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인생 힘들게 사네.”】
하는 거 없는 악마가 연민을 가득 담아 말했다. 내가 봐도 내 인생이 좀 힘들긴 해. 근데 혀는 그만 차라.
나는 편애를 구박하고 고개를 돌렸다. 델리키아는 그새 머리를 쥐어뜯은 건지 머리가 온통 산발이었다. 알이 굵은 반지를 낀 손가락 사이에 금색 머리카락이 한가득 껴 있다.
녹색 눈은 생물의 정신을 강제로 헤집고 뒤흔드는 악마였다.
델리키아가 그 악마에게 받은 고통이 얼마나 끔찍할지 나는 알 수 없다. 편애가 내 뒤에 있는 이상 평생 가도 알 수 없겠지.
흐리멍텅한 눈의 델리키아가 정신을 차리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책을 찾기 시작했다.
【“책?”】
“델리키아가 PK한테 받았다는 그 책.”
저 차원의 기나긴 역사 동안 소실되지 않고 여기까지 떠밀려 내려온 책. 당시의 신을 부르는 방법이 적힌 그 책.
생명력이든 마나든 정기든 그 책을 통해 악마를 부르는 방법은 반드시 주변에 피해를 몰고 오게 되어 있었다.
델리키아 같이 욕심 많은 사람이라면 막대한 산 제물을 바쳐서 악마를 소환하려고 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쪽 차원이든 저쪽 차원이든 손해지. 차라리 내가 파기하는 게 훨씬 낫다.
나는 무도회장을 눈으로 쭉 훑은 후 델리키아를 향해 다가갔다. 그토록 귀중한 물건이라면 델리키아 본인이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저 공주의 허리춤을 봐.”】
크림색 드레스 위를 두른 보석이 잔뜩 박힌 허리띠. 델리키아의 무너진 상체 뒤로 허리띠 사이에 자리 잡은 무언가가 보였다.
아주 오래된 유물처럼 낡고 빛바랜 책. 넘길 수는 있을까 의심되는 수준의 물건이 델리키아의 허리띠 사이에 걸려 있었다.
【“죽일 거야?”】
“그래야지.”
그냥 가져오기만 했다가는 후환이 두렵다. 언제 정신을 차린 델리키아가 악마를 소환하겠다고 날뛸지 몰랐다.
나는 델리키아에게 바짝 다가가 손에 힘을 줬다. 그녀의 얇은 목을 휙 꺾어 버릴 생각이었다.
【“소환술사의 소환물은 소환술사의 것이지.”】
“어?”
【“주인의 생사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소리야.”】
이차원 백과사전이 새로운 정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는 눈가를 찡그리며 델리키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기이이잉-
아직 정신이 온전치 못한 그녀의 위로 군청색 마법진이 그려진다. 마법진 안에서 쑥 튀어나온 것은 짐승의 발이었다.
【“저거 맞으면 아파. 피해.”】
나는 편애의 말에 따라 거침없이 휘둘러지는 발을 피했다. 뒤로 물러나 마법진을 살펴보니 완성된 마법진에서 이족보행 늑대의 형상이 튀어나왔다. 잔뜩 펌핑된 상체를 가진 그 짐승은 혈관이 시뻘겋게 터진 눈으로 으르렁거렸다.
“■■■ ■■■■ ■”
유감스럽게도 내가 엘프가 아닌 터라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만으로 무슨 소릴 하는지는 알았다.
【“감히 내 주인을 건드리다니. 널 죽일 것이다!”】백과사전이 통역기로 직종을 변경했다. 나는 만능 스마트폰 편애를 향해 감사 인사를 남기고 거침없이 돌진했다. 짐승 또한 무서운 속도로 나를 향해 뛰어왔다.
쾅-!!!!
내 주먹에 얼굴을 처맞은 늑대인간이 벽에 처박혀 꿈틀거렸다. 나는 늑대인간의 거대한 주먹에 맞은 배 위를 문질렀다.
아파서 죽을 정도는 아닌데 아프긴 했다. 두 번 맞았다간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낼 것 같았다.
늑대인간은 말도 하는 주제에 머리에 든 게 없는지 자꾸만 무작정 돌진했다. 나는 그 털을 바짝 태워 주기도 하고, 저 멀리 날려보내 주기도 했다.
“■■■ ■■■■!”
【“나는 이정도로 쓰러지지 않는다!”】
“■■■ ■■■■ ■■!”
【“내가 쓰러지기 전에 네가 먼저 지쳐 쓰러질 것이다! 라는데?”】하지만 짐승은 쓰러지지 않았다. 스스로 장담한 것처럼 끝내주는 몸빵이었다. 불타도 회복하고, 치명상을 입어도 곧 회복했다.
아무래도 저것을 물리칠 방법은 한 번에 모가지를 꺾는 방법밖에 없는 듯했다.
나는 다시 돌진해오는 늑대인간의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비대해진 상체 위에 올라타 다리로 목을 조이니 거침없이 바둥거리는 몸짓이 느껴졌다.
“■■■!!!”
짐승이 2층이 떠나가라 울부짖었다.
나는 그 머리통을 잡고 온 힘을 다해 비틀었다. 두터운 목줄기가 두두둑 비틀리며 목이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뚝 소리를 내며 꺾인 머리가 가볍게 떨어지고, 힘 풀린 몸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어어언~ 하아아아!!!!”
동시에 목청 큰 벚꽃나비의 외침이 무도회장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벚꽃나비의 마스코트 삐약이가 오늘도 그녀의 머리 위에서 포르르 파닥이고 있었다.
“데려왔어요, 이 사태의 주범!!”
주먹을 꽉 쥔 벚꽃나비가 제 뒤에 숨어 있던 인간을 앞으로 끌어냈다.
어느새 머리가 어깨선까지 자란 PK가 꽁지가 나오게 묶은 흰 머리칼을 더듬거리며 웃었다.
“…안녕?”
사람을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든 것치고는 맥 빠지는 인사였다.
나는 잠깐 입술을 물고 눈을 굴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이 꺾인 몬스터의 시체 위에 계속 앉아 있다가는 조만간 저주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 어디 가서 뭐 하고 있었어?”
“나? 여기 지하에 갇혀 있었어.”
“지하에 갇혀 있었는데 몰골이 멀쩡하다? 면도도 했네?”
“여기 엘프들 면도 잘하더라. 수백 년 살아서 그런가? 전문가가 따로 없던데?”
가볍게 농담 거리를 던진 PK가 유하게 웃었다. 나는 늑대인간의 시체를 발로 밀어 치우고 두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델리키아가 주저앉아 있는 옥좌 밑을 바라본 PK가 고개를 낮추고 속삭였다.
“아직 안 죽였네.”
“죽이려고 하는데 저게 튀어나와서.”
나는 쓰러진 늑대인간의 몸뚱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PK는 그 시체를 훑으며 즐거운 목소리로 흥얼거리듯이 말했다.
“저건 값이 제법 나가겠는데. 내가 처리해 줄 테니 조금만 떼 줄래?”
“그건 네 맘대로 하고. 그것보다 저 공주가…….”
그동안 상체를 숙이고 주저앉아 있던 델리키아가 고개를 들었다. 혼란한 그녀의 군청색 눈동자에 죽은 늑대인간과 멀쩡한 PK의 모습이 비친다.
그 눈에 담긴 감정은 안타깝게도 안도감이었다.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사랑만큼 모호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은 없다. 나는 자신이 품은 감정에 탐욕이라는 이름을 붙인 델리키아를 바라보았다.
【“그런 걸 알아차리기엔 너무 어린 나이지.”】
편애가 살짝 내리깐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어려 봤자 인간의 몇 배를 더 살았겠지만, 그래도 어린 것은 어린 것.
모든 생물은 일생에서 시기에 따라 겪는 바가 다르다.
청년이면 청년의 시각을, 중장년이면 중장년의 시각을, 노년이면 노년의 시각을 가지겠지.
그러니 저 공주는 우리 기준에서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한들, 아직 어린 엘프에 불과할 뿐이다.
“재미있는 소리네.”
양쪽 눈에 공주의 모습을 담은 PK가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은 공주가 처음에 본 모습과 닮아 있었다.
“몬스터가 어떻게 사랑을 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PK가 공주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이어지는 말에 비웃음이 잔뜩 담겨 있었다.
“안 그래?”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벚꽃나비가 입을 쩍 벌렸다. 계속 파닥파닥 날뛰던 삐약이가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나는 멀어지는 PK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짧게 중얼거렸다.
“미친 새끼.”
할 말은 그것뿐이었다. 몬스터의 권리를 주장하는 쪽은 아니었지만, 델리키아의 기억을 봐서 그런지 이 말이 절로 나왔다.
그래. 몬스터가 지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저쪽 차원의 주민이라는 사실을 알아도, 그들이 침략자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우리는 우리 차원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을 물리쳐야 했다.
값싼 동정은 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었다. 나는 벚꽃나비의 손을 잡고 PK의 뒤를 조르르 따라갔다. 그녀의 능력은 감시와 도청에 특화되어 있었다.
저번처럼 네정좋의 능력과 합쳐지면 정신을 바짝 차려도 알아차리기 힘들 것 같았다. 역시 극야가 포섭한 인재.
옥좌의 바로 앞, 델리키아가 주저앉아 있는 곳까지 다가간 PK가 그녀의 몸을 일으켰다. 델리키아는 의심도 하지 않고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
아무리 배후 계약을 맺었다 한들, 한쪽의 목숨이 끊기면 그 효력이 다하는 건데. 델리키아는 지나치게 PK를 믿고 있었다.
“…분명 지하에 널 가둬 두라고 명했을 텐데, 어떻게 왔느냐?”
“침입자가 절 여기까지 끌고 왔습니다. 방에 그려진 마법진이 수상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그럼 그 침입자는?”
PK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찾았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벚꽃나비의 특성으로 숨어있는 상황.
“도망간 모양이에요. 이곳엔 저희 둘밖에 없어요.”
옥좌에 몸을 기댄 델리키아가 엉망이 된 무도회장 안을 살폈다. PK는 자연스럽게 델리키아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했다.
“…소환물이 죽었으니 새로운 소환이 필요하겠구나.”
“소환 준비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도 괜찮을까요?”
“얼마 남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도 인간을 수집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악마를 소환해 낼 수 있을 거다. 네 소환도…….”
무심코 비밀 계획을 발설한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PK를 가둬 지정 소환하고 그를 소환물로 만드는 것은 PK한테 말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실행한 계획. PK한테 말했다가는 그가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 소환이요?”
조금 전 편애가 뒤집어 놓은 머릿속 때문에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내가 그녀의 소환물을 죽이고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니.
보통은 다시 찾아올 적을 대비하는 것이 맞다. 아니면 이 공간 어딘가에 적이 숨어있을 상황을 생각하고 움직이던가.
“그래. 너를 내 소환물로 만들어…….”
“만들어?”
“인간의 제약을 벗어난 존재로, 평생을…….”
델리키아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델리키아를 바라보는 PK의 눈빛이 지독히도 싸늘하다.
허리춤을 더듬어 휴대용 나이프를 꺼낸 그가 중얼거리는 그녀의 곁에 바짝 붙었다.
고무줄에 채 묶이지 못한 흰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 위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정말 대단한 계획이네요. 역시 당신다워요.”
“역시 너라면 그렇게 말해 줄 줄-”
“하지만 아직 인간을 벗어날 생각은 없어서요.”
콱-!!
“유감이네요. 불쌍한 공주님.”
PK가 웃는 얼굴 그대로 델리키아의 목에 나이프를 쑤셔 넣었다.
델리키아는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PK를 바라봤다. 웃는 입과 다르게 지독히도 싸늘한 눈빛.
【“가장 탐욕스러운 사람이 가장 선한 말을 하는 법이지.”】뒤통수 맞고 싶지 않으면 언제나 달콤한 말을 지껄이는 사람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간신(諫臣)이 아니라 간신(奸臣)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 인성 왜 저래요?”
벚꽃나비가 내 손을 더욱 꽉 잡으며 중얼거렸다. 쩍 벌어진 입에서 조만간 침이 흐를 것 같았다.
나는 벚꽃나비의 입을 닫아 주고 그들의 모습을 이어서 지켜봤다. 목에 칼이 꽂힌 델리키아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PK는 확인사살 하듯 그녀의 턱을 쥐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안녕.”
델리키아의 비틀거리는 몸이 옥좌 밑으로 떨어진다. 그 순간, 싸늘한 공기가 무도회장 안을 잠식했다.
짙은 남색의 무언가가 천장부터 스멀스멀 흘러내린다. 나는 호들갑을 떠는 벚꽃나비의 손을 내팽개치고 델리키아와 PK를 두 눈에 남았다.
부서진 무도회장의 바닥에 남색 잉크가 투둑 떨어진 것처럼 흔적이 남는다. 천장부터 흘러내린 그것은 바닥의 미세한 결을 따라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냈다.
【“악마다.”】
나와 함께 현장을 지켜보던 편애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드득!! 와장창창!!! 무도회장 바깥에서 살아 있는 것을 씹어 먹는 슬라임이 날뛰는 소리가 났다.
“무슨 눈?”
나는 점점 어두워지는 무도회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미친 것처럼 웃는 공주를 버린 PK가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감색 눈의 악마.”】
바닥이 잠깐 핏빛으로 달아올랐다. 죄 없는 생명을 대량으로 포식한 악마가 지금 이 자리에 강림하려고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