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하람 님 어머니가 사헌 길드에 계신 줄은 몰랐어요.”
“…….”
“진짜로요. 제가 하람 님 스토커도 아니고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요. 그냥 지도 받으러 갔더니 그런 기막힌 일이 생겼을 뿐이지.”
나는 혀에 기름칠을 해 가며 하람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하람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저는 제 인생 살기도 바빠서 남의 가정사에 쥐톨만 한 관심도 없답니다.”
“…….”
“하람 님 가족 관계 알아서 뭐 해요. 제가 하람 님이랑 결혼할 것도 아니고. 레나 님이랑 친척인 것도 몰랐다니까요?”
그래서 재빨리 구해 주기까지 했는데 왜 이러고 있어야 하나. 인간답게 사는 건 정말 힘든 일인 것 같았다.
【“그럼 외계인이랑 계약한 인간답게 힘으로 찍어 누르든가.”】아니. 난 순수한 인간이니까 대화로 해결하겠다.
인간을 편애한다고 외치면서 외계인 같이 구는 건 곤란하지.
그리고 쟤가 지금 머리 굴리고 있는 거 보면 그렇게 삐진 것 같지도 않았다.
‘범인이 크레이터 어디에 있을지 모르니까 그동안의 크레이터 출입 기록을 살펴봐야겠지. 그건 협회에 문의해야 하는데, 정석으로 가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저 사람한테 부탁하는 게-’
딴생각하느라 대답이 없을 뿐이지.
【“정말? 안 삐졌다고 확신해? 네가 듣는 건 겉핥기식이잖아. 심층적인 건 모르는 거야.”】 그래도 최근에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정도를 아는 사람이니 괜찮지 않을까?
삐졌다고 해도 적당히 말하면 풀겠지. 어차피 이 일 해결하려면 내가 필요하잖아.
이 일을 아는 사람이라고 해 봤자 하람이랑 비눗방울 정도인데, 두 사람이서 델리키아를 어떻게 상대하겠는가. 그건 내가 포함되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지.
전쟁 도중에 간혹가다 출몰한 군단장은 늘 우리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혔다.
결국 끝에 가서 물리치기는 했지만, 그것도 다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 끝에 달성한 위업이었다.
헛되게 잃은 목숨들을 생각하면 기쁨과 동시에 슬픔을 느끼는 건 당연한 것.
대가를 걸고 넘어와 본신의 힘을 꺼내지 못한 상태의 군단장도 그토록 강력한데, 크레이터에서 만나게 될 군단장의 본체는 얼마나 더 강력할까?
생각만 해도 손끝이 저릿저릿하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거대한 적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숨이 막힌다.
누군가는 전투 중에 느끼는 희열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낀다던데,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강자를 이겼을 때 느끼는 성취감 같은 건 확실히 있다.
그건 사헌 길드 산악인들이 맨날 정상에서 막걸리 마시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지금도 고생하고 있을 레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역시 막내는 어딜 가나 고생한다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막내의 운명을 거부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오묘한 오드 아이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크레이터 출입 기록이 필요해요. 가능하면 빨리.”
“협회에 문의해 달라는 소리죠?”
“네. 분석은 형한테 맡기고, 저희는 그 후를 생각하는 게 좋겠어요.”
하람의 말은 타당했다.
집에서 못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한테 분석을 시키는 게 맞지. 발로 뛸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일을 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그럴 필요 없어요. 이미 문의했거든요.”
하지만 이쪽은 이미 준비를 마친 상태. 나는 하람에게 엄지를 척 들어 보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네가정말좋아를 부르면 진짜로 올까?
【“올 거야. 아까 신입 가르치고 있는 걸 봤거든.”】신입?
【“왜, 저번에 본 여자 있잖아. 이번에 신입으로 들어왔어.”】저번에 본 여자면 벚꽃나비인가? 나는 벚꽃나비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편애는 그 사람이 맞다는 답을 내놓았다. 예상대로였다.
“이미 문의하셨다고요? 그쪽에서 뭐라고 하던가요?”
자기도 모르는 새 일이 진행되었다는 것에 놀란 하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제가 맨날 게으름만 피우고 있는 것 같으신가요? 그건 착각입니다. 사람은 자고로 할 땐 해야 하는 법이다.
“그건 자리를 옮겨서 말하죠. 제가 아무 생각도 없이 사헌 길드랑 접촉했을 리가 없잖아요.”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하람은 사헌 길드가 불편한 게 자기뿐인 줄 아는 것 같다.
내가 그 길드랑 얼마나 불편한 사이인데. 이 대한민국에서 나이가 얼마나 큰 벼슬인지 알 만한 사람이 왜 그런담.
나는 핑거킹 일 때 겪은 많은 수모를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넘치는 에너지를 발산할 곳이 없어 에베레스트까지 가는 중장년은 생각보다 더 파격적인 법이다.
“사헌 길드에서 필요한 파일을 받아 왔어요. 일단 이거 뽑고 얘기하는 게 좋겠어요.”
나는 하람을 끌고 인적 드문 골목길로 들어섰다.
하람은 ‘저 사람이 이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하람과 비눗방울은 이 일을 왜 캐고 있었을까? 이 사건을 해결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안 대부분이 사건을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사건의 주범이 외부 차원의 군단장이라는 것을 알고도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목숨을 걸어도 해결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주변에 직접적인 피해자가 있다면 눈에 불을 켜고 해결하려고 하는 게 정상이겠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저 둘은 대중에게 이름 높은 헌터이니 얌전히 살면 저쪽에서도 먼저 건드릴 생각은 없을 텐데. 그들은 왜 이 일에 깊숙이 발을 담근 걸까? 나는 궁금했다.
“하람 님.”
“네?”
“여쭤볼 게 있는데요.”
감지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하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두 분은 왜 이 일을 해결하려고 하시는 거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고, 해결한다고 해서 두 분한테 이득이 될 일도 아니잖아요.”
“그건…….”
“혹시 주변에 이 일에 휘말리신 분이 계신가요? 제가 본 하람 님은 그 정도가 아니면 그저 방관하실 분이어서요. 순수하게 선의를 베푸는 분은 아니시죠.”
살짝 당황한 듯한 하람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나는 하람의 표정을 슬쩍 살피곤 이어 말했다.
“물론 제가 느낀 게 사실과는 다를 수도 있지만요. 비눗방울 님이 이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시는 이유도 궁금하네요. 그쪽도 나름 필사적으로 찾아보던데.”
물론 비눗방울은 마리 씨라는 부가 요소가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마리 씨 때문에 이 일을 조사하진 않았을 것 아닌가.
새벽 1공대 사람들은 명성이 높은 만큼 알려진 정보도 많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을 다 아는 건 아니지.
나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엄마도 내 모든 걸 아는 건 아니지 않나. 나는 하람을 그런 사람이라고 판단했지만, 또 모르는 거였다.
‘……사실대로 얘기했을 때 저 사람이 우리를 이해해 줄 확률이 얼마나 될까? 10%?’
음. 그래도 크게 틀리진 않은 것 같다. 나는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하람을 보며 상냥하게 웃었다.
“괜히 머리 굴리지 마시고 사실을 털어놓으시는 게 좋을걸요? 판단이야 제가 하지만 그쪽이 더 무사할 확률이 높지 않겠어요?”
때로는 웃는 얼굴이 화난 얼굴보다 무서울 때가 있다.
열심히 속마음을 알려 주던 하람이 생각을 멈추고 날 보았다. 편애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조금 이상해.”】
뭐가? 하람이?
【“예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어. 사실을 말하게 해 봐. 속내가 읽히지 않는 것을 보니 내 생각이 맞을 거야.”】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도움 되는 외계인이 진지하게 경고했다.
【“오타가 있으니 수정이 필요한 것 같다.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더 도움 되는’으로 수정해.”】태클 거는 게 여전하다. 나는 쟤가 정말로 진지한 건지 살짝 궁금해졌다.
【“진지한 거 맞아.”】
그렇다니까 그러려니 하자.
낙원 소속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편애와 속으로 시시덕대는 동안 하람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하람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하람은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입을 열었다.
“■■ ■■■■ ■■■”
그리고 그 입에서 튀어나온 건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역시.”】
편애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외쳤다. 혼자 알면 좋냐. 저게 대체 뭔데?
나는 미간을 팍 구기고 하람을 노려보았다. 하람은 조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역시 모르시겠죠?”
“하람 님은 방금 외계어를 하셨어요. 한국어로 해 주세요.”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제약이 붙어 있어서요. 아마 사건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제대로 말할 수 없을 거예요.”
답지 않게 불안한지 하람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거짓을 말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맞아. 거짓말은 아닐 거야.”】
백과사전에서 거짓말 판독기로 직종을 변경한 악마가 덧붙였다.
배후좌란 다 이런 존재인 것일까? 마치 스마트폰 같은?
“그러면 어쩔 수 없죠.”
하람과 비눗방울이 무엇 때문에 이 일에 매달리는지 좀 알고 싶었는데, 일이 끝나기 전에는 못 듣는다니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중요한 건 이 일에 있어서 진지한가 아닌가다. 중간에 도망갈 사람이면 처음부터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내게도, 그들에게도.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곤 심호흡했다.
외계어가 나왔다는 것은 외부 차원의 무언가와 얽힌 이야기겠지. 그들은 아마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물러설 수 없는 일이지.”】
보증은 녹색 눈의 악마가 한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지금 가장 필요한 사람의 이름을 외쳤다.
“네정좋!”
부르면 온다고 했으니 분명히 오겠지? 그쪽 지금 바빠?
【“아니? 신입은 다른 사람한테 넘겼어. 어디 구석에서 멍때리고 있을걸?”】현재 낙원에 있는 편애가 네정좋의 한가함을 보장했다. 나는 그 말만 믿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네가정말좋아는 갑자기 왜 부르세요?”
그러나 그가 오는 일은 없었다.
“그, 그러게요.”
나는 하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던진 질문에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르면 온다고 했는데 왜 안 오지. 그새 또 삐졌나.
삐질 일이 뭐 있다고 삐졌겠어. 저번 일 생각하면 내가 삐져야 하는 게 맞지 않나.
나는 다시 한번 그의 닉네임을 불렀다.
“네가정말좋아! 야! 네정좋!!”
역시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이건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새로운 방식인가?
오겠다고 호언장담해 놓고 안 오기 있음?
그 인간을 믿고 이런 만행을 벌이다니. 낙원 인간들이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이 황당한 상황에 하람이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나는 사연 많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 그런 게 있습니다. 그냥 낚인 거니까 몰라도 됩니다.
프린터기 사용 가능하고 다른 사람 없는 곳 있나.
이 지도 받은 거라 보안이 철저한 곳으로 가야 할 텐데. 새벽 길드나 협회 쪽이 좋겠지.
나는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 검색창을 켰다. 교통편을 검색하기 위해서였다.
【“이름을 부르래.”】
편애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이름? 무슨 이름?
【“이름 부르기로 했으면서 왜 다시 닉네임이냐는데?”】순간 등골이 싸했다. 편애가 하는 말을 그제야 이해했기 때문이다.
“설마?”
이름을 안 부르고 닉네임을 불러서 안 왔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주하 씨……?”
동시에 허공에서 손이 쑥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