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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98화 (98/175)

제98화

높으신 분들은 보통 엉덩이가 무겁다. 아랫사람들 바쁘게 게이트 다닐 때 위에서 결재만 해 주는 게 그들의 역할이다.

예를 들어 백천 길드장.

이 사람은 길드 운영하느라 게이트 갈 여력이 없다.

일연 길드장? 그쪽도 똑같다. 거긴 길드장 절대 권력이 아니라서 까딱하면 모가지다.

거기서 조금 특이한 게 사헌 길드지.

그쪽 간부진은 다 화룡 아줌마 친위대라서 권력 기반만큼은 아주 튼튼하다. 그래도 직접 게이트에 들어가는 일은 드물더라.

동생이 위험에 빠졌다거나 하는 심각한 일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완전 별개로 치는 것이 낙원 길드의 극야.

이쪽은 길드원 영입도 자기가 하고, 직접 꾸민 작은 흉계마저 직접 움직여 확인했다. 엉덩이가 무겁진 않은데, 게이트에 들어가는 건 또 아니다.

극야는 거의 모든 시간을 서울 바깥에서 보냈다. 천리안 선생님이 보증한 사실이다.

“새벽 2공대가 후발대로 준비하고 있다고 했죠? 하람 님, 막을 수 있겠어요?”

“그 가면 쓰고 계시면 얼마든지요.”

나는 정체를 감추기 위한 반가면을 쓰고 서울역 크레이터 앞에 도착했다. 공간을 열어 준 네정좋이 멀어지는 하람의 뒷모습을 보며 물었다.

“언제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해지신 거예요?”

“저 사람은 닉네임이 이름인데요.”

“저도 닉네임이 이름이에요.”

네정좋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나는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그 소리 하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벚꽃나비가 머리에 호박 탈을 뒤집어썼기 때문이다.

“그건 왜 쓰시는 거예요?”

“신상 보호용이에요. 제 일상은 소중하니까요.”

벚꽃나비는 퍽 비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갑자기 풍기는 할로윈 분위기에 침묵했다.

신상 같은 건 어차피 헌터 협회 본부에 문의하면 금세 털릴 텐데. 굳이 저렇게 고생해야 할 이유가 있나.

단말기를 켜고 있으면서 신상 운운하는 게 신기했다. 아직 경력이 얼마 안 된 사람이라 그런가.

“그럼 전 임무를 마쳤으니까 가 볼게요. 즐겁고 행복한 시간 되세요.”

놀이공원 알바 같은 소리를 한 네정좋이 공간을 열고 사라졌다.

나는 깔끔한 그의 퇴장을 보다가 그가 놓친 것을 깨달았다.

“벚꽃나비 님은 안 가세요? 길드 가입하셨다면서요.”

“전 맡은 임무가 있어서요! 전하 따라서 크레이터 안으로 진입할 거예요!”

시무룩한 표정의 호박 대가리가 씩씩하게 주먹을 쥐었다.

나는 그새 전하 소리를 시작한 벚꽃나비에게 재빨리 경고를 때렸다.

“전하라고 부르지 마세요.”

“이게 원칙이라고 하던걸요? 안에서는 따로 행동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낙원 길드 싫다고 울부짖던 벚꽃나비는 대체 어디로 갔는가.

나는 날 전하라고 부르기 시작한 호박 대가리를 보며 눈가를 찡그렸다. 세뇌당한 거 아니야?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데?

“혹시 낙원 길드에서 협박이나 세뇌 같은 거 당하셨어요?”

“네? 아니요? 제가 길드원 하겠다고 했어요. 아주 합리적인 금액을 제시하시더라고요!”

호박 탈을 쓴 벚꽃나비의 머릿속에 수많은 0이 떠다녔다.

아. 그러니까 끝내주는 돈을 받기로 했구나?

사이비로 유명한 곳이라 대체 어떻게 길드원을 모집하는 건가 궁금했는데, 다 자본주의의 힘이었다 이거지?

중세의 지배자는 왕이었을지 몰라도 현대의 지배자는 돈이다. 나는 쇼핑 리스트를 세우는 벚꽃나비를 대동하고 게이트 근처로 다가갔다. 대기하고 있던 새벽 길드의 2공대와 서포트 팀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하람 님, 해결하셨어요? 빨리 진입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핑거킹 실물 영접에 저마다 입을 쩍 벌렸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는 몇 명을 흘겨보며 물었다.

“이 정도 설명했으면 저 친구들도 이해했겠죠. 가시면 될 것 같아요.”

“하람 님도 따라오시는 거죠?”

“네. 저분도 가시나요?”

하람이 호박 탈을 쓴 벚꽃나비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혼잡한 속내의 바다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누가 새벽 길드 사람들 아니랄까 봐 하나같이 손가락테크닉을 연호하고 있었다.

“네. 따로 행동하신다던데요. 자기가 들어가겠다는데 말릴 이유는 없죠.”

“그래도 이유 정도는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중간에 방해가 될 수 있잖아요.”

하람이 냉랭한 시선으로 벚꽃나비를 흘겼다.

하람의 시선을 받은 벚꽃나비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호박 탈 안쪽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그… 흰 머리에 오드 아이인 남자를 찾으려고요… 그 사람을 전하 앞으로 모시는 게 제 임무라고 했어요!”

“흰 머리에 오드 아이라고요?”

“네! 군청색이랑 라임색 오드 아이!”

그새 자신감을 되찾은 벚꽃나비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흰머리에 군청색이랑 라임색이면 PK인데. 나는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떨군 벚꽃나비를 흘끗거리며 물었다.

“누가 시켰어요?”

“어… 길드장 님이요.”

극야를 떠올린 건지 벚꽃나비의 사고가 잠시 멈췄다.

왜 네정좋까지 시켜서 끌고 간 건지 궁금했는데, 바로 쓸 데가 있었구나.

나는 극야가 마련해 둔 안배가 어디까지 갈지 좀 궁금해졌다.

계속 날 돕는 쪽으로 일을 만들고 있었지만, 이대로 휘둘린다면 결국 그가 바라는 결말을 맞이하겠지.

나는 극야가 바라는 결말이 뭔지 몰랐고 우리가 한 약속이 뭔지도 몰랐다. 정보가 더 필요했다.

【“나 왔어.”】

이런 외계인 백과사전 말고 말이다.

【“또 무슨 소리야?”】

됐어. 넌 집이나 지켜.

【“나 참. 잘해 줘도 뭐라고 하네.”】

편애의 투덜거림은 늘 있는 일이었다.

나는 양옆에 하람과 벚꽃나비를 끼고 크레이터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틈새가 보인다. 나락의 입구 같은 그 틈새는 금방이라도 사람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준비됐죠?”

나는 크레이터의 입구를 바라보며 물었다. 두 사람은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미 각오를 다진 것 같았다.

우연의 신형 단말기 대신 손가락테크닉의 구형 단말기를 켜자 부우웅 소리를 내며 메시지가 밀려 들어왔다. 나는 검은 틈새를 향해 몸을 던졌다.

[크레이터에 입장하셨습니다.]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크레이터 정보 일람]

[서울역 - 3층/지하/지상/안개/독기/식물]

[특이사항: 엘프 조우/전기O]

[종합 랭크: A]

[안정화 최고 기여자: PK]

꽉 그러쥔 손안에 땀이 맺혔다.

* * *

새벽 길드의 반서준은 특이한 인간이었다.

세력을 불린 헌터들이 권력을 쥐었을 때, 그들은 이 안락한 왕좌에 안주하기를 택했다.

부와 명예를 모두 그러쥐고 가장 꼭대기에 선 헌터들은 더 이상 목숨을 걸고 게이트에 가지 않았다. 그들의 길드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헌터들은 수없이 많았고, 그들은 우리나라의 한 축을 이루는 거대 길드의 중심이었다.

굳이 목숨까지 걸면서 나설 이유가 없었다.

길드에 속한 헌터는 길드 차원에서 지원을 받는다.

결국 그들이 택한 건 자신의 발전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투자해 그들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이름 있는 길드가 그런 길을 갔다.

그러나 반서준은 달랐다.

그는 다른 길드장들처럼 길드를 운영했지만, 게이트가 열리면 늘 첫 번째로 달려갔다.

다른 길드는 교만왕의 게이트와 같은 일에 길드원을 먼저 투입했지만, 반서준은 그런 일이 있으면 자신이 먼저 뛰어들었다.

그 인간의 지랄 맞은 성격을 모두가 안다. 그리고 그 인간의 신념 또한 모두가 알았다.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각성자들은 힘을 가졌으니 그 힘을 선한 일에 써야 한다.

세상에는 인간의 도리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건 당연하다. 뭐, 그런 거.

늘어놓고 보니 당연하다의 연속이다. 개인적으로 덧붙일 코멘트는 없다. 남의 신념은 존중해 주자는 쪽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반서준이 손가락테크닉의 팬이니 팬심으로 핑거킹에게 영향을 받아 그 사람을 따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생각했다.

에이, 뭐 그렇게까지?

나는 내가 남의 신념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큰일을 하고 다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나서지 않으면 내 소중한 사람에게까지 영향이 미칠 일이었다. 나는 늘 내 행동을 대의 따위로 포장해 주는 반서준에게 마음 깊이 감사하는 쪽이었다.

【“여긴 탐욕왕의 영토에 자리한 대수림의 입구 부근이야.”】안개가 낀 들판에 검은 꽃이 듬성듬성 자라 있다.

나는 짙게 낀 안개 속에서도 존재감을 뽐내는 대수림을 바라보았다. 무성하게 자란 나무가 숲 안이 보이지 않게 꽉꽉 들어차 있었다.

“벚꽃나비랑 하람은 떨어졌나 보네.”

크레이터는 출발 지점이 몇 군데로 정해져 있다. 하람은 이전에 지도를 봤으니까 알아서 서울역 구역사까지 찾아오겠지.

“대수림이 근처니까 구역사는 남쪽에 있나?”

【“응. 가는 길에 검은 꽃 밟지 않게 조심하고. 그거 독초야.”】편애는 백과사전에 거짓말 판독기를 거쳐 내비게이션으로 진화했다. 나는 편애의 진화가 어디까지 갈지 조금 궁금해졌다. 마지막엔 스마트폰 되는 건가.

안개 낀 들판에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는 길목마다 누군가의 핏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흔적을 보니 흐른 지 얼마 되지 않은 피였다.

“여기 들어온 건 하람을 제외한 새벽 1공대 3인방밖에 없는데.”

【“걔들 피는 아니겠지. 그 공주가 설마 헌터를 끌어들이면서 도시락 준비도 안 했겠어?”】

“인간은 도시락이 아니란다, 이 외계인아.”

나는 편애에게 핀잔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까득.

어디선가 무언가를 갉는 듯한 소리가 났다. 까득거리는 소리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동시에 스산한 안개 들판 어딘가에서 불쾌한 단내가 풍긴다.

검은 꽃을 짓이기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것은 델리키아의 수족인 그림자 슬라임이었다.

내가 있는 곳 바로 앞까지 밀려온 슬라임은 한동안 내 옆을 기웃거리더니, 어느 순간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저것들은 언제나 삼키지 못할 것을 아는 현명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건 현명하다가 아니라 다르게 표현하지 않나?”】

“보통 주제 파악을 잘한다고 하지.”

편애는 말동무 삼기 퍽 좋은 악마였다.

나는 시체와 피로 가득한 들판을 가로질러 익숙한 모양새의 건물 앞에 도착했다.

델리키아의 본진일 것이라고 추측했던 서울역 구역사였다.

【“너 이 건물 구조 알아?”】

“몰라. 근데 딱 봐도 2층 같아 보이는데 단말기에는 3층이라고 뜨네.”

지하 표시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지하를 따로 뚫은 건가. 뭐, 상관없겠지. 중요한 건 반서준을 찾는 거니까.

PK는 극야가 안배해 놓은 벚꽃나비가 찾으러 갔다. 그녀의 특성인 동화는 어느 상황에서나 조용히 돌아다니기 안성맞춤이니 딱 적격자였다.

하람과는 무조건 이 건물에서 만나기로 말을 맞춰 놓았다.

군단장 앞에서 쓸모가 있을까 궁금하기는 한데, 쓸모없어도 문제는 없다. 자기 목숨만 지킬 수 있으면 되지 않겠는가.

나는 열려 있는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코를 찌르는 피 냄새가 났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천장에 촘촘히 박힌 중앙홀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었다.

‘공주께서 중앙홀에 적이 올 테니 대기하라고 했지만, 대체 언제까지?’

‘오늘은 너무 소란스럽네. 지하에 있는 그것이 깨어나면 어쩌지?’

‘2층이 시끄럽군. 침입자가 있는 모양이야. 공주님께서 무사하셔야 할 텐데…….’

삐죽한 귀를 가진 것들이 각을 맞춰 줄지어 서 있었다. 나는 어지럽게 밀려오는 생각 더미에 미간을 찌푸렸다. 활짝 개방된 중앙홀 안이 폭풍전야처럼 고요하다.

【“그냥 지나갈 거야, 아니면 처리할 거야?”】

함정인 것 같으니 그냥 지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생각을 들어보니 델리키아는 2층에 있는 것 같다. 나는 들키지 않기 위해 투박한 돌바닥 위를 살금살금 걸었다.

툭. 끼이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중앙홀 옆 대합실 쪽에서 사람 하나가 튀어나왔다. 눈에 띄는 소음에 엘프 하나가 이쪽을 보자 무수한 시선이 뒤를 따라 꽂혔다.

【“망한 듯.”】

그런 건 말 안 해 줘도 잘 알아, 이 악마야.

나는 이를 빠득 갈며 몸을 뒤로 물렸다. 이윽고 무수한 공격이 내가 있던 자리로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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