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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97화 (97/175)

제97화

크레이터는 외부 차원과 내부 차원이 융합된 형태의 공간이다.

서울역 구역사 위치에 생겼으면 그 안에 서울역 구역사가 있는 거지. 아마 외부 차원에서도 서울역 구역사를 찾아볼 수 있을 거다.

크레이터는 무조건 두 차원이 융합된 부분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 크레이터 안의 환경이 외부 차원 베이스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 핵심은 내부 차원의 무언가가 된다.

서울역 크레이터 같은 경우에는 외부 차원의 환경에 내부 차원의 건물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이 크레이터의 핵심은 바로 서울역 구역사라는 소리.

따라서 지도의 중심에도 서울역 구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람 님, 여기 보세요.”

나는 하람을 불러 지도를 보게 한 후 구역사를 콕 찍어 가리켰다. 여기가 아마 델리키아의 거점일 확률이 높았다.

“PK는 지금 서울역 크레이터 안에 있어요. 아마 갇혀 있을 확률이 높아요. 한동안 계속 같은 자리에 있었다고 들었거든요.”

같은 자리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이미지 관리가 필요하니 갇힌 거라고 해 두자.

나는 최선을 다해 입을 털었다.

“저희는 두 가지 목표를 세울 거예요. 첫 번째는 PK와 만나 사건의 전말을 듣는 거고, 두 번째는 델리키아와 마주치지 않고 크레이터에서 빠져나오기.”

“첫 번째는 그렇다 해도 두 번째는 왜인가요?”

“급하게 들어가는 건데 바로 군단장을 상대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준비한 후에 상대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손목 안쪽에 새겨진 용가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풀파워 군단장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라 얼마나 여유로울지 잘 모르겠다.

그녀는 이른바 전투력 측정기인 셈이다.

쉽게 이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처음부터 질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투에 앞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건 좋지 않은 행위였다. 괜히 주눅 들면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건 PK를 찾는 거니까요.”

다른 사람과 함께 행동하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델리키아와 싸우러 가는 건 나 하나만으로 족했다.

그리고 잘하면 그녀와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고 일을 끝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PK가 군단장 레이드를 해야겠지, 하고 말한 이상 그럴 확률은 극히 낮겠지만.

“일단 간단한 목표만 세우는 거죠. 상황에 따라서 변경은 자유롭게 합시다.”

PK만 구해 오고 하람을 맡기자. 델리키아를 상대해야 하면 나 혼자 들어가고.

나는 하람 몰래 따로 계획을 세웠다. 편애가 자기도 있다고 어필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델리키아의 숨겨진 사정을 읽는 능력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저번에도 비눗방울의 숨겨진 사정을 당사자 허락도 받지 않고 까발리지 않았나.

【“그건 어쩔 수 없었어. 걔가 그 공간에 갇혀 있었다니까?”】변명 안 받습니다.

【“변명 아니야.”】

그럼 말대꾸 안 받습니다.

나는 지도 위에 네임펜으로 이동 방향을 표시했다.

이 지도를 만들었다는 치정 드라마의 주인공이 위험물 표시를 잘해 둔 덕에 금방 동선을 짤 수 있었다.

“이대로 움직이죠. 한 번 보실래요?”

나는 네임펜 뒤에 꽂아둔 뚜껑을 뽑으며 완성된 지도를 건넸다. 종이를 받아 든 하람이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때였다.

쿠웅-!!!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울린 것은.

종이를 쥔 하람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도 재빨리 휴대폰 화면을 켜고 검색창을 열었다. 그 시간에도 잇달아 굉음이 울리고 있었다.

【“올 게 왔군.”】

편애가 심드렁한 투로 중얼거렸다. 창가에 다가가 선 하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연 님, 큰일 난 것 같아요.”

“어디에 문제가 생긴 거죠? 이번에도 크레이터?”

막 터진 일인 탓에 아직 검색창과 커뮤니티는 잠잠했다.

하지만 곧 빠른 속도로 이번 일에 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겠지.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둔 단말기를 꺼내 연락처를 뒤졌다. 수신자는 S1팀의 날강도였다.

크레이터 또 터졌어?◀[손가락테크닉]

이번엔 어디야?◀[손가락테크닉]

계속 터지고 있는데 이거 괜찮냐?◀[손가락테크닉]

이미 아수라장이 된 S1팀 사무실이 눈에 선했다.

계속해서 창밖을 바라보던 하람이 살짝 굳은 얼굴로 잠깐의 평화에 마침표를 찍었다.

“방금 서울역 크레이터가 폭발한 것 같아요.”

순식간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나는 망설임 없이 장식장을 발로 차서 깨고 델리키아의 양산을 챙겼다.

그날 새벽 길드 최상층에는 양산 도둑이 들었다.

* * *

“서울역 크레이터가 터졌다고.”

지금까지 크레이터를 터뜨리는 건 PK가 일부러 저지른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크레이터를 터뜨리면 대중의 시선을 끌기도 좋고, S1팀을 묶어 놓기도 좋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동시에 터지면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데.

이건 PK의 소행이라기보단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에 가까운 것 같았다.

【“아니면 그 공주가 일부러 벌인 일이거나.”】

그래. 그 공주가 일부러 벌인 일이거나.

대체 왜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시간은 지났다.

나는 장식장을 박살 내고 양산을 챙긴 채로 창문을 깨려다가 여기가 고층 빌딩 최상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하 씨.”

“네. 저 여기 있어요.”

네정좋은 이름을 부르자 언제 떠났었냐는 듯이 스르륵 나타났다.

공간을 열고 나타난 게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USB와 지도를 챙겼다.

나는 얼빠진 하람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곤 허공에서 사라지는 물건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사라지는 모양새가 어디선가 본 느낌이었다. 저번에 벚꽃나비의 병아리가 사라지는 게 저것과 비슷했던 것 같은데.

“주하 씨.”

“네에.”

“여기 네 명 있죠?”

눈을 두어 번 깜빡인 네정좋이 ‘우와….’ 따위의 생각을 하며 날 바라보았다.

역시나. 나는 방금 물건이 사라졌던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헉, 잘못했어요!”

오늘도 삐약이를 머리에 얹은 벚꽃나비가 나타나 고개를 숙이고 덜덜 떨었다.

‘염탐했다고 죽이는 거 아니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는 거 보니 그녀의 특성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편애의 패시브가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와, 쓸모없어.

“추궁은 나중에 하고, 갑시다.”

쓸모없다고 욕을 먹은 편애가 다 이유가 있다고 쩔쩔매다 구석에 처박혔다.

네정좋은 다른 곳으로 통하는 공간을 열어 벚꽃나비를 먼저 들여보냈다.

“전 일단 근처에서 지켜볼 생각인데, 하람 님은 어떻게 하실래요?”

나는 어디로든 문을 앞에 두고 하람의 의사를 물었다.

하람은 이대로 남는 것과 나를 따라가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열심히 고민하다가, 결국 나를 따라가는 것을 택했다.

“따라갈게요.”

‘길드장이 여기 꼴을 보면 귀찮아질 것 같지.’ 와, 속마음이 정말 대단하시네요.

나는 소리 없는 감탄을 흘리며 하람에게 손짓했다. 하람은 망설임도 없이 네정좋이 열어 둔 문 너머로 향했다.

낙원 길드는 길드장에 대한 믿음이 정신 나가게 끈끈하던데, 새벽 길드 대체 무엇? 반서준 대체 뭐 하는 사람인 것?

나는 반서준에 대한 의구심을 품으며 공간을 넘었다. 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안녕하세요, 전하.”

“하이.”

러브리스와 편애였다. 아니, 서울역 크레이터로 가자니까 왜 낙원 길드로 온 거야?

“저희는 지금 서울역 크레이터로 가야 하는데요. 왜 여기로 오신 건지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네정좋은 날 상석에 앉히고 공간을 닫았다.

근처에 앉은 러브리스가 반사적으로 카프리 썬을 내밀었다. 오렌지 망고 맛이었다.

“크레이터가 계속 터진다고 해서요. 다 터지고 난 뒤에 들어가시게 하라는 명을 받았어요.”

너희 길드장은 대체 어디까지 예견하실 생각이시래?

나는 빨대를 문 채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졸지에 낙원 길드 간부진한테 둘러싸이게 된 하람 또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은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잠시 쉬었다 가세요.”

다른 음료수 팩을 손에 쥔 러브리스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순식간에 서리가 끼는 팩 겉면을 보며 생각했다. 어디서든 차가운 음료수를 마실 수 있는 능력이라니. 탐난다.

쿠구구궁-!!

끊임없이 무언가가 폭발하고 땅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땅이 흔들리는 일도 있었다. 중간중간 인터넷이 끊기고, 전기가 나갔다.

하지만 낙원 길드 안은 놀라울 만큼 평화로웠다. 아무도 소리 지르지 않았고, 아무도 바깥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 공간만 세상에서 괴리된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혼란스러운 바깥을 휴대폰으로 접했다.

엄마, 괜찮아? ◀

안 다쳤어? ◀

답장은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로 왔다. 중간에 기지국에 문제가 생겨서 통화가 끊겼지만, 일단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우리 집 근처에는 크레이터가 없다. 기막힌 위치 선정이었다.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은 무려 다섯 시간 동안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터진 크레이터는 총 열다섯 개. 한국에 존재하는 크레이터의 4분의 3이다.

그동안은 S1팀이 터진 크레이터를 모두 전담했지만, 이번에는 터진 크레이터가 15개나 되는데 그게 가능하겠는가.

가장 폭발 규모가 큰 크레이터는 S1팀이 맡고, 다른 크레이터는 근처 길드들의 손을 빌리게 되었다.

지금까지 터진 모든 크레이터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한 적은 없었지만, 혹시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이번 건 동시에 터졌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기도 하고.

“하람 님, 전화 오는데요?”

“안 받아도 돼요.”

표정에 금이 간 걸 보니 길드장 전화인 모양이다.

나는 자기 직장 상사 전화를 쿨하게 씹어 버리는 인간을 보며 속으로 눈물지었다.

이러면 마리 씨일 때도 그냥 참지 말 걸 그랬어. 뭐, 저기서 잘려도 갈 곳 많다 이거겠지.

속보는 끊임없이 떴다. 각 길드가 어느 크레이터를 맡았는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크레이터를 맡기로 한 길드 목록은 떴다. 역시 오대 길드는 빠짐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낙원 길드도 크레이터 하나 맡았다는데 거기 안 가세요?”

통신이 발달하며 생긴 문제가 대화 단절이라더니, 이렇게까지 말이 없을 정도였나. 나는 제각기 다른 휴대폰을 들고 자기 할 일만 하는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그건 행색 맞추기일 뿐이에요. 저희는 들어가지 않아요.”

대답은 착실한 러브리스가 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왜요? 안 하면 이미지 관리나 길드 운영 같은 것에 문제가 생기지 않나요?”

“저희는 이미지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길드 운영이라면 길드장 님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저희는 하신 말씀에 따를 뿐이죠.”

러브리스는 겉과 속이 동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극야를 존경하고 따르는 그녀의 생각을 읽곤 할 말을 잃었다.

저긴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모르는 데도 저런 면모를 볼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데, 알면 더 심해지겠지. 그냥 넘기자.

“그리고 이번 폭발은 시선 돌리기 용이 아닙니다. 함정이에요.”

“함정이요?”

“네. 한때 인천에 열렸던 게이트와 같은 것이죠.”

말을 마친 러브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줄곧 휴대폰 자판을 두들기던 하람이 미간을 팍 좁히고 화면에 코를 박았다.

“슬슬 가실 때가 된 것 같아요.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러브리스는 편애를 끌고 방을 나갔다. 편애는 겉으로는 입도 벙긋 안 하더니 나한테만 러브리스가 사이보그랑 다를 게 뭐냐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내 뇌에서 나가, 이 악마 자식아.

“우연 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한동안 휴대폰에 코를 처박고 있던 하람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나는 구석에서 ‘내 인생….’ 따위의 한탄을 하는 벚꽃나비를 바라보다 시선을 옮겼다.

“지금 몇몇 길드가 크레이터 조사를 맡았다는 것 아시죠?”

“네. 방금 봤어요.”

“저희 길드가 서울역 크레이터를 맡은 것 같아요.”

“예?”

거기 델리키아 본진(추정)인데. 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로 물었다.

“언제 들어간대요? 저희가 선수 치죠. 하람 님은 들어가기 전에 그쪽 길드장을 막아 주세요. 제가 들어갔다고 둘러대시면 될 거예요.”

“아, 그게 안 되는 게…….”

하람이 휴대폰 화면을 두드리며 뜸을 들였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하람의 말을 기다렸다.

“벌써 진입한 모양이에요.”

[우리 지금 들어갈 거야. 조금 이따 2공대가 들어오기로 했으니까 그때 같이 와.]

하람이 보여 준 휴대폰 화면에는 비눗방울과 나눈 대화가 적혀 있었다.

완전… 망했는데?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나라 대표가 사이비 교주가 되고 말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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