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숨이 턱 막혔다. 아⋯ 그렇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겠지. 그 사람 내가 죽였지만.
처음에는 이게 뭔 춘향전 같은 소리냐 하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로미오와 줄리엣 같이 로맨틱하다. 춘향전처럼 당대 현실 고증도 안 된 난장판까지는 아니라는 소리다.
그렇죠. 지금은 21세기. 우리는 모두 자유롭게 사랑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로미오와 줄리엣도 첫눈에 반해서 지지고 볶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나. 참 비눗방울과 마리 씨 같다. 물론 비눗방울이 마리 씨를 따라 죽으면 큰일 난다. 여러 의미에서.
한 짓이 있다 보니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진실을 알게 된 비눗방울의 반응이 한없이 궁금하다가도, 그랬다간 이제 수습할 수도 없는 개판이 될 걸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얌전히 술이나 마시고 있는 것이다. 얘야, 아몬드가 짜구나.
【“넌 애가 생각하는 게 왜 그러냐.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또라이 소리 듣는다.”】
편애는 오늘도 맞는 말을 했다. 처맞는 말.
“다가갈 용기가 없어서 바라만 봤지만⋯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상상 친구와의 말싸움도 하다 보면 적응이 된다. 나는 칩거하는 동안 표정 관리하는 법을 익혔다. 속으로는 소주를 뿜고 있어도 겉은 우아하게!
소주를 어떻게 해야 우아하게 마실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각설이처럼 마실 자신은 있다.
“그런데⋯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인천에 갔던 모양이에요. 그리고 실, 실⋯ 종을⋯.”
한 번 둑이 터지자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비눗방울은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사람처럼 끅끅대며 울었다. 나는 적당히 티슈를 찾아보다가 티슈 대신 물티슈를 찾았다.
눈물 닦으라고 물티슈를 줘도 되나.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나는 물티슈를 뽑아 비눗방울에게 건넸다. 비눗방울은 코를 훌쩍거리며 물티슈로 눈가를 문질렀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인천에서 실종된 거니까⋯ 아마⋯ 다른 사람들이랑 비슷하게 실종된 것 같아요. 그래서 같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동생이랑 얘기해 봤는데, 형이라면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말해서⋯⋯.”
비눗방울이 살짝 뭉개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비눗방울이 말하는 동생이 누군지 안 들어 봐도 비디오라고 생각했다.
【“하람?”】
맞아. 그 새끼지.
애초에 비눗방울 인맥 풀이 좁아서 동생 소리가 나오면 99.9%의 확률로 하람이다.
비눗방울이 우는 걸로 모자라 딸꾹질을 시작했다. 나는 딸꾹질하는 비눗방울의 찻잔에 소주를 가득 따라 주며 생각했다.
다음번에 하람을 보면 나무아미타불 소리부터 해야지.
하람이 독실한지는 알 수 없으나, 집안이 어느 쪽인지는 이름만 봐도 견적이 나왔다.
나는 반야심경 테크노 버전을 다운받기로 결심했다.
편애가 복수 스케일도 참 쪼잔하다며 쫑알거렸다. 너 종교 전쟁이 얼마나 심각한 건 줄 모르는구나. 이따 집에 가면 십자군 전쟁부터 찾아봐라.
“⋯그래서 염치없지만, 절⋯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범인을 잡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으니까, 범인을 찾는 것만이라도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흔들리던 비눗방울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또렷해졌다.
비눗방울은 토끼처럼 새빨간 눈으로 날 마주 보고 있었다.
【“도와줄 거야?”】
우리 둘 사이로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나는 슬그머니 끼어드는 편애의 목소리를 들으며 입을 열었다.
“범인이 누군지 아세요?”
“네. 아마 PK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지만요.”
잘 아네. 하긴 저번부터 PK로 추측하고 있다고 말했지.
그 쓰레기는 일을 왜 이따위로 벌려서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냐.
나는 PK를 내쳤을 때 내게 돌아오는 이득을 생각해 보았다.
사상 최악의 범죄자랑 교류하는 관계였다는 말은 떼 낼 수 있겠지. 하지만 직접적으로 이득 되는 건 없는데? 게다가 멀리 봤을 때 그건 손해다.
욕심 많은 엘프 공주 델리키아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엘프 로에닌.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서는 엘프 공주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PK에게는 ‘쟤도 사실은 불쌍한 애였어. ‘프레임을 씌우는 수밖에 없다.
아마 어렵지 않을 거다. 몇몇 배후좌들은 불공정 계약으로 계약자를 털어 먹고 있었으니까.
“사실 말이에요. 제가 저번 게이트에서 들은 게 있거든요.”
나는 착실하게 밑밥을 깔았다. 조만간 PK는 우연희 님 만만세를 외치며 한강 다리에서 다이빙하게 될 것이다.
“저번 게이트에서 비눗방울 님이 키메라를 물리치는 동안 엘프와 대화를 나눴어요. 그 과정에서 알게 된 게 있는데, 혼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눈가가 따끔거리는지 눈물을 콕콕 찍어 닦던 비눗방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이어 말했다.
“지금 엘프 종족의 우두머리는 엘프 공주인 델리키아라는 몬스터인데, 모종의 이유로 군단장직을 박탈당하고 동족과 함께 저번에 본 그 숲으로 쫓겨났다나 봐요.”
“엘프 공주요?”
비눗방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상하리만큼 과한 반응이었다.
“네. 그 공주는 저희 차원에서 힘을 얻어 군단장의 직급을 되찾을 생각인 거죠. 아마 실종 사건도 그와 관련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공주의 특성은⋯⋯.”
“갈취니까요.”
“어⋯ 네. 어떻게 아셨지.”
비눗방울은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델리키아의 특성을 말했다. 쟤는 델리키아를 본 적도 없을 텐데 어떻게 안 거지.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비눗방울을 보았다. 비눗방울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길드장 님한테 들은 적 있어요. 엘프 공주 델리키아는 그분의 원수거든요.”
“그럼 새벽 님한테 들으신 거죠? 그렇구나!”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다면 굳이 덧붙여 설명할 필요 없겠다. 반서준이 내 인생에 유일하게 도움 준 순간이었다.
“그 엘프는 공주가 우리 차원에서 계약자를 만들어 휘두르고 있고, 자신들도 공주에게 휘둘리고 있다고 말했어요. 지금 사람들이 실종되고 있는 건 그 공주가 특성을 이용해 힘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겠죠. 저희는 PK를 범인으로 상정하고 일을 해결하기 위해 힘쓰고 있지만,”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비눗방울을 마주 보았다. 비눗방울은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 끝에 있는 건 한낱 인간이 아니라 군단장급 몬스터일지도 몰라요.”
PK의 혐의를 최대한 묻어 버리고 델리키아를 부각시킨다. 남은 건 PK한테 연락을 취해서 피해자인 척하라고 상황 설명하는 것뿐인가.
나는 말을 마치고 찻잔에 담긴 술을 호로록 마셨다. 비눗방울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면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군단장급 몬스터를⋯⋯.”
물리쳐야겠지. 손가락테크닉은 이 일을 모르니까 손가락테크닉 없이.
물론 내가 손가락테크닉이기는 한데, 이번에는 정체 깔 생각 없음.
【“너 거짓말 잘한다.”】
입 안에 남은 아몬드 조각이 짜다 못해 썼다. 그럼 잘해야지. 내가 옛날에 밥 먹듯이 한 게 독서실 간다고 뻥치고 오락실 간 건데.
그때 오락실 매출 1위 안 하고 얌전히 공부했더라면 손가락테크닉이 아닐 수 있었을까.
후회는 깊고 알콜은 썼다.
* * *
‘말씀해 주신 건 같이 사건을 조사하는 동생이랑 얘기해 볼게요.’
비눗방울은 술 마시고 펑펑 울면서 감정 호소한 것치고 멀쩡해 보였다. 쟤 의외로 술이 세네. 그렇게 안 보이는데.
나는 비눗방울에게 알겠다고 대답하고 집에 돌아왔다. 오는 동안 PK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야 ◀[손가락테크닉]
내가 네 인생 구했음 ◀[손가락테크닉]
진상 다 알았으니까 꼴받게 하지 말고 보는 대로 연락해라 ◀[손가락테크닉]
휴대폰이 아니라 단말기로 보냈으니까 빨리 볼 거다. 내가 이렇게 하드 캐리 해 줬는데 빨리 봐야지.
오랜만에 외출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아직 맑고 화창한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여름 대체 언제 끝나냐.
절기상으로는 벌써 가을인데 다들 반팔을 입고 돌아다녔다. 분명히 사계절이 있는 나라인데 날씨만 보면 두 계절이었다. 긴 여름과 긴 겨울 사이에 있는 일주일짜리 봄과 가을.
【“그래도 너희 차원은 살기 좋은 편이지.”】
대체 어디가? 나는 사흘이면 방 안에 가득 쌓이는 먼지를 떠올리며 얼굴을 구겼다.
저번에 엄마 잔소리 때문에 이틀 연속으로 빗자루질을 해 봤는데, 먼지가 그렇게 많더라고.
‘엄마!! 나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바닥이 서걱거려!!’
‘네가 안 씻어서 그런가 보지! 좀 씻어!!’
내가 안 씻어서 그런 게 아니다. 그냥 이 동네가 먼지가 많아서 그렇다.
사람이 좀 안 씻는다고 방바닥까지 더러울 이유가 뭐가 있냐고. 나는 억울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 나오면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불편하면 자색 눈이랑 계약하라니까.”】
지금 나한테 귀신을 보라고 권유하는 거야? 기가 막히다 못해 숨이 넘어갔다.
남의 속마음을 엿듣는 건 도움 되는 곳이라도 있지, 귀신을 보는 건 대체 무슨 도움이 된다고.
나는 편애의 말을 무시하며 길을 걸었다. 편애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정확히는 귀신이 아니라 영혼을 보는 거야.”】
그게 그거잖아.
【“다르지. 걘 네가 원한다면 네 까마득한 조상님 영혼도 불러 줄 거야.”】
내 까마득한 조상님 귀신을 봐서 무슨 소용이 있다고. 내가 바둑 기사였다면 바둑 잘 두는 조상님을 불러 달라고 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헌터였다.
조상님 중에 바둑 잘 두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헌터 생활 베테랑은 없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조상님 귀신을 부르는 건 내 삶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냥 무섭기만 하다니까.
【“글쎄, 영혼은 귀신이 아니라니까.”】
조용히 해, 이 귀신보다 못한 악마야.
귀신은 무당한테 찾아가면 되는데 악마는 어디로 찾아가야 하는가.
교회나 성당에 찾아가기엔 이 악마는 출신이 다른 차원이었다.
‘오늘 저녁에 뭐 먹지.’
‘새 옷 사고 싶은데 사면 이번 달 잔고가 곤란한가?’
‘현장에서 퇴근한다고 문자 보내야겠다.’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뇌에 박히듯 생생하게 들리는 음성은 과거 녹색 눈의 사제들이 왜 인간 불신에 걸렸는지 알게 만들어 주었다.
영구적인 대처는 어렵더라도 임시방편으로 무언가를 해 놓는 게 좋지 않을까.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었다. 쏟아지는 생각의 홍수 속에 유독 걸리는 인물이 있었다.
‘아⋯⋯.’
대체 뭐 하는 인간인지 아까부터 ‘아⋯⋯.’ 소리밖에 안 하고 있었다.
세상에 저런 사람만 있으면 인간 불신에 걸릴 일은 없겠네. 나는 그 사람 얼굴이라도 보려고 고개를 휙 돌렸다.
횡단보도 옆 전봇대 근처에 삐죽 튀어나온 손가락 하나. 꿈틀거리며 움직이던 그것은 이내 손이 되어 허공에서 쑥 빠져나왔다.
아무것도 없던 장소에 손이 생기자 주변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거 유주하잖아?”】
편애도 비슷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저거 100% 네가정말좋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