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바닥에 쓰러진 델리키아가 몸의 관절을 두두둑 꺾었다. 마치 실에 매달려 움직이는 마리오네트 같은 모습이었다.
소름끼치는 파열음이 건물 전체를 관통한다.
나는 이쪽으로 후다닥 달려와 내 뒤에 숨은 인간 말종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지금 이 꼴을 보고서 비명이 나오냐.”
“의도한 건 아니었잖아. 좀 봐 줘.”
애교 섞인 목소리가 가증스러웠다. 저걸 죽일 수도 없고, 콱 씨.
무도회장 바닥을 꽉 차게 채운 마법진이 불그스름한 남색으로 일렁거렸다.
나는 무도회장 가장자리, 마법진의 바깥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새 벚꽃나비가 사라진 걸 보니 특성을 쓴 모양이었다.
“감색 눈의 악마는 뭐 하는 악마야?”
악마가 일곱 마리나 있는데 왜 굳이 그 악마를 불렀을까? 얌전한 편애 같은 거 부르면 얼마나 편하고 좋아.
나는 마법진 바깥에서 허공을 바라보며 물었다. 옆에 선 PK가 자기한테 한 말인 줄 알았는지, ‘응?’ 따위의 소릴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색이 무슨 색인지 알아?”】
“글쎄. 감귤 색? 아니면 먹는 감색?”
【“아니지. 감색은 어두운 남색이야. 저 마법진을 채운 색깔.”】천장에서 흘러내리는 진득한 남색 액체가 아직 마법진을 채우는 중이었다.
나는 발끝을 살짝 뻗어 액체로 그려진 마법진을 문질러 보았다. 신발 밑창에는 아무것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저 엘프 공주의 타고난 눈 색은 다른 색이야. 소환술에 입문한 후로 군청색이 되었지. 군청색은 남색의 다른 이름이야. 저 엘프가 무엇을 소환할지는 안 봐도 뻔하지.”】
“델리키아가 최고의 소환술사를 소환했다는 뜻이구나.”
【“그래. 자신의 남은 목숨을 모조리 쥐어 짜내고, 바깥의 동족을 죄다 씹어 먹은 뒤,”】투둑. 우드드득.
목에 나이프가 꽂힌 델리키아가 희뿌연 눈을 뜬 채로 관절을 꺾었다. 그녀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뼈가 조각나고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이지를 완전히 잃은 생물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마법진 중앙으로 향한다. 완전히 뒤로 돌아간 그녀의 목이 덜렁덜렁 흔들리는 게 보였다. 오늘 밤 꿈에 나올 만큼 잔인하고 기괴한 광경이다.
【“증오로 소환 주문을 덧칠하고….”】
마법진 중앙에 가서 선 델리키아가 돌아간 목을 아래로 떨궜다. 실 풀린 인형처럼 쓰러진 그녀가 음산한 낯빛으로 입술을 벙긋거렸다.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마저 제물로 바쳐서,”】편애의 읊조림이 계속되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PK를 살폈다. 유하게 웃는 얼굴의 PK가 내 시선을 눈치채곤 작게 속삭였다.
“저거 물리칠 수 있어? 난 모르겠는데.”
“넌 왜 수습도 못 하면서 일을 이 모양으로 만드냐?”
“언제든 문젯거리를 수습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모시고 있어서. 이번만 용서해 주면 당분간 얌전히 살게.”
살살 웃는 얼굴이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 같았다.
이게 말이냐 방구냐? 나는 PK의 꽁지 머리를 잡고 콱 잡아당겼다.
“악!!! 아파!! 아파!!!”
“아프라고 잡아당기지, 그럼 안 아프라고 잡아당기냐?”
“폭력 반대!! 말로 하자, 말로!!”
“넌 이 일 끝나면 한강에서 다이빙할 준비나 해.”
수틀리면 한강이 아니라 남극 가서 파묻어 버리고 올 거다.
내가 남극에 비밀 기지 세운 외계인을 하나 아는데, 내 말 한마디면 걔가 한 큐에 저승 보내 줄 거야. 들은 바로는 죽은 후에도 괴롭힐 수 있는 모양이던데, 그것까지는 뭐… 고민 좀 해 보고.
머리채를 잡힌 PK가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동안, 악마를 부를 마법진은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의 한심한 꼴을 보며 한숨만 내쉬던 편애가 다시 입을 연다.
【“완성될 거야.”】
“그래. 감색 눈인가 뭔가를 부르는 마법진이 완성되겠지. 악마들은 죄다 알 수 없는 말을 해댔으니까, 이상한 말 하나 지껄이면서 등장하고 그러겠지.”
【“틀려. 우리라고 다 성향이 같은 건 아니야. 신이나 악마로 한데 묶여 불렸지만, 다 다른 객체지. 자색 눈처럼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존재가 있는 반면, 자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하며 유희거리를 찾아 나서는 존재도 있어.”】편애의 목소리가 드물게 진지했다.
나는 잔뜩 뜯어낸 PK의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혹은 자신의 존재에 과하게 도취 되어 살아가거나, 다른 생물을 하찮은 미물 취급하며 눌러 죽이기도 하지.”】
“정신 나갔네.”
【“저 어린 엘프보다도 적게 산 네가 어떻게 이해하겠냐마는, 영원을 사는 존재란 마땅히 그런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영원을 잊게 해 줄 찰나를 찾아 헤매지. 그러다 하나에 도취하면 커다란 문제가 생기곤 하는 거야.”】편애의 차분한 목소리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 목소리는 정말 지독히도 차분해서, 꼭 내가 아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보통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학살을 자행하는 것은 주홍 눈이나 푸른 눈 쪽이지만…….”】
“…….”
【“장담하건대,”】
짙은 남색의 액체가 마법진의 끝자락에 스며들었다.
더럽고 낡아 버려진 누더기 인형처럼 쓰러진 델리키아와 무도회장 안을 가득 채운 남색 마법진.
【“저것은”】
머리카락을 한 뭉텅이 뽑힌 뒤로 얌전히 서 있던 PK가 낌새를 느꼈는지 슬금슬금 붙어 왔다.
나는 슬그머니 내 한쪽 팔을 끌어안는 그를 모른 척해줬다.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 한 점 없어야 할 건물 안인데도 그랬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목이 탔다. 여전히 목에 나이프가 꽂힌 델리키아가 상체를 번쩍 일으키며 미소짓는다.
그와 동시에 아까부터 이어진 기나긴 설명에 편애가 마침표를 찍었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최악의 미치광이다.”】이 세상에 둘도 없는 미치광이. 관절 꺾인 델리키아의 몸에서 눈을 뜬 감색 눈의 악마가 입술을 벙긋거린다.
‘안녕?’
공포 영화 속 인형처럼 뒤틀린 델리키아가 아름다운 얼굴로 웃음 짓는다. 소리 없이 폭소하는 악마의 모습은 내가 본 그 무엇보다도 끔찍했다.
* * *
감색 눈의 악마는 과거나 지금이나 몽상가들이 떠받드는 신이었다.
관측 불가능한 우주를 바라보고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는 생물을 불러오는 존재. 지나치게 이질적이고 뜬구름 잡는 그의 영역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꺼려지게 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초래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다. 미지라는 이름이 붙은 무언가는 이성을 좀먹고 공포를 불러왔다.
때문에 소환술사들은 아주 오랜 시간 박해받아왔다.
한낱 생물이 머나먼 지평을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우주와 차원의 개념이 정립될 때까지. 망원경을 들고 저 하늘에 자리 잡은 천체를 관측할 수 있는 시대가 올 때까지.
최초의 소환술사는, 그러니까 감색 눈의 악마는 건전한 미치광이었다. 그는 별 구름 너머의 거대하고 음산한 존재들이 내뿜는 아우라를 접하고 살았다.
정신이 회까닥 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당연히 다른 악마조차 그와 말 섞기를 꺼렸다. 저 미치광이가 말하는 걸 들어주는 건 온순한 노란 눈이나 먹금 잘하는 자색 눈밖에 없었다.
【“그러다 등장한 게 너야. 자기가 말하는 거 들어주는 사람이 생기니까 얼마나 신났겠어?”】
“난 저거랑 만난 적 없는데. 대충 내가 착하단 소리로 알아들을게. 근데 쟤 다른 계약자 있었을 거 아니야.”
【“감색 눈과 계약한 자들은 보통 별 구름 너머를 보고 싶어 했어. 소환술의 끝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별 구름 너머를 보아야 하니까. 근데 감색 눈이나 되니까 저 정도지, 그 밑의 존재면 보는 순간 미쳐서 날뛰다 죽어.”】
“난 별 구름 너머 같은 거 안 궁금한데.”
【“그래서 네가 멀쩡한 거야. 보통은 별 구름 너머를 보여 달라고 하고 바로 죽으니까.”】저기서 미친 사람처럼 웃고 있는 델리키아도 별 구름 너머를 보기 위해 감색 눈을 소환했을까?
나는 감색 눈이 강탈한 델리키아의 껍데기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그런 거라면 정말 최악의 선택이다.
델리키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감색 눈의 악마는 그 예쁜 얼굴이 망가질 때까지 미치광이처럼 웃었다.
실에 걸린 마리오네트처럼 힘없이 흐느적거리던 그는 목에 꽂힌 나이프를 빼기 위해 팔을 움직였다.
뿌드득.
반쯤 돌아간 오른팔이 완전히 꺾인다. 감색 눈의 악마는 난처한 얼굴로 팔을 흔들더니, 이내 팔꿈치가 안으로 가게 팔을 꺾었다.
부러진 뼈가 살점을 뚫고 나오며 기괴한 광경을 연출했다.
“…공주님 왜 저래?”
내 팔을 꽉 끌어안은 PK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저게 델리키아로 보이겠구나.
나는 이미 죽은 그녀의 명예를 위해 상황 설명을 해 줬다.
“저 마법진으로 불러낸 거 있잖아.”
“응.”
“그게 공주님 몸에 들어갔는데, 아무래도 몸이랑 잘 안 맞나 봐.”
몸을 죄다 꺾어 대는 거로 모자라 꿈틀꿈틀 기어 다닌다. 평소에 무슨 모습으로 지내길래 저 몸이 어색해서 저러는 걸까. 나는 편애를 불러 단호하게 요구했다.
“쟤랑 대화 좀 해 봐.”
【“뭘?”】
“델리키아 몸으로 쇼하지 말고 빨리 모습 바꾸라고 해.”
【“잠시만.”】
편애가 대답하기 무섭게 델리키아가 고개를 위로 들었다.
산발이 된 모습으로 사이보그같이 움직이는 그녀는 꿈에 나올 것처럼 무서웠다.
나만 무서운 건가.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PK를 보았다.
계속 시선이 느껴지던 참이었다. 그러자 옆에서 내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PK가 허리를 굽혀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계약했어? 뭔가 좀 다르네.”
“네 계약자 조지려고 계약했다. 불만 있냐.”
“그런 건 아니고… 자꾸 혼잣말하길래. 계약한 게 아니면 이상하잖아.”
PK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 말을 하는 PK는 배후좌가 죽은 탓인지 양쪽 눈이 다시 라임 색이 되어 있었다.
“마법 알려 준다고 공갈치더니, 그런 것도 잘 아네. 공주님이 알려 줬어?”
“그렇지. 공주님이 나 납치해 가려고 한 거 못 봤어? 별걸 다 알려 주더라고. 그리고 마법은 공갈친 거 아니야. 진짜 알려 주려고 했어.”
PK가 억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주장했다.
물론 나는 시큰둥했다. 거짓이든 아니든 우리의 비즈니스 관계에 따라 적당한 값을 뜯어 갈 것이다. 고생한 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으면 정말로 남극에 파묻어 버릴 거라고.
스르륵.
목에 꽂힌 나이프 하나 빼내려고 별짓을 다 하던 공주님의 시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마법진에 스민 남색 액체가 중앙에 한데 모이더니, 다리 열여덟 개 달린 생물의 형상을 그렸다.
…저게 뭐지.
“저게 무슨 동물이야?”
나는 옷 소매로 눈을 비비며 물었다. 편애나 PK나 아무나 대답하란 식이었다.
“글쎄. 문어… 아닌가?”
대답한 것은 똑같이 혼란에 빠진 PK였다. 나는 PK가 놓친 점을 지적하며 저게 문어같이 일반적인 생물이 아님을 알렸다.
“다리 18개 달린 문어면 진작에 세상에 이런 일이 나왔거든?”
“우리가 제보하면 되겠다. 내 생각엔 우리가 최초일 것 같아.”
“저 문어가 사람 죽이는 거 보고 싶으면 그러던가.”
빨판 있고 다리 여러 개에 유선형 몸통을 가진 무척추동물.
아는 생물 분류에 따르면 두족류에 가장 가깝긴 했다. 단순히 두족류라고 말하기 어렵게 생겨서 그렇지.
다리 18개 달린 거대 짭문어가 꿈틀거리며 진격했다. 목표는 우리가 있는 방향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엉겨 붙는 PK를 밀어내며 편애를 불렀다.
편애!! 악마 어디 갔냐!!
【“왜 불러?”】
“저런 거랑 어떻게 대화를 해? 빨리 인간으로 바꾸라고 해. 내가 문어랑 의사소통을 어떻게 하냐고! 난 인간인데!”
【“아.”】
아? 아아아? 아아아아~? 지금 ‘아’ 소리가 나오냐. 저 기괴한 게 달려들고 있는데.
나는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PK의 뒷덜미를 잡고 무도회장 안을 질주했다. 무도회장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빼꼼히 내민 하람이 광란의 질주 중인 우리를 발견하고 굳는 게 보였다.
쾅-!!
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하람의 면상에 산낙지를 집어던지는 상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