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종족 문제로 인한 소통 에러는 편애가 두 번째 교신을 하고 나서야 해결됐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감색 눈의 악마는 허리까지 오는 긴 장발의 남자였다.
섬세하고 예쁜 얼굴의 극야나 종잇장같이 길고 얇은 편애와 달리 곧고 단단한 바디가 눈에 띄었다.
마법진 중앙에 선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는 게 보인다.
멀쩡히 움직이는 법은 여전히 찾지 못했는지, 서 있는 모습이 상당히 부자연스러웠다.
“그 얼굴은 또 오랜만이네?”
감색 눈의 악마가 제대로 소리 내 말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말하는 게 어색한지 자꾸만 입술을 벙긋거리는 게 바보 같았다.
“나는 좋아. 네가 두 발로 서 있는 모습을 봤잖아!”
두 팔을 위로 쫙 벌린 감색 눈의 악마가 허공에서 떨어지는 물건을 낚아채며 소리친다.
붉은 보석이 박힌 검은색 지팡이. 마법사의 필수품을 꽉 그러쥔 그가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그를 부르는 데 쓰인 마법진이 다시 한번 빛난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너 같은 거 몰라. 우리 차원 박살 내지 말고 썩 꺼져.”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악마의 후드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남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자극하는 건 별로 좋지 않아.”】
편애가 불쑥 튀어나와 코멘트를 남겼다.
나는 여전히 찰싹 달라붙어 있는 PK를 퍽 밀치고 마법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지팡이를 쥔 악마가 다가오는 날 보며 웃었다.
“기억 못 해?”
“모른다니까.”
“머리가 굳었으면 공부를 해야지. 문제를 낼게요, 학생.”
바람이 휘몰아치며 옷깃을 흔들었다. 악마가 걸친 망토도 거칠게 펄럭거렸다.
망토에 달린 후드가 뒤로 휙 넘어가고, 그 안의 머리카락이 허공으로 비산한다.
공중에 촤르륵 펼쳐진 엉망진창의 문자들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되는 게 보였다.
“별을 관찰하는 천체 관측자, 차원과 차원을 잇는 마천루, 누구나 동경하고 갈망하는 왕좌. 언제나 네 발 달린 동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가지런히 정리된 문자들이 한데 뭉쳐 빛을 발했다. 나는 목덜미를 스치는 스산한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위로 들었다.
“‘나’는 무엇일까요?”
왼손으로 입가를 가린 감색 눈의 악마가 샐쭉 웃었다.
쾅-!!!
빛을 발한 마법진으로부터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와 무도회장을 엉망으로 만든다.
【“와우.”】
지켜보던 편애가 짧은 감탄사를 뱉었다. 재빨리 특성을 사용해 공중에 떠오른 PK가 기절하기 일보 직전의 얼굴로 내게 손을 뻗었다.
히죽히죽 웃는 악마가 똑같은 마법진을 여러 개 그려냈다.
“날 죽이고 싶으면 정답을 맞혀 봐. 나는 개념이기 때문에 내 영역을 없애지 않으면 영원히 존재하거든.”
저 근본도 없는 악마 놈이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나는 근처의 테이블을 밟고 위로 점프했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방금까지 밟고 있었던 바닥이 무너진다. 거칠게 꿈틀거리는 두족류의 다리가 무도회장 안을 휩쓸었다.
“왜 갑자기 해산물 파티야? 저 새끼 미쳤나?”
【“미쳤다고 몇 번을 말해? 내 말 안 들었지.”】
“갑자기 해산물 다리를 소환하니까 그렇지. 쟨 시간 장소 상황도 모른대? 파티에 걸맞은 음식을 가져오라고 해.”
【“저게 음식물 섭취를 할 것 같아? 그런 건 상식이 통하는 사람한테나 말하는 거야.”】
“자긴 상식이 통하는 척하고 있네.”
【“야!!”】
편애가 날강도처럼 소리 질렀다.
나는 창백한 안색의 PK를 붙잡아 옆구리에 끼고 무도회장 안을 질주했다. 나보다 길쭉한 관계로 바닥에 질질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신 좀 차려. 너 문어 다리한테 어퍼컷 맞고 저승 가고 싶어?”
“…넌 저걸 보고도 멀쩡하네. 안 무서워?”
“그냥 거대한 문어 다린데 뭐가 무서워?”
“나도 잘 모르겠는데, 완전 무서워.”
헌터란 직업은 보통 3D 직종이 아니어서, 일하다 보면 별 꼬락서니를 다 봤다.
PK는 근무처가 크레이터라 나보다도 끔찍한 걸 많이 보고 살았다.
그런 인간이 무섭다고 하면 정말로 문제가 있는 건데.
나는 고개를 휙 돌려 쇄도하는 문어 다리를 바라보았다. 그냥 거대한 문어 다리였다. 산낙지 같기도 하고.
마법진 단면에서 뽑혀 나와 꿈틀꿈틀 진격하는 그것은 사람 따위는 가뿐하게 박살 낼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부서진 무도회장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끼익-.
타이밍 좋게 무도회장의 문이 열린다. 단정한 흰 머리칼과 낯익은 오드 아이. 하람이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거침없이 달려드는 문어 다리를 발견했다.
쾅-!!
언제 문이 열렸냐는 듯이 가뿐히 닫혔다. 저 인간은 문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닫네.
나는 들고 있던 PK를 허공에 휙 던져 버리고 땅을 박찼다.
끼이익-.
문이 다시 한번 열리더니 문 사이로 비눗방울이 고개를 내민다. 곧 꿈틀거리는 문어 다리를 확인한 비눗방울이 자연스럽게 문을 쾅 닫아 버렸다.
누가 하람과 친한 인간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이 똑같았다.
나는 오른팔을 휘둘러 푸른 전기를 끌어냈다.
콰지지직-!!!
심호흡과 동시에 거센 낙뢰가 떨어져 근거리의 문어 다리를 불태웠다.
“탔네?”
저 끝에서 아장아장 걷기 연습을 하고 있던 감색 눈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말했다.
겉면이 살짝 그을린 다리를 확인한 그가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열심히 따라 만들어 본 건데, 금세 망가져서 아쉽다. 괜찮아~ 다른 것도 있거든.”
열심히 꿈틀대던 문어 다리가 마법진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한숨 돌리며 하는 거 없는 우리 집 악마를 불렀다.
“넌 뭐 없어? 너도 공격 같은 거 해 봐. 계약까지 해 줬는데 어째서 이렇게 쓸모가 없어?”
【“내 담당은 육탄전이 아니라 전략전이거든?”】
“그럼 뛰어난 계책을 세우든가, 아니면 아까 한 것처럼 저 악마 놈 정신을 주물러 보든가. 델리키아도 미치게 만들었잖아?”
【“그건 정신이 멀쩡한 사람한테나 하는 거야. 진작 미친놈을 어떻게 미치게 만들어?”】편애가 새침한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아~ 다 잡은 물고기라 이거지? 이미 계약했으니까 신경 쓸 것도 없다 이거지?
【“넌 애가 말을 왜 그렇게 해? 누가 보면 내가 나쁜 사람인 줄 알겠어.”】
“너 이미 악마야, 이 악마야.”
【“무작정 돌진한다고 저게 물러갈 것 같아? 머리를 써야지. 쟤가 처음에 말했잖아. 진짜 ‘나’가 누구인지 맞춰보라고. 정답을 맞춰도 죽이는 건 어렵겠지만, 알아야 시도라도 해 볼 거 아니야?”】문어 다리를 집어넣은 감색 눈이 다른 마법진을 그렸다. 남색 마나로 그려진 마법진은 붉은빛을 내뿜으며 별의 형상을 그렸다.
“나와라, 베텔게우스.”
감색 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도회장 안에 붉은 별이 떴다.
압도적인 크기의 붉은 별을 감싼 것은 별이 뿜어낸 가스.
별의 울퉁불퉁한 겉면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눈앞에서 거대한 심장이 뛰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끼이익-.
무도회장의 문이 또 한 번 열렸다. 무도회장 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반서준이 별의 모습을 보더니 문을 쾅 닫았다.
무척 빠른 속도를 보니 본능에 가까운 반응 같았다. 그만큼 심장 모양의 별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천체 마법이야.”】
“천체 마법?”
【“소환 마법의 하위 항목이지. 그들은 결국 우주와 별을 바라보는 별지기니까.”】거세게 뛰는 붉은 별의 겉면이 쩌저적 갈라진다. 갈라진 틈을 비집고 나온 것은 커다란 몽둥이를 든 거인이었다.
건물 천장을 박살 내며 소환된 거인이 고개를 숙여 무도회장 안을 내려다본다. 나는 나보다 10배쯤 커 보이는 거인을 바라보았다.
쿵-!!!
거인이 발을 들어 올려 바닥을 내려찍는다.
나는 방금까지 내가 서 있었던 장소를 흘끗 보았다. 거인의 발이 바닥을 부수고 2층 밑으로 내려가 있었다.
끼익-.
정확히 네 번 열리고 네 번 닫혔던 무도회장의 문이 활짝 열린다. 나는 고개를 돌려 문을 연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피 묻은 옷 소매를 반쯤 뜯어낸 랑이었다.
“역시 아직 있었네요. 저 겁쟁이들이 문 여닫기를 반복하길래 아무도 없는 줄 알았죠.”
망가진 회장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랑의 뒤로 겁쟁이 셋이 고개를 내민다.
그렇게 살펴봤자 문어 다리랑 붉은 별은 이제 없는데.
무도회장 안을 꼼꼼하게 스캔한 그들은 공포의 원인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우르르 몰려왔다. 나는 무도회장에서 슬그머니 발을 빼는 PK를 확인하고 슬슬 뒷걸음쳤다.
콰앙-!!
밑으로 푹 빠진 거인의 발 대신 그의 몽둥이가 바닥에 처박혔다.
“분명히 공주를 상대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공주는 없네요?”
검을 든 하람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거인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거인의 동태를 살피며 하람의 말에 대답해 줬다.
“공주는 죽었어요. PK가 그녀의 뒤통수를 쳤거든요.”
“공주가 죽었으면 적이 없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근데 공주가 죽기 전에 자기 목숨을 바쳐서 이상한 걸 소환하고 갔거든요. 저기 있는 거.”
아장아장 우리 아기 잘 걸어요~ 따위의 추임새를 넣어 줘야 할 것 같은 모습의 악마.
관절 이상하게 안 돌리고 제대로 걷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니 뽁뽁이 신발이라도 사 줘야 할 것 같았다.
“아까 나온 문어 다리랑 붉은 별은 저게 소환한 거예요. 저희는 공주 하나 죽이려다가 더 큰 걸 잡게 된 셈이죠.”
“연가시 같네요.”
“그건 작잖아요.”
“그럼 에일리언으로 할게요.”
하람이 검을 휘두르자 거인의 무릎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특성이 특성이니만큼 공격이 매끄럽게 박히는 모양이었다.
반면에 1공대 메인 딜러인 반서준은 조금 고전하고 있었다. 거인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반서준이 거인을 향해 총을 갈겼다.
그러나 단단한 거인의 겉가죽에는 총알이 박히지 않았다. 저걸 뚫으려면 조금 더 크고 날카로운 것을 던져야 한다. 총알같이 작은 것 말고 말이다.
“핑거킹 님, 잡을 건 저것뿐이죠?”
“일단은요.”
“좋아요.”
나는 랑이 묻는 말에 대답하고 뒤로 빠졌다. 이어서 하람이 가장 앞에 서서 검을 휘두르고, 그 뒤를 랑이 따랐다.
두 사람을 보조하는 것은 비눗방울, 가장 뒤에서 투척용 나이프를 던지는 것은 반서준.
누가 다치면 랑이 치료하고, 그 자리가 비면 정해진 사람이 커버한다. 네 사람의 합공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던전 밖에서는 서로를 디스하는 사람들일지 몰라도, 던전 안에서만큼은 서로를 완전히 믿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기이한 감상이 생겼다. 말로 하긴 뭐하고 표현하자니 어려운 감상이었다.
“잘 버티네?”
거인의 뒤에서 아장아장 걷기 연습을 하던 감색 눈이 두 개의 별을 더 소환했다.
시리우스와 프로키온. 밝은 섬광을 내뿜은 두 별은 두 마리의 사냥개로 변했다. 거대한 사냥꾼의 크기에 걸맞게 아주 크고 사나운 개들이었다.
침착하게 거인을 상대하던 새벽 길드 4인방은 투입된 멍멍이 두 마리 때문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비눗방울이 앉아! 일어서! 따위의 명령을 내리며 개를 조련하고 있긴 하지만, 오래 버틸 것 같지는 않았다.
【“도우러 안 가?”】
“나는 내가 할 거 해야지. 저 악마가 던진 질문에 답해야 하잖아.”
악마의 어두운 남색 눈이 요요히 빛난다. 나는 뒤편에 홀로 서 있는 악마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발소리에 고개를 돌린 악마가 날 보며 샐쭉 웃는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모아 쥔 그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기억나?”
“안 나.”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