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종종 엘프를 봤다는 사람이 있긴 했는데, 직접 마주치는 건 처음이네요.”
“…….”
“당신의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저녁 햇빛이 내려앉은 하얀 속눈썹이 불그스름한 빛을 띠었다. 델리키아는 인간을 죽이는 대신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엘프뿐만 아니라 대륙에 사는 모든 종족이 나고 자라면서 인간이란 세상에서 가장 악한 종족이라고 배웠다.
간혹 대수림 앞에서 얼쩡거리는 인간들은 죄 없는 엘프를 죽이고 그 시체를 가져갔다. 그들은 악했고, 무해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눈앞에서 웃고 있는 남자는 소문처럼 악해 보이지 않았다. 델리키아는 기이한 감상에 휩싸였다.
은은하게 스미는 붉은 햇빛이 낡은 역사 안을 가득 채운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델리키아는 문득 깨닫고 말았다.
“나의 이름은…….”
아마도, 이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델리키아.”
델리키아의 이름을 들은 남자가 웃었다. 델리키아는 잠시 숨을 멈추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당신에게 걸맞은 아름다운 이름이네요, 델리키아.”
남자가 해사하게 웃으며 몸을 완전히 돌렸다. 다른 인간과 다르게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델리키아는 그 무해하고도 무구한 존재에게 묘한 감정을 느꼈다.
“제가 당신을 에스코트해도 괜찮을까요?”
아직 이름을 붙이기에는 막연한 감정이었다.
델리키아는 천천히 다가오는 남자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가슴 속에서 들끓는 무언가가 정신을 어지럽게 했다.
겁 없는 남자는 그 후에도 친근하게 말을 붙여왔다. 델리키아는 오랜만에 호기심을 느꼈다.
남자는 그녀가 이 건물을 찾을 때마다 그 안에 있었고, 그들의 만남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남자는 델리키아가 엘프 공주인 것을 알게 되었고, 델리키아 또한 남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저는 차원과 차원이 이어진 곳들을 관리하고 있어요.”
“그런 곳은 보통 이곳과 같은 오지일 텐데. 그대는 명줄이 짧겠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제 목숨 귀한 줄은 안답니다. 제가 위험에 처했을 때 바로 달려와 줄 분을 모시고 있죠.”
남자는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웃음을 참았다.
간혹 발견하는 귀중한 물건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 그. 그리고 그가 위험에 빠지면 당장 달려와 줄 수 있다는 그의 주인.
델리키아는 정말로 즐거운 듯이 웃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심사가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공주님. 요새 인간 따위와 어울리고 있지 않으십니까?’
‘로에닌. 그대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어서 연금 탑에 돌아가기나 하게. 그대를 찾는 이들이 계속 대수림에 들어와 조난당하고 있지 않나.’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종족입니다. 공주님과 같이 어린 엘프는…….’
‘시끄러워!!’
가장 성가신 신하는 공주의 호통에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물러갔다. 델리키아는 혼자 화를 삭이다 이곳에 온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드릴 선물이 있어요.”
델리키아의 기분도 모르고 혼자 재잘재잘 떠들던 남자가 아공간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델리키아는 남자가 건넨 책을 쥐고 살펴보았다.
“일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에요. 저는 읽을 수 없으니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가는 게 더 낫겠죠.”
<어린 수도자를 위한 지침서 -신을 부르는 방법->
“어때요? 좀 괜찮은 물건인가요?”
표지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낡은 책이었으나, 델리키아는 눈치 빠르게 이 책의 가치를 알아차렸다. 이 책은 아주 오래전, 악마들이 신이었을 시절에 그들을 부르기 위해 쓰여진 책이었다.
즉, 악마와 계약할 방법이 적혀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델리키아는 책을 쥔 자신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악마와 계약한 자들은 모두 파멸을 맞이했지만, 결국 자신이 바란 바를 이루기는 했다.
악마와 계약하면 말도 안 되게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노력에 따라 왕을 위협할 수준까지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왕을 끌어내고 새로운 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끝은 파멸이어도 상관없다. 델리키아는 지금 당장 종족을 구하고 높은 곳까지 다다를 힘이 필요했다.
“새로운 주인을 모실 생각은 없느냐?”
그래서 델리키아는.
“예?”
“나를 주인으로 모시고 더 큰 힘을 쥐고 싶지는 않으냐는 말이다.”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준 인간의 노고를 치하하기로 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그녀. 그리고 그녀의 종이 될 영광스러운 기회.
영문을 모르는 얼굴의 남자가 라임색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델리키아는 애타는 감정을 숨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좋아요.”
돌아온 것은 무구하고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남자를 부하로 들인 델리키아는 남자에게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물건을 주었다.
노란 눈이 남긴 특급 아이템 중 하나인 반지.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귀한 물건이었으나, 저 연약하고 무해한 인간이 어디 가서 죽지 않기를 바라며 하사했다.
남자는 그 답례로 델리키아의 뜻을 따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 드는 것은 막대한 에너지. 수많은 생명력, 강대한 마나, 넘칠 듯한 정기. 어떤 것이든 좋았다. 그들에게 닿을 만큼의 양이기만 하면 되었다.
가장 좋은 것은 생명력이나, 과거에 하던 것처럼 대규모 인신 공양을 준비하기에는 문제 될 것이 너무 많았다.
델리키아는 특성을 이용해 생명력을 마나로 치환하는 쪽을 택했다. 만약 악마를 소환하지 못하더라도 마나는 남을 테니까.
그러면 문제는 그 막대한 생명력을 어디서 구하냐인데.
“크레이터로… 인간을요?”
“그래. 그대가 끌고 오면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그건 마침 좋은 방법이 있었다. 차원이 융합된 장소에서 인간을 잡아 죽이면 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악한 종족. 그들 종족의 몰락을 가져온 종족이었다.
잠깐 놀란 표정을 짓던 남자는 별다른 대꾸 없이 명령에 착수했다. 델리키아는 고분고분한 그의 모습에 만족감을 느꼈다.
시간이 차츰차츰 흘렀다.
“공주님! 요새 대체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공주님!”
“로에닌 공이 공주님을 말려 달라는 말을 하시더군요. 무슨 일입니까?”
“요즘 자리를 많이 비우시는군요. 슬슬 저도 은퇴할 때가 되었나 봅니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하들이 자꾸 압박을 주었으나, 문제없었다. 어차피 강대한 힘을 얻고 나면 입도 벙긋 못할 자들이다.
“너무 염려치 마세요. 그들도 당신의 뜻을 알면 함부로 말하지 못할 겁니다.”
“…….”
“당신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그들이 알아주면 좋을 텐데.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꿈을 품고 있는지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 여기 있으니까요.”
남자는 델리키아의 곁에서 선한 말을 늘어놓았다. 숄을 어깨에 둘러주는 그 손길이 좋았다. 델리키아는 자신이 느끼는 묘한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렀다. 델리키아는 묘한 감정에 탐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남자는 뭐가 그리 바쁜지 걸음이 점점 뜸해졌다. 잘된 일이었다. 델리키아는 남자를 묶어 두기 위해 지정 소환 마법진을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아마 이 마법진이 완성되면 남자는 온전히 델리키아의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남은 한쪽 눈의 라임색이 군청색이 되겠지. 델리키아는 웃었다.
아마 적당한 핑계를 대어 한 장소에 묶어 두고, 마법식을 완성하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악마를 부르기 위한 준비도 거의 완성되어 있지 않을까.
델리키아는 거친 폭풍에 출렁이는 파도처럼 흔들리는 감정을 끌어안았다.
‘혼자도 좋지만, 가끔은 곁에 사람을 두어 보세요. 언젠가는 반드시 당신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 찾아올 거예요. 공주님을 이해하고 언제나 선한 말을 해 줄 사람이.’
유모가 남긴 말. 델리키아를 이해하는, 언제나 선한 말을 해 줄 사람.
종족의 한계는 소환물이 되는 순간 넘을 수 있다.
아주 약하고 보잘것없는 그 남자는 소환으로 완전해져 온전한 델리키아의 것이 될 것이다. 소지품이 되는 순간, 그는 결국…….
* * *
“안 돼!!”
델리키아의 절규가 고막을 때렸다. 나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절규하는 델리키아를 보았다.
마구 일그러진 얼굴이었으나, 그녀는 변함없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찮은 것이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날뛰는구나.”】편애의 담담한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나는 내가 본 델리키아의 기억을 더듬었다.
델리키아와 계약한 남자는 PK. 델리키아가 인간을 죽이고 그 생명력을 마나로 치환하여 하려던 것은 악마의 소환.
그리고 PK가 자취를 감춘 건, PK를 아끼다 못해 소환물로 만들어 영원히 소유하려던 델리키아의…….
【“수작이지.”】
수작이라고? 나는 소름이 오소소 돋은 뒷덜미를 문질렀다. 저 탐욕스러운 공주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자기가 가장 아끼던 신하가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그래도 PK를 가뒀으니 저쪽도 엿을 먹이기는 했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델리키아를 살폈다. 편애가 정신을 온통 헤집어 기억을 뽑아낸 탓인지 정상인 것 같지는 않았다.
【“저 공주의 기억에 따르면 그 남자를 가둔 곳은 이 건물의 지하야. 찾으러 갈 거야?”】편애가 시큰둥한 투로 말했다. 아니.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쪽은 어차피 벚꽃나비가 알아서 데려올 거다. 벚꽃나비가 아니더라도 하람이 찾으러 다니겠지.
그리고 PK가 델리키아의 소환물이 된다 한들, 그냥 델리키아를 죽이면 그만이다. 노예가 목적이면 그 주인을 죽이면 되는 것이 아닌가?
급한 것은 PK를 찾는 것이 아니다. 델리키아가 악마를 소환하기 전에 그녀를 죽이는 것이다.
탕!!
나는 고막을 때리는 총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벽에 기대선 반서준이 다가오는 그림자를 향해 총을 쏜 참이었다.
델리키아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쟤부터 어떻게 해 보자. 아무리 원거리라 한들 저대로라면 전투에 쓸모도 없다. 랑에게 가서 치료를 받는 게 먼저다.
나는 반서준과 그림자 사이에 끼어들어 그림자를 활활 태웠다. 슬라임처럼 꿈틀거리는 그것은 조각조각 흩어지며 자취를 감추었다.
“아…….”
반서준이 눈앞에 슥 나타난 날 보며 짧게 감탄사를 흘렸다. 나는 반서준의 다친 다리를 살펴보다가 아공간에서 헌터용 응급 키트를 꺼냈다.
“밖에 랑 있어.”
“…….”
“아마 그쪽에도 몬스터 있을 거야. 그거 같이 처리하고 와. 하는 김에 하람이랑 비눗방울도 끌고 오고.”
하람은 상성 차가 굉장하니까 확실히 도움이 될 거다. 비눗방울은… 모르겠네. 걔도 어디든 쓸 데가 있겠지.
나는 키트에서 부목과 붕대를 꺼내 임시로 처치를 해 줬다.
근데 이렇게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어디 부러져 봤어야 제대로 하든가 하지. 교통사고 나도 차가 부서지는 걸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반서준은 언제 왜 왔냐고 따져 물었냐는 듯이 얌전했다.
사뿐하게 눈을 내리깐 얼굴이 우수에 차 있다. 나는 하마터면 잘생겼다는 소리를 내뱉을 뻔했다. 이 급박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었다.
【“넌 껍데기를 왜 그렇게 좋아해?”】
몰라. 이거 자연의 법칙이야.
【“나도 바꿔 줄까?”】
넌 지금이 딱 좋으니까 바꾸지 마. 원래 잘생기면 잘생길수록 친근함이 사라진다고.
편애를 갈구는 건 쉬워도 극야를 갈구는 건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반서준을 일으켜 세워주곤 손을 털었다.
“…당신은?”
“응?”
“이번에도 혼자 남을 생각이야? 저 몬스터를 앞에 두고?”
반서준은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와 같은 기세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
자신의 처지를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다리를 다친 상태에서는 방해만 된다는 걸 아는 거지.
“남아야지. 그럼 나 말고 여기 누가 있다고.”
나는 비틀비틀거리는 델리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혼자 남는 것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다른 누군가를 혼자 남기는 것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겨우 쥐어 짜낸 반서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당신의 그런 모습이 정말 싫어.”
그리고는 곧장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편애가 혀를 찬다. 쯧쯧거리는 소리가 머리 가득 울려서 기분이 나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