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받게 되는 것들이 있다. 종족, 이름, 특성, 그리고 신분.
엘프라는 종족, 그중에서도 고귀하고 특별한 하이엘프. 그리고 그 하이엘프의 정점에 선 공주라는 신분.
델리키아는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났고, 가장 높은 곳에서 귀하게 대접받고 자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났음에도 여전히 왕자였지만, 멋모를 적의 그녀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호오. 이게 네 딸이라고? 제법 예쁘게 생겼구나.”
황금빛 후광을 두른 위대한 존재를 뵙기 전까지.
엘프는 탐욕왕의 아래에 복속된 종족. 아주 먼 옛날에는 엘프에게도 왕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대륙에 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는 오직 일곱뿐.
세상이 혼란스러울 무렵, 그녀의 선조는 골드 드래곤의 신하가 되어 그에게 작위를 받았다. 골드 드래곤은 그들 종족의 우두머리에게 자작 위를 내렸고, 세금과 수납금을 받는 대신 그들 종족을 비호했다.
“아까 그 용이 왕이에요?”
어린 델리키아는 아버지에게 조르르 달려가 물었다. 영원히 왕이 되지 못할 그녀의 아버지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네가 나중에 자라서 섬길 왕이란다.”
깃펜을 쥔 그가 델리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탕을 쥐여 주었다. 사탕을 쥔 델리키아는 제 아버지의 무릎에 매달려 칭얼거렸다.
“그럼 저는 왕이 될 수 없어요?”
엘프 종족의 적법한 후계자. 그들 종족을 이끄는 우두머리의 외동딸인 그녀는 공주였고, 커서는 왕이 되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델, 어디 가서 그런 말하면 안 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를 강하게 나무랐다. 공포에 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살피면서.
“엘프들은 널 공주라고 부를 테지만, 다른 이들은 네가 훗날 자작이 될 때까지 너를 자작 영애라고 부를 거란다. 알겠지? 왕에게 반항할 생각은 하지 말아라. 그게 우리 종족을 파멸시킬 거다.”
어린 델리키아는 드래곤이 얼마나 흉포하고 강대한 종족인지 알지 못했다. 단지 아버지가 엄하게 말하니 고개를 끄덕였을 뿐.
‘높은 곳을 보고 싶어.’
탐욕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강한 힘이다.
가장 높은 곳인 줄 알았던 자리는 가장 높은 곳이 아니었다.
모든 생물과 대화할 수 있는 통역기 정도의 쓸모없는 종족 특성, 권력에는 조금도 관심 없는 신하들과 정령과 소통하며 자연에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는 백성들.
어느 것 하나 눈에 차는 것이 없었다. 델리키아는 고작 자작 따위에서 그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더, 더 높은 곳을 보고 싶었다. 백작, 후작, 공작,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원래 가졌어야 할 그 자리를.
“델리키아! 너희 종족은 보통 정령술을 배우지 않아? 넌 왜 소환술을 배워? 너는 정령술에 더 재능 있잖아!”
“정령들은 소환물과 달리 자연을 해치는 일을 꺼리니까.”
갈취는 힘을 쌓기 좋은 특성이다.
델리키아는 귀족 자제들이 모이는 아카데미에서 정령술이 아닌 소환술을 배웠다. 엘프 종족의 대표인 그녀의 가문이 정령술로 이름난 가문인 것은 온 대륙이 아는 사실.
그러나 델리키아는 정령술을 배우지 않았다.
이는 엘프가 매 끼니마다 고기를 찾는 일과 비슷한 일이라서, 신하들은 끊임없이 델리키아를 쪼아댔다.
“그런 사악한 마법을 배워서 어디 쓰려고 하시는 겁니까! 공주님, 저희는 대대로 왕국의 기후를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령술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입문은 늦어도 핏줄이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설마 의무를 저버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죄다 현실에 안주하는 머저리들뿐이다.
델리키아는 목소리만 큰 신하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작 가문이 명목상 기후 관리직을 맡고 있기는 했으나, 실제로 기후를 관리하는 것은 왕실 직속 정령술사들. 어차피 그녀가 나설 일 따윈 없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문제라고 이리들 소리치는 건지.
“공들의 말은 잘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실무를 맡은 건 아니니 문제없을 것이다. 걱정하지 말라.”
“명분이 중요한 겁니다, 공주님! 안 그래도 영지 근처에 야만인이 가득한 대수림이 있사온데, 왕이 지원을 끊으면 어찌하겠습니까?”
“맞습니다! 생각을 재고하여 주십시오!”
신하들의 원성은 하루하루 높아져 갔다. 하지만 델리키아는 그들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아무리 소리쳐도 엘프는 하이엘프를 거역할 수 없다. 이것은 핏줄에 새겨진 맹약이었다.
하지만 엘프 신하들이면 몰라도 그녀의 왕에게는 후계자로서의 가치를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본래 그들의 쓸모는 뛰어난 정령 마법으로 기후를 다스리고 왕을 기쁘게 하는 것.
정령 마법이라면 왕실 직속 정령술사의 3분의 1이 엘프이니 굳이 배우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 종족이 나라에 충분히 기여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델리키아 본인의 능력을 증명하지 않으면, 왕은 그들 종족의 대표를 마음대로 바꾸어 버릴 것이다.
모름지기 드래곤이란 족속들은 어느 시대나 대단한 폭군인 법이었다.
따라서 아카데미 졸업 후, 델리키아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대수림의 야만족들을 사냥했다.
다른 왕과의 영토 분쟁 지역에는 적격자가 이미 들어서 있다. 적어도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그들은 대대로 분쟁 지역에서 가치를 증명해 왔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것은 동등하거나 유리한 입장일 때나 가능한 것.
델리키아는 자신의 힘을 과신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야만족을 씹어 삼키고 힘을 늘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녀의 아버지가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대수림을 관리할 자가 필요했는데, 나쁘지 않네.”
다시 보게 된 골드 드래곤은 그동안 델리키아가 행한 가치 증명에 제법 만족한 것 같았다. 델리키아는 그렇게 작위를 계승하고 자작이 되었다.
신하들은 여전히 반발했지만, 왕이 인정한 대표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법.
델리키아는 몇몇 신하와 대수림을 정리하며 차근차근 힘을 쌓았다.
분쟁 지역으로 나갈 수 있으면 좋았겠으나, 엘프라는 종족은 본래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이미지였다. 당연히 델리키아에게 파괴와 학살을 기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허무한 시간이 끊임없이 흘렀다. 델리키아는 여전히 위를 갈망하며 몇몇 정적을 처치했다.
처리는 어렵지 않았다. 그들의 왕은 미납자에게 몹시 자비로웠으니 어디 지하 감옥에라도 처넣고 딱 미치기 직전까지 고문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공주님.”
“…….”
“저는 공주님을 믿어요. 공주님은 그 누구보다 저희를 아끼시죠.”
“…….”
“혼자도 좋지만, 가끔은 곁에 사람을 두어 보세요. 언젠가는 반드시 당신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이 찾아올 거예요. 공주님을 이해하고 언제나 선한 말을 해 줄 사람이.”
그 사이 유모가 자연으로 돌아갔다. 위일수록 더욱 고독한 법이라고, 델리키아의 곁에는 이제 아무도 남지 않았다. 델리키아는 귀를 닫고 목표에 더욱 매진하게 되었다.
위로 오르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했다. 세상을 뒤흔들 만한 변화가.
델리키아는 정적을 처치하고 얻은 특급 아이템을 건 계략을 짰다.
노란 눈의 악마가 봉인된 정원은 현재 탐욕왕이 관리하고 있으니 이 아이템을 건 일에 틀림없이 관심을 보일 것이다. 델리키아는 아주 대담하고 위험한 계획을 세웠다.
두 차원이 이어진 건, 그 계획을 실행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왕이 비호하지 않는 생명체들이 가득한 차원. 굳이 위험한 계획을 실행할 필요 없이 손쉽게 힘을 쌓고 작위를 받을 수 있는 방법.
‘이건 기회다.’
큰 기회였다. 게이트를 여는 일에 필요한 마나가 제법 커서 뼈아팠지만, 특성을 이용하면 그것보다 더 많은 마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델리키아는 꿈과 희망에 부풀어 다른 차원을 침략했다. 그리고는 아주 처참하게 깨졌다.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를 건 탓에 가보를 빼앗기고 큰 마나를 잃었다. 소환물이 죽은 탓에 새로운 소환을 위해 많은 재산마저 소모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왕에게 바칠 돈을 마련할 수 없게 되었다.
분노한 드래곤은 그들 종족의 작위와 영지를 빼앗고 그들을 대수림으로 내쫓았다. 영원히 대수림의 야만족들을 처리하는 사냥개가 되는 것. 그게 그들 종족에게 내려진 벌이었다.
델리키아의 백성들은 지옥 같은 환경에서 버티지 못하고 수없이 죽어 나갔다.
델리키아는 자신의 실수로 벌어진 일들을 보며 의구심을 품었다.
‘정말로 내가 틀렸단 말인가?’
그들의 말처럼 정령술을 배우고, 안정적이지만 발전을 기대할 수 없는 직책을 맡아 일하는 삶. 욕망을 추구하지 않고 안정과 평화를 바라보는 삶. 왕에게 복종하고 훗날 자식에게도 복종을 명하는 삶.
그것이 올바른 삶인가?
본능과 욕구를 저버리고 평화에 안주하는 그 삶이?
델리키아는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쉽게 교만하지 않고, 백성에게 인색하지 않으며, 남을 시기하지 않고, 함부로 분노하지 않았다.
나태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으며, 색욕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았다.
다만, 타고나길 탐욕스러웠다.
권좌에 대한 욕망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거웠다. 포기는 왕에게 어울리지 않는 덕목이다.
델리키아는 다시 계획을 세웠다. 쫓겨나면서 가지고 온 것들을 이용해 원래 자리에 복귀할 계획을. 그리고 그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발돋움할 계획을.
시간이 흘렀다. 엘프들은 지옥 같은 숲에 익숙해졌고, 몇몇 재능 있는 자들은 왕국에서 지낼 수 있었다. 기후를 다스리는 정령 마법에는 여전히 실력 있는 엘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른 차원의 거주자인 인간이란 종족은 그들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다.
대륙은 ‘인간’의 등장에 잠시 술렁거렸다. 이 차원에서 ‘인간’이란 종족이 상징하는 바가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주님, 손을.”
그간 델리키아는 새로운 소환물을 얻었다. 자신을 늑대인간이라고 칭한 이 소환물은 썩 만족스럽지 않은 존재였다.
소환물은 주인을 배신하지 못하는 존재. 오롯이 ‘내 것’이라고 칭할 수 있는 개체.
델리키아에게는 조금 더 나은 소환물이 필요했다. 달이 뜨는 밤이면 미친 듯이 날뛰는 짐승보다 이성적이고 말이 통하는 존재가.
왕들의 일방적인 공세는 인간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차원이 이어진 흔적은 계속 남아 있어서, 델리키아는 종종 그들이 ‘크레이터’라고 부르는 장소에 발을 들였다.
독초와 안개가 가득 낀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다른 차원의 건물.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더는 움직이지 않는 시계가 자리한 중앙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종종 찾곤 하던 빛바랜 건물 안에서, 델리키아는 겁 없이 자신에게 말을 붙이는 인간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창틈으로 붉게 타오르는 저녁해가 보였다. 홀의 중앙에서 망가진 시계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가볍게 호선을 그린 남자의 입술이 열리더니 곧장 인사를 건넸다.
세상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델리키아는 주변의 모든 것이 색을 잃고 멀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시야 안에 선명한 라임색이 가득 찼다. 보잘것없는 인간이 지독히도 무해하게 웃었다.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