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무수한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나는 쏟아지는 공격을 피해 움직였다. 바닥에서 괴물을 소환해 내는 엘프부터 검을 들고 돌격하는 엘프까지. 그들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침입자를 맞이했다.
“아, 죄송.”
퍽-!!
달려오던 엘프 하나가 둔기에 맞고 고꾸라졌다. 나는 덤벼드는 괴물을 불꽃으로 지졌다.
무시무시한 철퇴가 다시 한번 허공을 가로질렀다. 또 다른 엘프의 머리가 산산조각 나며 주변으로 파편이 튀었다.
“내 특성이 좀 특이해서요. 죽이는 건 내가 할게요. 괜찮죠?”
질척한 핏방울이 돌바닥을 적시고 흘렀다.
밑은 금색, 위는 검정인 푸딩 머리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퍽!!
피에 젖은 철퇴가 수박 으깨듯이 다른 엘프의 머리통을 뽀갠다. 나는 그녀가 활약할 수 있도록 살짝 뒤로 물러났다.
두 눈을 부릅뜨고 철퇴를 휘두르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겁을 잔뜩 집어먹을 모습이라, 몇몇 엘프들이 몸을 뒤로 물리는 것이 보였다.
【“저기 쟤들 도망간다.”】
편애가 줄행랑치는 엘프들의 존재를 알렸다. 나는 도망치는 엘프들을 불로 지져주며 그녀를 보조했다.
최고의 힐러는 딜러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 푸딩 머리와 피 묻은 철퇴가 인상적인 그녀는 새벽 길드 1공대 소속의 S급이었다. 닉네임은 랑.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 맨날 늦어서 별명이 올랑말랑인 사람이었는데, 얼마 전에 터키 아이스크림 영상이 올라간 뒤로 죽일랑말랑이 되었다.
철퇴로 때려 부수는 전투 방식이 호쾌해서 꾸준히 인기가 많은 헌터다. 헬창이라 개인 별스타그램 팔로워 수가 어마어마하다.
하람과 함께 1공대의 전위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지만, 전투용 특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다친 곳 있어요? 치료해 줄까요?”
마지막 적의 머리를 으깨버린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나는 중앙홀에서 풍기는 탄내에 미간을 좁히며 답했다.
“됐어요. 개인 정비나 하세요.”
“나야 정비할 것도 없죠. 이렇게 많이 처리했는데.”
랑은 수많은 엘프의 시체를 뒤로 한 채로 웃었다.
철퇴를 휘두르는 그녀는 딜러가 아니라 힐러였다. 생물을 죽여 생명을 빼앗고 그것으로 남을 치료하는 사람.
어떻게 보면 델리키아의 갈취와 비슷한 특성이었다. 델리키아는 마나를 축적하는 반면 랑은 그걸 힐로 바꾸는 것뿐.
전투를 위해 비싼 아티팩트를 몸에 둘둘 두른 그녀는 정말 최고의 힐러였다.
최고의 힐러는 원래 딜러인 법이죠. 마리 씨의 닉네임이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핑거킹 님은 언제 왔어요? 나 들어올 때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사람이 많아졌네. 삐약이 타령하는 사람에 핑거킹 님까지 보고.”
삐약이 타령하는 건 벚꽃나비인데. 용케 특성을 풀고 살아 있었네.
랑은 뺨에 튄 피를 슥 닦아내며 말했다. 손에 피가 잔뜩 묻어 있던 터라 닦으면 닦을수록 피가 번지는 게 보였다.
나는 랑을 끌고 중앙홀을 뜨며 그녀가 이곳에서 본 것에 관해 물었다.
“1층 왼쪽에 뭐 있어요?”
“음. 대합실, 역장실, 귀빈실 정도?”
“다른 층으로 가는 계단은 못 봤어요?”
“지하로 가는 계단이 있었죠. 아마 오른쪽으로 가면 위로 가는 계단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왼쪽에 지하로 가는 계단. 오케이. 그럼 일단 오른쪽으로 가서 2층으로 올라가는 게 낫겠군.
나는 머리 깨진 시체들을 뒤로하고 오른쪽으로 발을 옮겼다.
랑이 콧노래를 부르며 뒤를 따랐다. 엘프 십수 명의 머리를 박살 냈다고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명랑한 모습이었다.
오른쪽 대합실에는 위로 가는 계단과 함께 엘프 한 무리가 있었다. 델리키아는 1층에 엘프를 잔뜩 깔아 둬서 2층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모양이었다.
【“쪽수로 밀어붙이네.”】
편애가 흥미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엘프를 보자마자 철퇴를 휘두르는 랑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저 끝에서 활을 든 엘프가 그녀를 향해 화살을 날리는 것이 보인다.
엘프들이 구축해 놓은 대열은 랑의 존재 하나만으로 금세 흩어졌다.
나는 그녀가 터놓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발을 옮겼다.
쾅-!!!
바닥을 박차고 뛰어나가 적진을 휘저었다. 주먹에 맞고 날아간 엘프가 철퇴에 맞고 나가떨어진다.
나는 뒤따라오는 랑을 배려하지 않고 빠르게 파고들었다.
그녀는 그런 배려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듯이 날뛰었다.
어긋나면 맞추고, 부러지면 붙인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온갖 공격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지킬 사람이 없다는 것은 굉장한 어드밴티지다.
신나게 날뛰고 나니 꾸역꾸역 밀려오는 적들의 파도가 한풀 꺾였다. 공격을 적당히 뒤로 흘리며 계단을 오르는 것은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 쉬웠다.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때려눕히고 2층으로 올라서자 색다른 광경이 보인다.
바닥을 기는 것은 델리키아의 수족인 슬라임들.
뒤따라 2층까지 올라온 엘프들은 슬라임의 한 끼 식사가 되었다. 그 공주가 드디어 동족마저 잡아먹는구나.
【“잡아먹는 거야 저번에도 그랬지.”】
편애가 추임새를 넣으며 끼어들었다.
나는 내 앞으로 몰려들었다가 물러나는 검은 것들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복도에는 저것 말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건물의 2층은 역사보다는 성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나는 어쩐지 익숙하게만 느껴지는 복도를 걸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과거에 이 복도를 걸은 적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없어진 엘프의 영지, 그리고 그 영지를 다스리는 주인의 거처.
건물의 2층은 델리키아가 사랑했던 과거를 닮아 있었다.
하긴 이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저지른 일이지.
나는 묘한 감상에 젖은 채로 복도를 달렸다. 이 복도 끝에 존재하는 것은 유리와 수정으로 장식된 무도회장으로 통하는 문이다.
생물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던 그림자 슬라임은 생물로 모자라 이 복도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울 듯이 움직였다. 흐린 핏자국이나 육신의 파편이 슬라임에 의해 사라진다.
【“저런 특성은 보통 주인의 성향에 따라 소환물의 성격이 달라지지.”】잔혹한 광경을 바라본 편애가 혀를 차며 덧붙였다.
주인의 동족을 씹어 삼키는 그림자 슬라임. 생명이라면 닥치는 대로 탐내는 저것들은 모두 델리키아의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었다.
변함없이 탐욕이 넘치는구나, 탐욕왕의 군단장. 나는 복도 끝에 자리한 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쾅-!!!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이 커다란 소음이 온 동네를 울린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수정 샹들리에가 천장에서 반짝거리며 빛을 반사했다.
금과 유리, 그리고 수정으로 장식된 무도회장 끝에 놓인 황금의 옥좌. 나는 무도회장의 이번 초대 손님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여기 왜?”
그의 하늘색 눈이 놀라움을 가득 담았다. 역시 세상일은 내 마음같이 돌아가는 법이 없지.
【“그랬으면 네가 집 밖으로 나왔겠어?”】
좋은 말로 할 때 조용히 해라, 외계인.
나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옥좌에 앉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엘프를 바라보았다.
잃어버린 양산 대신 또 다른 양산을 쥔 공주. 치맛자락이 풍성한 로코코풍 드레스 차림의 그녀는 반가면으로 모습을 감춘 날 보며 매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새로운 손님이 왔구나.”
아름답고 고상한 음악이 무도회장을 가득 채웠다. 여러모로 엉망진창인 반서준이나 트레이닝 복 차림인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곡이었다.
【“센스가 없네.”】
남의 센스 논할 시간에 네 패션 센스부터 어떻게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이쪽 차원에 처음 온 외계인처럼 차려입는 편애를 타박하며 걸음을 옮겼다. 현악기를 중심으로 둔 음울하고 느린 곡조의 교향곡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델리키아를 향해 다가갔다. 델리키아는 웃는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당신이 여긴 왜 온 거야?”
한쪽 다리를 다쳤는지 절뚝거리며 다가온 그가 내 한쪽 팔을 잡고 물었다.
왜 오기는. 와야 하니까 왔지.
나는 반서준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다가갔다. 뒤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마. 당신도 알다시피 그 몬스터는-”
쾅-!!
반서준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공주의 공격을 받았다.
한쪽 다리를 다친 그가 바닥을 굴러 공격을 피하는 게 보였다. 공주는 총기를 드는 반서준을 향해 그림자를 보냈다.
새 손님만 편애하고 기존 손님 취급이 너무한 거 아닌가. 나는 델리키아를 향해 다가가며 생각했다.
그녀는 여전히 묘한 미소를 띤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말이 통하는 적은 말이 통하지 않는 적보다 성가시다고.
몰락한 엘프 종족과 종족을 부흥시키려고 날뛰는 공주, 그리고 공주를 죽이려는 부하 엘프.
거의 K드라마급 막장 아닌가. 다른 몬스터들은 일부를 빼면 이쪽 언어를 못 하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는데, 저 귀쟁이들은 죄다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종족 특성이야. 자연에서 난 모든 생물과 대화가 통하는 것.”】태어날 때부터 외국어 프리라니. 이래서야 억울해서 인간으로 살 수 있겠는가.
나는 델리키아를 향해 다가가다가 그녀가 앉은 옥좌까지 이어지는 계단 밑에 멈춰 섰다. 나를 쭉 주시하고 있던 엘프 공주가 눈매를 가늘게 접어 웃으며 말했다.
“너는 무슨 연유로 어전까지 온 것이냐? 하명한다. 방문 이유를 고하라.”
공주는 섣불리 공격해 오지 않았다. 모든 함정을 뚫고 이 무도회장까지 당도하려면 그에 걸맞은 실력이 있어야 하길 마련.
이곳까지 온 헌터를 무시하지 않는 것은 적에 대한 예우를 갖춰 주는 것과 같다. 하지만 수많은 생명을 집어삼키고도 배가 고파 멈추지 못하는 공주가 이런 태도를 보인다니. 아이러니하다.
나는 공주의 군청색 눈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준비해.”
【“무엇을?”】
“네가 내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보여 봐. 너의 가치를 증명해.”
이 불완전한 계약을 끊을 수 없다면 완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낫겠지.
나는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카드를 살폈다. 편애는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카드였다.
【“눈을 뜨고 상대를 응시해.”】
울려 퍼지던 교향곡이 멈췄다.
【“나는 주시하는 자이자 의식의 뒤를 걷는 자. 기억의 틈새를 파헤치는 무질서의 관찰자.”】속삭이는 목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쿵!! 공주가 내팽개친 옥좌가 옆으로 쓰러졌다.
【“아직 눈뜨지 못한 수도자야.”】
숨통을 조르는 압박감이 어깨를 짓누른다. 나는 반짝이는 유리와 수정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쪽 눈이 희미한 녹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멈춰! 멈추거라!!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냐!!”
옥좌를 버린 공주가 비명을 지르며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나는 그녀의 군청색 눈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이제부터 네가 원한다면, 너 또한 내가 보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계약을 조르는 말이 아니어도 우리가 영혼을 묶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롱거리는 촛불이 픽 꺼지듯 암전한 시야에 아름다운 영지의 모습이 비친다.
“공주님!”
비눗방울의 과거를 보았을 때와 같은 광경. 나는 델리키아의 오래된 기억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