거나 듣고 있고 말이야.”

허공에서 쑥 튀어나온 손가락이 코끝을 쿡 찔렀다. 선명한 녹색 눈이 시야에 잡혔다.

“빨리 처리하고 돌아가자.”

손을 거둔 편애가 감색 눈의 악마를 흘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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