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안녕하세요.”
오늘도 인사성이 참 밝은 네정좋이 공간을 열고 폴짝 뛰어내렸다.
하람은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부르셔서 왔어요.”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모은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왜 이런 터무니없는 무리수를. 닉네임은 부르라고 있는 건데, 왜 굳이 이름을 불러 달라고….
【“너도 네 닉네임 싫어하잖아. 부르면 죽인다고 협박하면서.”】타이밍 좋게 편애의 딴지가 들어왔다. 나는 단박에 공감했다.
하긴 네가정말좋아도 무난한 닉네임은 아니지. 쟤도 닉네임을 싫어할 수도 있겠다.
세상에는 자기 닉네임을 싫어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왜 닉네임 변경을 못 하게 하는 건지.
나는 비통함을 삼키고 네가정말좋아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주하 씨.”
“주하는 어떠세요.”
“저희가 아직 그렇게 친하게 이름 부를 사이는 아닌 것 같아요.”
내 단호한 거절에 네정좋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새벽 길드에서 제라늄을 차며 얻은 경험이 이렇게 또 도움이 된다. 젊었을 때 경험을 많이 쌓아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나는 넋 나간 하람의 팔을 툭툭 쳐 정신 차리게 했다. 네정좋은 여전히 헛소리를 지껄이는 중이었다.
“앞으로 제 닉네임을 부르실 때는 사랑을 담아서 불러 주세요.”
“예. 네정좋 씨.”
“줄이지 마시고요.”
네정좋은 불만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호소를 시큰둥하게 넘겼다.
네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지. 네가 정말 좋아! 하고 성의있게 불러 달라는 거 아니야.
하지만 제가 거짓말을 하면 입에 가시가 돋아서요.
아무리 닉네임이라도 저 인간한테 좋다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저 그쪽 별로 안 좋아해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타령을 하던 레터의 말이 아직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 인간들은 아직 인류에게 너무 이르지 않나 싶다. 물론 그들 자체가 인류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는데요.”
“네.”
“혹시 협회-”
아니다. 나는 네정좋에게 우리 둘을 협회로 데려다줄 수 있겠냐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조금 생각해 봤는데 협회보다는 다른 장소가 더 좋을 것 같았다. 우리 셋이 함께 있는 모습을 누가 봤다간 소문이 일파만파 퍼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말고 새벽 길드로 갈 수 있을까요.”
“기왕이면 천리안이 안 닿는 장소로요?”
“그렇죠.”
아까 남산 위에 있던 건 등산 동호회 전체였지.
별거 아닌 게이트에 그들 전체가 들어갈 리는 없다. 그러니 우리는 가을클래식이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을 상황도 고려해야 했다.
“따라오세요.”
네정좋이 공간을 열어 문을 만들었다. 옆에 찰싹 따라붙은 하람이 작게 소곤거렸다.
“저분은 왜 부르신 거예요? 단순하게 이동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고.”
저 생각 없는 사람이 정말로 날 엿 먹이려고 그런 짓을 했는지, 그리고 부르면 정말로 오는지 궁금해서 불렀다.
살짝 알쏭달쏭하긴 했는데 천리안 소릴 하는 거 보니 일부러 그런 게 확실하구나. 머리채 스택 하나 적립이다.
반면에 부르면 정말로 오는 점은 나중에 급할 때 써먹기 좋을 것 같았다. 머리털 빠지게 화나게 해도 저 사람 특성이 유용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극야도 쟤를 데리고 있는 거잖아.
무보수 노동하겠다는 거 안 써먹는 것도 손해다. 기왕 머리 아픈 거 이용이라도 하자. 나는 생각을 마치고 네정좋의 뒤를 따라 공간을 넘었다.
【“여긴…….”】
편애가 살짝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쑥 빼고 주변을 살폈다.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공간. 방 안에는 바깥 날씨만큼 싸늘한 공기가 흘렀다.
뒤이어 들어온 하람이 범상치 않은 공간을 보며 짧게 감탄사를 흘렸다.
네정좋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특성 사용하는 걸 못 봤는데. 뭔가 찝찝하다.
“아시는 곳이에요?”
나는 창에 두껍게 쳐진 암막 커튼을 걷어 내며 물었다. 하람은 서류가 차곡차곡 쌓인 책상 위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활짝 연 커튼 사이로 밝은 햇살이 들어온다. 고층인지 유리창 너머로 서울 시내가 훤히 보였다.
“아는 곳이에요. 여긴 새벽 길드 건물의 최상층이거든요.”
잘 관리하는 곳인지 눈에 띄는 먼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람이 책상 위의 서류 한 뭉텅이를 쥐고 흔들었다. 나는 하람에게 다가가 그가 내미는 서류를 보았다.
[영화 사업 진척 보고서]
[건물 매매 계약서]
[박물관 인력 관리 보고서]
받아 든 서류에는 손가락테크닉에 관련해 새벽이 벌인 각종 만행이 펼쳐져 있었다.
그 빌어먹을 영화랑 박물관 보고서가 왜 여기 있냐.
나는 내 인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것들에 관한 보고서를 손으로 꽉 쥐었다.
아, 갑자기 스트레스 받는다. 이러다 뒤로 넘어가면 그건 다 이 보고서 탓이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 길드에서 손가락테크닉 홍보를 엄청 열심히 하고 있거든요. 정확히는 길드장 님이 하는 거지만.”
컴퓨터를 켠 하람이 USB를 가져갔다. 이 장소에 자주 와 본 것처럼 익숙한 행동이었다.
여기 보안 괜찮은 건가. 타 길드 사람이 드나드는데?
“아무리 영웅적인 일을 해 봤자 사람들이 알지 못하면 의미가 없어요. 기록이야 남는다지만, 그걸 열람할 수 있는 건 헌터들뿐이고. 결국 대중에게 우리가 한 일을 알리려면 따로 조치를 취해야 해요.”
하람은 컴퓨터에 걸린 패스워드를 익숙하게 풀었다.
여기 보안 정말 괜찮은 건가? 하람이 너무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데?
나는 하람의 곁에 가서 서는 대신 방안을 구경했다. 커다란 장식장 안에 몇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우연 님은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가져오기 좋은 주제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하람이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를 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대답했다.
“글쎄요? 유명인의 가십거리?”
“맞아요. <새벽 길드의 비눗방울! 일반인과 열애 중!> 하는 기사가 뜨면 궁금해서라도 보게 되잖아요.”
그건 말도 안 되는 기사 아닌가. 비눗방울이 방구석에서 나갈 리가 없는데.
하지만 방구석에서 나갈 리 없는 사람의 열애 기사라니. 흥미롭긴 하다. 분명히 궁금해서라도 펼쳐 보게 될 거다.
“저희 길드장이 그런 일을 벌이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에요. 아무래도 2위의 영향은 클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연 님은 가끔 손가락테크닉으로 활동하시지만, 그 활동 내역을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잖아요. 그럼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세계 1위는 대체 뭐 하는 거야?’”
방 한쪽에 있는 프린터기가 윙윙 소리를 냈다. 나는 장식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람의 말이 틀리지 않기는 하지.
손가락테크닉 영웅담은 반서준의 미친 홍보와 손가락테크닉의 행적을 스토킹 수준으로 파헤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퍼진다.
왜, 그런 유언비어도 있었지. 헌터 협회에서 수집한 외부 차원 정보들은 모두 손가락테크닉이 굴러서 가져온 거라고.
그거 유언비어가 아니라 사실이다.
나는 보통 협회 쪽에서 들어오는 의뢰를 수행했으니까.
손가락테크닉은 어떤 방식이든 자신의 행적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것도 좀 웃기지 않나? ‘나 이 던전 깼다? 다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지구 평화를 지키고 있다는 걸 알아줘!’ 하고 자체 홍보하는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그렇게 열심히 홍보하고 있는데도 1위 뭐 하냐고 난리인 세상이다.
반서준의 열렬한 팬클럽 활동이 끔찍하게 싫었는데, 이렇게 들어 보니 또 납득할 만했다.
“저희가 무작정 홍보만 하는 것 같아도 적당히 정보를 차단하고 있어요. 저희 길드장이랑 무슨 일이 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미워하지는 마시라고요. 서포트하겠다고 저렇게 뒤에서 애를 쓰잖아요.”
프린터기가 뱉어 낸 종이를 가져온 하람이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하람이 내민 종이를 받아 들며 생각했다. 그것도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구나. 난 어쩌면 팔랑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람이 반서준을 실드 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반서준 갸륵한 건 갸륵한 거였고, 하람이 그걸 실드 치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나는 아직 따듯한 종이를 팔랑팔랑 흔들며 물었다.
“그건 왜 말씀해 주세요?”
대답은 아주 빠르게 나왔다.
“저희 길드장 님한테 잘해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왜요?”
“그럼 히스테리가 줄어들 것 같아서요.”
웃는 얼굴이 아주 상큼하다.
나는 하람의 상큼한 얼굴 뒤에서 부하 직원의 비애를 느꼈다.
나도 저 마음 알지. 마리 씨일 때 하람이 느끼게 해 줬다. 상사 머리통 깨는 방법을 검색하던 나날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건 어렵겠네요. 재수 없게 구는 건 다 저쪽이 먼저 시작했거든요. 열렬하게 팬클럽 활동하실 땐 언제고 직접 볼 땐 대체 왜 그러신담.”
손가락테크닉으로 마주칠 때마다 까탈스럽게 굴었지.
‘내가 당신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야.’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를 터냐.’
‘인명 사고가 났으니까. 몬스터를 한 구역에 몰아넣고 죽이는 건 효율적이긴 하지만, 그 구역의 사람들을 포기하는 거야. 차근차근 한 마리씩 처리했다면 지금보다 오래 걸렸겠지만, 모두를 구할 수 있었겠지.’
분노한 얼굴의 반서준이 씩씩대며 말했다. 나는 일렁이는 게이트 입구를 바라보며 심드렁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럼 게이트가 닫히는 시간이 두 배쯤 늘어났겠지. 내일 겨우 나왔겠네. 부상자는 생각 안 하나 봐?’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건 말이 되고? 웨이브 확산 전에만 마무리하면 됐잖아. 힘을 가지고도 올바른 곳에 쓰지 않으면 그건 무슨 의미가 있지?’
‘의미가 있고 없고를 왜 네가 판단해? 네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불만 있으면 다음부터 네가 다 하던지. 난 구석에서 숨만 쉴 테니까.’
사람 안 구한 것도 아닌데 피곤하게 하네.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게이트 입구로 다가갔다. 반서준은 게이트를 나가는 내 뒤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분명, 처음에는-!!’
중간에 게이트를 나와서 끝까지 못 듣긴 했는데, 별생각 없었다. 그런 일이 있었지. 나랑 안 맞는 인간이었다.
나는 예쁘게 뽑혀 나온 지도를 펼치고 펜을 찾았다. 책상 쪽으로 가서 네임펜을 찾은 하람이 이쪽을 향해 가볍게 던졌다.
“그건 제가 따로 추측한 이유가 있어요.”
“뭔데요?”
“저희 길드장은 우연 님이 아니라 손가락테크닉을 좋아하는 거 아닐까요?”
“예?”
손가락테크닉이 난데 그게 뭔 소리야. 나는 네임펜 뚜껑을 뽑아 뒤에 꽂으며 반문했다.
하람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우연 님이 손가락테크닉이긴 하지만, 모두가 아는 손가락테크닉의 모습과 우연 님의 모습은 거리가 있잖아요.”
“그거야 그렇죠. 새벽 쪽에서 이미지 마케팅 엄청나게 했으니까.”
지구를 구한 불세출의 영웅 손가락테크닉. 아무도 그 정체를 모르고 밝힐 생각조차 없다.
지구가 위험에 처할 때면 갑자기 나타나 사건을 해결하고 스르륵 사라지는 영웅 중의 영웅!
길드 소속 헌터들처럼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지구 평화만을 바라는 다크 히어로!
손에서 불꽃 빔 쏘는 21세기 미스터리! 대충 그런 거 되시겠다.
“지구를 구한 영웅의 이미지는 좋아하지만, 게으른 우연 님은 싫어하는? 뭐 그런 거 아닐까요?”
하람이 방긋 웃으며 면전에서 욕을 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방구석에 있는 장식장을 바라보았다.
장식장 가장 아랫단에 곱게 놓여 있는 델리키아의 양산.
내가 과거에 각성자가 아니었던 그에게 준 물건.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변함없는 양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날 싫어한다고? 뭐, 세상 살다 보면 날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세상에 어떻게 좋은 것만 있겠는가. 아이스크림 랜덤으로 다섯 개 사와도 하나 정도는 싫은 맛이 끼어 있는 법인데.
근데 하람의 추측이 맞을지는 잘 모르겠다. 반응을 생각해 봤을 땐 우연희 대신 손가락테크닉을 싫어해야 할 것 같은데.
반가면을 쓴 손가락테크닉과의 첫 만남은 최악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연희와의 첫 만남은 그게 아니란 말이지.
하람의 추측은 뭔가 어긋난 곳이 있었다. 이건 반서준한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문제지. 근데,
“예, 예. 그런 거면 어쩔 수 없죠. 싫어하든 말든 상관없음.”
안 구해 줘서 적개심을 가진 거면 모를까 목숨 구해 준 사람을 싫어할 이유가 있나?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손을 움직였다. 지금 반서준이 중요하냐.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물론 반서준도 중요하다.
걔 없으면 우리나라 얼굴마담은 극야가 된다. 그럼 세계적으로 얼마나 쪽팔리겠어.
나는 네임펜으로 크레이터의 입구 쪽에 ‘출발’이라고 적어 놓고 크레이터의 가장 중앙, 네모난 건물 위에 별을 그렸다.
서울역 크레이터가 자리 잡은 곳은 지금의 서울역 바로 옆.
과거에 경성역으로 쓰인 서울역 구역사가 위치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