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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93화 (93/175)

제93화

비눗방울이 인천으로 안 튀게 막으면 마법 알려 준다는 인간이 튀었다.

나는 이를 뿌득 갈고 멜팅하트를 닦달했다.

그렇게 얻은 게 PK가 크레이터 안이라는 정보.

PK가 내 연락에 답장을 안 한다는 것은 죽었거나 억류되어 있다는 뜻인데, 크레이터 안이라면 후자가 맞을 거다.

누가 뭐라고 해도 PK만큼 크레이터 안을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크레이터 기여도 1위면 말 다 했지.

그리고 델리키아의 본거지가 크레이터일 것이라는 건 조금만 생각해 봐도 추측 가능한 이야기였다.

특성 ‘갈취’를 사용해 힘을 불리기 위해서는 본체를 끌고 오는 것이 좋으니까.

게이트는 열고 닫을 때마다 막대한 마나가 소모되고, 헌터들의 이목을 끌기 때문에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게이트에 본체를 끌고 오려면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하는데, 그랬다가 운이 안 좋아서 나 같은 인간을 만나면 그대로 망하는 거다.

목숨 안녕~ 계획도 그대로 안녕~

반면에 크레이터는 상대적으로 헌터들의 이목이 덜 쏠린다. 그들이 한 것처럼 크레이터 몇 군데 펑펑 터뜨려 주면 그쪽으로 죄다 달려가니까 숨기엔 이만한 데도 없지.

“그래서 제 생각에는 크레이터를 조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람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와 비슷한 답을 내놓았다.

델리키아의 특성과 PK의 이력을 아는 이상 나올 수밖에 없는 답이다.

“도윤 형을 통해서 전해 주신 말씀 잘 들었어요. 결국 저희가 상대해야 하는 건 인간이 아니라 몬스터라는 거요.”

그렇지. 나는 후드 지퍼를 목 끝까지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한낮에도 바람이 꽤 쌀쌀했다.

“상대할 적을 미리 알아차린 상황이니 적에 대한 정보를 좀 얻어 왔어요.”

“누구한테요?”

“길드장한테서요.”

하람의 웃는 얼굴 뒤로 그늘이 졌다. 정보를 얻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모양이다.

“델리키아의 특성은 갈취예요. 알고 계시죠?”

“네. 그림자를 움직여 생물을 씹어 삼키죠. 저번에 비눗방울 님과 함께 들어갔던 게이트에서 봤어요.”

그건 그림자보단 슬라임에 가까웠지만, 그림자든 슬라임이든 생물을 씹어 먹고 생명력을 갈취하는 건 똑같으니 상관없겠지.

나는 과거에 봤던 델리키아의 그림자와 저번 던전에서 보았던 검은 슬라임을 비교하며 말했다. 하람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맞아요. 그 그림자는 잡아먹을 상대를 가린다고 들었어요. 그림자를 이용해 힘을 뽑아내지만, 그 그림자를 만들어 내려면 힘을 분산시켜야 하는 모양이에요. 랭크가 낮은 헌터나 비각성자에게는 위협적이겠지만, 우연 님한테는 큰 위협이 되지 않겠죠.”

저번 던전에서 만난 슬라임도 졸졸 따라오다가 터졌지. 확실히 내게 위협이 될 상대는 아니었다. 다른 랭크 낮은 헌터들이면 모를까.

“그녀에게는 어떤 공격이든 반사하는 양산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저희 길드장이 가지고 있지만요.”

“양산을 빌려 오실 생각은 없으세요?”

“그거 되게 귀중한 물건이라서요. 빌려 달라고 하면 어디에 쓸 건지 물어보실걸요? 저희 목표는 길마 님한테 들키지 않고 일을 해결하는 거 아니었나요?”

그건 그렇지. 나는 양산을 되찾아 올 생각을 접었다.

그냥 양산 내놓으라고 하면 줄까?

아니? 뭐, 주긴 주겠지만? 내가 줘 놓고 뺏어 오긴 좀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그게 있으면 델리키아를 상대할 때 큰 도움이 될 텐데. 나는 뺨을 긁적거리며 델리키아의 공격을 회상했다.

그녀의 가장 큰 무기는 특성인 갈취지만, 그것만이 그녀의 무기인 건 아니었다.

그림자나 슬라임을 소환해 부리는 것처럼 그녀의 주특기는 무언가를 소환하는 것.

【“마법을 배우면 그쪽 계열로 눈 색이 바뀌지. 군청색이면 남색이니 소환술사겠네.”】가계약 이후에 내 백과사전으로 취직한 편애는 소환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소환 마법은 기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존재를 불러오는 마법. 기존 차원의 존재인 정령과는 궤를 달리한다.

소환 마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환물에게 이름을 붙이고 복종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차원의 존재에게 계약이라는 목줄을 걸어 수족으로 부렸다.

【“배후 계약과 조금 비슷한 면이 있지.”】

힘을 주고 대가를 받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힘을 빌리는 것이지만, ‘다른 차원’의 존재에게 행한다는 점에서 확실히 비슷한 면이 있긴 했다.

【“그래서 그 엘프 공주가 부리는 게 뭔데?”】

놀라지 마시라. 그건 바로?!

【“바로?”】

인간이었다. 인간이긴 한데, 검기를 날려 대는 소드마스터였다.

【“소드마스터?”】

저쪽 차원에는 없는 용어에 편애가 의문을 표했다.

원래 판타지는 대마법사뿐만 아니라 소드마스터까지가 국룰이잖아. 물론 저쪽은 마법만 발달해서 칼 쓰는 애가 잘 없다지만.

하긴 마법으로 죄다 할 수 있는 세상인데, 검 쓰는 법을 배우는 게 웃기긴 하다.

편애 말에 따르면 신체를 강화하는 마법 계열도 있다는데, 굳이 마나를 다른 방법으로 운용할 필요가 있겠는가?

아무튼 검기를 뿅뿅 날려 대는 신세계 소드마스터는 문제가 될 만한 상대였다. 특히 온 힘을 다해 날리는 필살기는 굉장히 거대하고 강력해서 당시에도 던전 내부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게 양산을 걸고 그만큼의 힘을 얻어 다운된 레벨인데, 본신을 상대하면 대체 어떤 물건이 나올지는 그때 가 봐야 알겠지.

나는 발을 까딱거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옆에서 나란히 걷던 하람이 슬슬 떨어지기 시작한 낙엽을 보며 물었다.

“근데 약속 장소를 여기로 잡은 이유가 있을까요?”

“아, 그거요.”

“남산이라니 조금 특이하네요. 케이블카 안 타세요?”

하람이 케이블카 표 끊는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우리 둘 다 3D 직종인데 뭘 케이블카까지야. 다리 튼튼한데 걷는 게 낫지. 또 오늘은 케이블카 운영 안 한다.

나는 하람을 끌고 정상까지 걸어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남산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니만큼 정상으로 가는 길이 잘 닦여 있었다. 나와 하람은 오늘따라 이상하게 사람이 없는 계단을 통해 산을 올랐다.

【“이상한 게 아니지. 오늘 여기 일 있잖아.”】

요즘 내 말에 태클 거는 게 새로운 취미가 된 편애가 어김없이 태클을 걸었다.

일이라고 해 봤자 별일도 아닌데, 뭐.

“오늘 사람이 왜 없는지 아세요?”

나는 슬슬 보이기 시작한 전망대를 보며 넌지시 물었다. 하람은 살짝 고민하다가 금세 입을 열었다.

“게이트인가요?”

역시 백발백중이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C-급 게이트가 열린다고 나왔는데, 그걸 낙원 길드가 안 가져가서요.”

“그러고 보니 이번 차례가 낙원 길드였죠.”

하람이 이해했다는 듯이 말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완전한 가을을 알리고 있었다.

사헌 길드가 마포구에 얼굴을 비췄던 것도 고작 몇 주. 땅따먹기하듯 닥치는 대로 영역 표시를 하던 길드들은 암묵적 합의에 따라 서울을 여덟 구역을 나눴다.

서초구 우두머리인 사헌 길마 아줌마가 있는 사헌이 노른자 땅인 강남을 먹은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근데 난 개인적으로 땅값 비싼 동네보단 면적 넓은 동네가 낫지 않나 싶다. 게이트가 자주 열려야 돈을 많이 벌 거 아닌가.

아무튼 오대 길드를 포함한 일곱 개의 길드가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단 종로구, 중구, 용산구 이 세 개의 도심에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대지 않았다기보다는 못했다고 말하는 쪽이 옳을 것 같았다. 저긴 정부 관할이기 때문이다. 가엾은 S1팀.

【“공무원은 이래서 하는 게 아니라니까.”】

외계인 주제에 뭘 아는 척을 해. 그건 헌터라는 직업이 생기기 전에는 모두의 꿈이었다고.

나는 봉수대 근처를 둘러보다가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협회는 각 지역을 맡은 길드들에게 해당 지역 게이트 선점권을 줬다.

그럼 중앙 세 구의 선점권은 공무원 헌터들에게 돌아가는 게 맞으나, 그들은 안 그래도 정신없이 바쁜 상황.

낮은 랭크 공무원들은 길드 헌터들 보조하러 다니느라 바쁘고, 높은 랭크 공무원들은 크레이터 폭발 사건 조사만으로도 바쁜데 뭘 돈까지 벌러 게이트에 들어가고 앉아 있겠냐는 말이다.

그래서 중앙 세 구의 게이트는 자연스럽게 모두에게 개방되었다.

그리고 오늘 남산에서 열리는 이 게이트의 선점자는 바로,

“우연 님!!”

사헌 길드 등산 동호회였다. 산하면 빠질 수 없는 사람들이죠.

캠핑 의자 가져와서 주르륵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로 레나가 휙 튀어나왔다.

나는 동시에 옆에 서 있던 하람의 낯빛이 파리해지는 것을 보았다.

노리고 온 건 아닌데 반응이 이러니 두 사람 관계가 점점 궁금해지네. 비눗방울한테 물어볼까.

“오신다길래 혼자 오시는 줄 알았는데, 하람 님까지 끌고 오셨네요? 저희 고모가 좋아하시겠어요!”

“길드에 고모님이 따로 계세요?”

“아니요. 진짜 저희 고모요.”

기분이 좋은지 목소리가 밝은 레나가 하람을 바라보며 히죽거렸다. 나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하람을 흘끗 보곤 상황파악을 마쳤다.

아. 두 사람 친척이었구나.

그 생각하기 무섭게 등산 동호회 무리에서 어른 한 분이 나오셔서 하람을 질질 끌고 갔다.

옆으로 다가온 레나가 내 귓가에 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저희 고모도 이쪽 길드에 계시거든요. 등산 동호회 소속이시죠.”

“그러니까? 하람 님 어머니 되시는 거죠?”

“맞아요! 저만 이 길드에 놔두고 다른 길드로 도망간 아주 배은망덕한 인간이에요. 언제나 저희 길드에서 안줏거리로 회자되곤 하죠.”

못난 자식 등짝 때리는 건 어느 집이나 똑같은 모양이다.

나는 하람을 신나게 갈구는 등산 동호회 회원들을 보며 침묵했다.

여긴 그냥 받을 거 있어서 온 건데 조금 나중에 만날 걸 그랬나. 저런 모습 보니까 미안하네.

“그런데 우연 님, 저 살짝 궁금한 게 있는데요.”

고통받는 하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레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레나를 보며 답했다.

“네. 말씀하세요.”

“혹시 낙원 길드 가시기로 하셨어요?”

레나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언제 우리 길드 오기로 했어?”】

음량이 작든 말든 상관없는 외계인이 그걸 듣고 2차로 물었다.

“예?”

나는 어이가 없었다.

“제가 낙원 길드에 왜 가요?”

낙원 길드 들어가느니 사헌 길드 들어가고 말지.

난 내가 거기 들어갔을 때 벌어질 일들을 상상할 수 없었다. 인생이 파란만장한 걸로 모자라서 자포자기가 될 게 분명했다.

“아니? 별건 아니고요.”

주변을 휙휙 둘러본 레나가 다급하게 이유를 덧붙였다.

“저희 동호회 회장님이 말씀하신 건데, 우연 님께서 낙원 길드에 있는 모습을 보셨다고….”

“예?”

“아시다시피 저희 회장님 특성이 천리안이잖아요. 네가정말좋아랑 같이 계셨다고 해서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거예요.”

순간 온몸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네정좋 그 인간이 왜 되지도 않는 개소리를 해 가며 끌고 간 건가 했는데, 이걸 노린 건가?

극야한테 한번 호되게 데인 사헌의 가을클래식이 낙원을 주시하고 있다는 건 이 바닥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극야는 보통 낙원 길드 건물에 머무르지 않았는데, 이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일거수일투족을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으니까. 그쪽은 들키면 조금 문제가 있기도 하고.

“하, 하하.”

“?아니죠? 제가 아닐 거라고 말씀드리긴 했어요.”

레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결국 사헌 측에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그런 짓을 한 건가?

두 길드는 사이가 안 좋으니까? 저쪽에서 먼저 거리 두게 만들기 위해서?

“그럼요.”

그런 거라면 크게 한 방 먹었다. 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세게 맞은 뒤통수가 좀 얼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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