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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94화 (94/175)

제94화

순결 드립을 치면서 뇌청순 백치미를 뽐내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생각 안 하고 살길래 진짜로 별생각 없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치밀하다.

하긴 그 위치에서 인성 파탄 소리 들으려면 그 정도는 해 줘야지. 휴가 간 러브리스 맞으라고 까마귀 무리도 선물해 주는 이 구역 최고 인성 갑 아니던가.

이젠 방심하지 말아야겠다. 나는 창백할 게 분명한 뺨을 더듬거리며 다짐했다.

“그런 곳엔 죽어도 안 가죠. 걱정하지 마세요.”

미쳤다고 호랑이 굴에 걸어 들어가겠어? 죽었다 깨어나도 거긴 안 간다.

【“죽으면 네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아, 그럼 안 죽으면 될 거 아니야. 쟤는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난리야.

나는 이 주제를 얼렁뚱땅 마무리하며 표정을 관리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알립니다.

갑자기 얼굴색이 바뀌거나 혼잣말하는 사람을 너무 이상하게 쳐다보지 마십시오. 어쩌면 지구를 지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요! 다 알고 있었어요. 우연 님께서 저희 길드보다 별로인 길드에 가실 리가 없죠!”

이런 내 진심이 통한 건지, 레나는 해맑게 대답했다.

물론 그녀의 말에는 약간의 흠이 있었다. 모로 보나 사헌보다는 낙원이 낫지.

근데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지금은 사헌 길드에서 받아야 하는 게 있으니까.

“레나 님. 혹시 부탁드린 건 가져오셨나요?”

나는 등산 동호회 쪽을 흘끗거리며 속삭였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하람이 보였다. 집 나간 자식새끼 얼굴을 여기서 보네 마네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빨리 구출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아니 난? 새벽 길드 가겠다고 집 나온 줄은 몰랐지.

“네. 서울역 크레이터 내부 지도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일단 가져오기는 했는데, 이건 왜??”

“안에 들어갈 일이 생겼거든요. 협회 쪽에 물어보니까 아마 사헌 길드에 지도가 있을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근데 왜 지도가 있지? 나는 레나에게 자료를 넘겨받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크레이터야 게이트와 달리 고정된 장소니 지도를 만들 법도 하지만, 굳이?

맨날 크레이터에 드나드는 PK나 전문 헌터들은 크레이터 내부 지도를 만들지 않았다.

크기가 워낙 넓기 때문에 그 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지도를 만드는 건 굉장히 고된 일이라고 들었다.

험지는 원래 잘 닦인 곳으로만 돌아다녀야 하는 법이다. 각 크레이터에는 헌터들이 주로 다니는 길이 있었다. 그들은 보통 그쪽으로만 다녔다. 괜히 조난 당해서 험한 일 겪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크레이터 지도는 어떻게 만드신 거예요? 보통 험한 일이 아니었을 텐데.”

나는 레나에게 받은 USB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물었다.

레나가 ‘으아악!!’ 따위의 내적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오~ 보통 이유가 아닌가 본데?

“그, 그게.”

“네.”

“이거 어디 가서 말씀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다 우연 님이라서 말씀해 드리는 거예요.”

레나가 동호회 회원들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영화관에서 팝콘을 씹는 기분으로 귀를 기울였다.

“사실 동호회 활동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요. 이게 등산이든 자전거든 땀 흘리는 곳이면 어디서나 벌어지는 일인데, 그,”

“그?”

“부, 불륜이라고??!”

충격 실화. 상상도 못 한 정체가 K-헌터의 뒤통수를 강타한다??!

“이 지도는? 크레이터로 도망간 배우자의 불륜 상대를 잡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에요.”

레나가 목소리 볼륨을 한참 낮추고 소곤거렸다. 나는 갑자기 닥쳐온 K-막장 드라마의 향기에 혼란스러워졌다.

이 지도를 완성한 건 사헌 길드에 속해 있는 중년의 헌터. 그 헌터의 배우자는 자전거 동호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동호회에서 전국 일주 갔다가 다른 사람이랑 눈이 맞아 버렸다.

“아이들이야 고등학생이니까 용돈만 주면 자기 앞가림 잘할 테고, 배우자는 헌터라 외박이 잦으니 불륜 상대랑 자주 만난 거죠. 그러다 마침 집에 초대했을 때 만나 버린 거고??.”

“그래서요?”

“난리 났죠. 그 집 풍비박산 났어요.”

기막힌 막장 드라마가 그 끝을 알렸다. 일반인 상대면 무조건 헌터가 이기지. 굳이 말할 것도 없지만.

“그래서 현장에서 그 불륜 상대를 딱 잡으려고 했는데!”

“했는데?”

“마침 불륜 상대가 그 자리에서 각성한 거죠. 진짜 어마어마한 일이었어요.”

이 막장 드라마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진짜 파란만장하구나.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래서요? 어떻게 됐어요?”

“음??.”

레나의 시선이 등산 동호회 회원들 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아직도 하람을 갈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레나가 안심한 듯이 표정을 풀었다.

“마침 불륜 상대의 특성이 가속이라서요, 도망갔다나 봐요.”

오, 가속이면 날강도 특성인데.

나이 생각했을 때 그쪽이 불륜 상대일 리는 없지만, 흔치 않은 특성이 겹치니 신기했다.

“사헌 같은 대형 길드의 시선을 피하기는 어려우니까 크레이터로 도망간 거죠. 그쪽도 가정이 있었으니까, 그만큼 잡히고 싶지 않았나 봐요.”

레나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나는 조금 떨떠름했다. 왜 굳이 크레이터로 간 거지. 거긴 까딱하면 죽기 십상인데.

“그 사람이 왜 그쪽으로 간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거기서 다섯 달 넘게 지냈대요. 지도는 그걸 잡기 위해 만들어진 거예요. 네 달하고도 보름이 걸렸다고 들었어요.”

네 달하고도 보름이 걸려 만들어진 지도. 나는 주머니 속 USB의 귀중함을 느꼈다. 이 지도에 그런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역시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막장이구나.

“저희는 크레이터에 들어가지 않지만, 지도 파일은 혹시 몰라 남겨 놓았어요. 왜 크레이터에 들어가려고 하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 아무쪼록 잘 해결하셨으면 좋겠네요!”

레나가 손뼉을 짝 치며 응원의 말을 건넸다. 나는 등산 동호회 회원들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물었다.

“혹시 뭐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뭔데요?”

“피해자분은 결국 어떻게 되셨어요?”

이 막장 드라마의 엔딩이 너무 궁금했다. 역시 대세는 사이다 권선징악인가? 왜 우리 엄마가 일일 드라마 보는 건지 알겠다. 이런 맛이었구나.

“아? 그 뒤로 무사히 이혼하셨어요. 불륜 상대도 잡아서 응징했고요.”

“정말요? 다행이네요.”

역시 요즘 대세는 사이다라니까. 괜히 사이다물이 인기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대세를 따르는 엔딩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막장이라고,

“근데, 그분도 나중에 동호회에서 불륜을??.”

“예?”

“심지어 재혼까지 하셨어요. 그래서 다들 암묵적으로 이 이야기에 관해 함구하고 있어요.”

레나는 아주 충격적인 엔딩을 꺼내 놓았다.

저게 대체 뭐야. 돌고 도는 동호회 불륜 스토리? 심지어 피해자 쪽이 더 나쁘지 않나? 완전 (전)피해자에 (현)가해자인데?

【“인생 재미있게 사는 사람이네.”】

그러게. 저걸 인생 재미있게 산다고 표현하는 게 옳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기막힌 막장 스토리를 들었더니 피곤했다. 나는 파일을 가져다 준 레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하람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데 협회 쪽에서는 이 파일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 * *

“저걸 어디에 쓰려고 하시는 거지?”

예정되었던 손님이 떠난 후의 남산 팔각정 앞.

레나는 찝찝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렸다.

원래 좋은 말로도 촉이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그 돌발 게이트 사건 이후로 이상할 정도로 촉이 좋아졌다.

‘레나 님. 요즘 이상한 소리 안 들리세요?’

‘소리? 무슨 소리요?’

‘??안 들리면 됐어요. 아직 크게 관심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안 그래도 기분 이상한데, 하람이 이상한 소릴 하고 가서 더 이상해졌다.

빈말로도 사이 좋아 본 적 없는 하람은 집에서 나간 뒤로 더 거리를 벌렸다. 원래 일 년에 두 번 볼까 말까 한 사이긴 했지만 말이다.

“성현 아빠! 이거 봤어? 이번에 말이야! 새 장비가 나온다더라!”

“언니!! 아이스박스 안 챙겨 왔어?!”

“아이고, 형님. 형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슬슬 건강 챙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등산 동호회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끌벅적했다. 레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중얼거렸다.

“별일 아니면 좋겠는데??.”

쓸데없는 기우라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아마 그렇게 가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어마무시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크레이터가 무려 두 번이나 터졌었지.’

오늘따라 기분이 이상하단 생각이 들 때마다 크레이터가 폭발했다. 레나는 슬슬 이 모든 일이 누군가의 농간이 아닌가 하고 생각 중이었다.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데.”

그도 그럴 게, 오늘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들면 진짜로 무슨 일이 생기는 거다. 이게 무슨 재앙을 예언하는 노스트라다무스도 아니고.

레나는 모든 게 단순한 기우이길 바랐다. 그저 단순하게 기분이 이상한 날이기를. 우연 님이 하람과 함께 나타나 지도를 받아간 건 그냥 크레이터에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기를.

절대로 우연 님이 들어가실 크레이터가 폭발하지 않기를.

‘지금까지 터진 일을 보면 이게 당연한 수순이잖아!’

우연 님이 지도를 받아 갔다.

-> 우연 님은 크레이터 안에 들어가실 거다.

기분이 이상할 때마다 크레이터가 폭발했다.

-> 오늘 기분이 이상하니까 크레이터가 폭발할 거다.

우연 님이 크레이터에 들어가실 거다.

-> 우연 님이 들어가신 크레이터가 폭발할 거다.

레나는 답을 딱딱 도출해 내곤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이게 맞는 것 같았다.

근거? 그런 건 없었다. 다 느낌이었다. 그저 촉이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잘 맞았다!

진짜로 크레이터가 폭발하면 어떡하지? 그래도 우연 님이랑 아는 사인데, 문제 생기면 곤란….

콰과과광-!!!

거대한 폭음이 레나의 생각을 끊고 들어왔다.

방금만 해도 한가롭게 떠들던 동호회 회원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일어나 폭발이 일어난 곳을 보았다.

레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곳은,

“레나야.”

“네.”

“네 친구들한테 연락 넣어라.”

마침 서울역 방향이었다!

“서울역 크레이터가 폭발했다.”

정신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걱정 많은 레나의 쓸데없는 기우는 천리안을 가진 가을클래식의 말로 그저 기우가 아님이 확인되었다.

그래도 금방 터져서 다행이지. 아마 두 사람은 크레이터 안에 진입하지 못했을 거다. 공간이나 가속 특성 같은 걸 가지지 않은 이상 벌써 도착했을 리가 없었다.

우연 님!! ◀ [레나]

서울역 크레이터 폭발했어요!!!!◀ [레나]

설마 벌써 들어가신 건 아니죠?!?!◀ [레나]

레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답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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