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인간의 신체가 생겨나는 과정은 참 신비로웠다.
일단 손이 먼저 쑥 빠져나왔고, 다음으로 빠져나온 건 머리였다.
사람들은 난데없는 호러 쇼에 놀란 것 같았으나, 네정좋의 얼굴을 보자마자 관심을 껐다.
정확히 관심을 껐다기보다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쟨 어딜 가든 눈에 띄니까.”】
처음엔 좀 인간 같았다가 요새는 완전히 인외 같은 외계인이 말했다.
하긴 네가정말좋아가 보통 눈에 띄던가. 얼굴도 성격도 소속도 능력도 다 눈에 띄었다.
허공에서 몸을 쑥쑥 꺼내던 네가정말좋아가 상반신만 내민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
끊임없이 이어지던 ‘아’는 ‘어’로 바뀌어 또 끊임없이 이어졌다. 역시 범상치 않기로는 전 세계 탑을 달리는구나.
【“뭘 찾는 것 같은데?”】
“그러게.”
고도로 발달한 정보화 시대의 일반인은 성질 더러운 헌터를 만나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나는 번쩍번쩍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보며 대답했다.
이 근처 모든 사람이 ‘와 네정좋 대박.’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미친놈이 언제 여기까지⋯! 또 잡아가서 이상한 소리 하려고!!’
오. 이건 좀 흥미로운데. 나는 연속적으로 들리는 네정좋 대박 사이에 묘하게 독특한 속마음을 찾아냈다.
어느 방향이지?
【“골목 근처.”】
편애가 센스 있게 방향을 안내했다. 나는 편애의 안내에 따라 골목 근처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꽁꽁 싸맨 사람 하나가 골목길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젠장! 젠장! 젠장!’
‘어’ 빌런에 이은 ‘젠장’ 빌런이라니. 이 광경 참 흥미롭다.
나는 걸음을 빨리 놀려 골목길 쪽으로 접근했다. 골목길 안으로 우다다 뛰어가는 사람의 겉옷 주머니에 노란 병아리가 뿅하고 튀어나왔다.
“헉, 삐약아!!”
그러자 정신없이 도망치던 사람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병아리를 낚아챘다. 아, 뭐야. 누군가 했더니 벚꽃나비였어?
“근데 왜 너정ㅈ을 피해서 도망가는 거지?”
【“글쎄?”】
며칠 사이에 네가정말좋아한테 죄라도 지었나?
다른 건 몰라도 자기 목숨줄은 잘 챙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벚꽃나비는 특성이 동화(同化)인 만큼 자기 목숨줄을 잘 챙겼다.
성격도 싹싹하고 밝은 사람인데, 대놓고 네정좋한테 시비를 걸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쟤 별명 안 그래도 ‘너 정말 ㅈ같아’ 잖음. 나댔다간 별명 맛 화끈하게 보게 된다.
【“쟤 어지간한 일에 반응 안 해.”】
“어느 정도쯤 돼야 반응하는데?”
【“위대하신 ‘그분’ 욕하거나 자기보다 못생긴 사람한테 못생겼다는 소리 들었을 때 정도. 다른 건 싹 다 무시할걸?”】
위대하신 그분이 누군지는 말 안 해도 알겠다.
얼굴에 빛이 나는 거로 모자라 머리 뒤에 후광이 비치는 그분 아닌가. 계약하면 패시브로 귀신을 보여 준다는 그 남자⋯⋯.
【“정확히 귀신이 아니라 영혼이야.”】
그게 그거지 뭐.
나는 시큰둥하게 받아치며 삐약이와 벚꽃나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벚꽃나비가 삐약이를 쥐고 안도하기 무섭게 허공에서 손이 쑥 튀어나와 벚꽃나비의 뒷덜미를 쥐었다.
“으아아아아악-!!!”
뒷덜미를 잡힌 벚꽃나비가 골목길이 떠나가라 소리 질렀다. 얼마나 커다란지 귀가 떨어져 나갈 뻔했다.
“사람!! 살!! 읍!!!”
안 그래도 목소리 또랑또랑하다고 생각했는데, 소리 높이니까 더 밝고 선명하게 들린다.
평소에 쌓인 게 많은지 목소리도 엄청 우렁차다.
나는 벚꽃나비에게 헌터 대신 큰 목소리가 필요한 직업을 추천해 주고 싶었다.
“읍!! 으읍!!!”
그리고 네정좋도 그 점을 느낀 건지, 벚꽃나비가 더 소리치기 전에 그녀의 입을 꽉 막아 버렸다.
나는 졸지에 대낮부터 사람이 납치당하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물론 대낮부터 술 처마신 사람이 할 말은 아니긴 한데.
“너희 길드는 사람 납치도 해?”
【“아니. 쟤만 해.”】
아무튼 이 광경이 평범한 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다. 면식도 있는데 좀 도와줄까. 나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네정좋과 벚꽃나비에게 다가갔다. 네정좋은 다른 공간으로 몸을 반쯤 집어넣은 상태였다.
“저기요. 네가정말좋아 님.”
사람 하나를 납치하면서도 ‘어⋯⋯.’ 따위의 생각만 하던 네정좋이 날 보자마자 ‘오⋯⋯.’로 단어를 바꿨다.
‘아’, ‘어’, ‘오’. 쟤는 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나는 그가 낙원에 들어간 이후부터 저렇게 됐는지, 아니면 그전부터 저랬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생각을 알기 전에도 이상한 인간이었는데 생각을 알고 난 후에는 두 배로 이상해 보였다.
“너 쟤랑 같이 지내면서 무슨 생각 들었어?”
【“저 인간은 제대로 미쳤구나.”】
“야, 너도? 나도.”
나는 편애랑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면서 두 사람의 앞에 가서 섰다.
벚꽃나비의 마젠타색 눈이 희망에 차 반짝거렸다. 나를 구세주 정도로 아는 모양이다.
‘킹갓엠페러⋯ 아무튼 손가락테크닉 최고! 핑거킹 최고!!’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안녕하세요, 전하.”
여전히 ‘오⋯⋯.’ 따위의 생각을 하는 네정좋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벚꽃나비가 하릴없이 바둥거리는데도 흔들림 없는 편안함이 돋보였다. 이 자식, 침대 광고 찍어도 되겠구먼.
“이런 곳에서 뵙게 되다니, 송구스럽네요.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아니요. 딱히 없는데요.”
“그럼 저희 길드장님 만나실 예정 있으세요?”
“아니요. 그 인간 얼굴 별로 안 보고 싶은데.”
“그럼 제 얼굴 보러 오신 건가요?”
네가정말좋아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두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벚꽃나비가 몸부림치는 것도 잊고 토하는 시늉을 했다.
【“쟤 왜 저래? 원래 사람을 얼굴만 보고 평가하는 인간인데.”】
“원래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그런 것도 다 소용없어지는 거야.”
【“나한테는 저렇게 가증스럽게 안 굴던데.”】
편애가 기막힌 꼴을 보며 투덜거렸다. 나는 친절하게 그동안 추측한 바를 말해 주었다.
“자색 눈이 내 거인 척하니까 쟤도 내 거인 척하나 보지.”
【“그건 말 되네.”】
편애는 그제야 납득했다. 네정좋은 열심히 대화하는 나와 편애를 보며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 본 동안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기셨나 봐요.”
속으로는 여전히 ‘오⋯⋯.’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누구랑 대화하는 중이었거든요.”
“누구랑요?”
“편애랑요.”
“편애라면 지금 길드 건물 안에 있어요. 제가 30분 전에 봤어요.”
말대꾸 잘하는 게 저번이랑 똑같다.
나는 여전히 사람을 화나게 하는 재주가 있다고 말해 주려다가 참았다.
벚꽃나비가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우릴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충 그런 게 있어요. 근데 지금 뭐 하고 계셨어요?”
“아.”
일단 일부터 해결하고 뭘 하든가 해야겠다. 나는 그와 관련된 주제를 슥 넘기고 물었다.
그러자 네정좋이 고개를 내려 벚꽃나비를 보았다. 벚꽃나비를 납치하려고 했던 사실을 지금 다시 깨달은 모양이다.
“길드원⋯⋯.”
“예?”
“길드장 님이 새 길드원을 데려오라고 하셔서요.”
네정좋이 말하자 벚꽃나비의 안색이 푸르죽죽해졌다.
나는 어이를 상실한 사람처럼 헛숨을 토해 냈다.
너희 길드는 길드원 구할 때 보통 납치하고 그러냐. 이게 21세기가 맞나? 20세기 아니야?
“안심하세요. 해코지하지 않아요.”
“이미 해코지하신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저는 충분히 잘해 주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잘해 주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거 아닐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라고 얘기해 줘야 하는 거 아닐까?
나는 말문이 턱 막혀 다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개소리를 지껄여 놓은 네정좋은 아주 평온하게 날 응시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여전히 ‘오⋯⋯.’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말했잖아. 쟤 미친 것 같다고.”】
그건 아는데 이번 건 예상 못 했다.
【“가끔가다 아주 심각한 게 한두 명씩 있지. 쟤만큼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남의 생각을 읽는 악마가 미친 것 같다고 말하려면 얼마나 정신 나간 상태여야 하는 걸까?
일단 내 기준에서 판단하는 건 좋지 않아 보인다. 냉큼 넘겨 버리자.
“예. 그렇군요.”
“네에.”
네정좋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착실하게 대답했다.
벚꽃나비를 질질 끌고 가는 일련의 행동이 납치 여러 번 해 본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럼 이만 가 봐도 될까요? 먼저 명령받은 일이 있어서요. 보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일 없으면 갈게요.”
“보통 일 제치고 온다고 하지 않아요?”
“어⋯⋯.”
나는 떠나려는 네정좋에게 돌발 질문을 던졌다.
벚꽃나비를 다른 공간에 반쯤 집어넣은 그가 ‘오⋯⋯.’에서 ‘음⋯⋯.’으로 생각을 바꿨다.
“제가 일 제치고 가 드렸으면 좋겠어요?”
끝없이 이어지는 ‘음⋯⋯.’의 바다에 한줄기 문장이 내리꽂혔다.
나는 여전히 순진무구한 네정좋의 얼굴을 보며 질색했다.
“아니요? 일 열심히 하세요.”
“그러실 줄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일 열심히 할게요.”
고개를 꾸벅 숙인 그가 벚꽃나비를 공간 저 너머로 휙 던졌다. 나는 벚꽃나비가 납치당하는 광경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면식도 있으니까 조금 도와줄까 했는데, 길드원 영입 때문에 가는 거면 상관없겠네. 나는 또 네정좋한테 찍혀서 남극 가는 건가 했지.
물론 벚꽃나비의 특성이라면 남극에서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간에 특성이 끊기지 않는다면 말이다.
거의 사막에서 바늘 찾기 같은 소리지. 남극에서 한국까지 특성 유지하면서 돌아오기.
생존 전문가도 그건 힘들겠다. 아무것도 없이 맨 몸인데.
나는 벚꽃나비의 뒤를 따라 공간을 넘는 네정좋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벚꽃나비의 생사도 확인했으니 이제 집에 갈 생각이었다.
낙원이라면 조금 수상하긴 해도 괜찮은 길드고, 길드원으로 영입하려는 거면 극야가 쓸모 있다고 판단한 거니까 어련히 잘 키워 주겠지!
또 극야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으니 그만한 복지가 또 어디 있겠는가. 나는 벚꽃나비의 앞날을 응원하며 골목길을 걸었다.
【“야, 잠깐만. 뒤! 뒤!!”】
범람하는 생각의 홍수 속에서 편애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날아들었다. 나는 편애의 말에 따라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아.”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게 손을 뻗고 있던 네정좋과 눈이 마주쳤다.
이거 뭔데. 지독하게 무거운 침묵이 우리 사이를 갈랐다. 네정좋은 조금 느리게 입술을 뗐다.
“안심하세요.”
“뭘 안심해.”
“해코지하지 않아요.”
나는 내 손을 향해 뻗어 오는 네정좋의 손을 잽싸게 피했다. 그러나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면.
“생각해 보니 전하를 모셔오라고 하셨던 것 같기도 하고.”
나랑 네정좋의 상성은 최악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결국 네정좋에게 잡혀 공간을 넘었다. 도망 못 가게 허리를 끌어안은 점이 진짜 악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