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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89화 (89/175)

제89화

집을 나와서 대중교통을 타고 새벽 길드 기숙사까지 오는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나는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친구의 학원 시험 점수를 들으며 혀를 끌끌 찼다. 오늘 집에 가면 따끔한 맛을 볼 수 있겠구나. 그러게, 피시방 좀 덜 가지 그랬니.

나 때도 독서실 간다고 거짓말하고 오락실 갔는데,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나.

나는 우리 집에서 새벽 길드 근처까지 오며 수많은 tmi를 뇌에 박았다. 솔직히 미칠 것 같았다. 오면서 편애를 열두 번쯤 욕한 것 같다.

비눗방울을 만나러 10층까지 가는 길은 아주 험난하고 귀찮았다. 보안 운운하면서 확인하는 게 얼마나 많은지 얼굴 보기도 전에 집에 가고 싶었다.

어지간한 인간이 침입하면 본인 선에서 컷 될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나?

이런 말 하기 뭐 하지만 경비분들이 더 약해서 있으나 마나인 것 같다. 이런 돈지랄 좋지 않아요.

【“들어가면 기억부터 살필까?”】

“음, 글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편애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직접 손쓰지 않아도 저쪽에서 알아서 해 주는 점이 진짜 편했다. 특성 사용 전문 AI 그런 느낌.

【“말이 심한데.”】

심심하면 말도 걸어 준다.

남들이 보면 혼잣말 중얼거리면서 다니는 사람일 텐데, 완전 미친 사람 같네. 나만의 상상 친구가 갖고 싶으신가요? 지금 바로 배후좌와 계약해 보세요!

“꼬우면 계약 무르든가.”

【“싫어.”】

가계약을 깼을 때 대가를 지불하는 건 계약을 먼저 깬 쪽이다. 나는 그 점을 노려 편애에게 계약 파기를 권유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먹히지 않았다.

1층, 2층, 3층, 4층⋯.

엘리베이터는 금방 10층에 도착했다. 대략 일주일 만에 보는 10층 복도는 떠날 때와 바뀐 점이 없었다.

나는 잠시 멈춰서 나와 동고동락했던 1002호를 아련하게 쳐다봐 준 후 1001호의 벨을 눌렀다.

비눗방울은 금방 나왔다.

“⋯⋯안녕하세요.”

초췌한 게 아주 일주일 넘게 밤을 새운 인간 같았다.

【“지금 읽어?”】

비눗방울의 얼굴을 본 편애가 속닥거렸다. 나는 그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비눗방울의 뒤를 따랐다. 한 달 넘게 감시했으나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집이었다.

단출한 가구들과 청소가 잘 된 내부. 구조는 1002호와 비슷했으나, 집 안 모습은 좀 달랐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나는 고작 한 달 살았지만, 비눗방울은 여기서 오랫동안 살았을 테니까.

비눗방울은 기숙사에서 제공하는 청소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거로 아는데, 이렇게 깨끗하다니.

나는 귀여운 고양이 모양 발 매트나 아기자기한 컵 따위를 보며 생각했다. 우리 엄마가 바라는 자식상 아닌가. 청소 스스로 척척 잘하는 자식.

【“네 방은 쓰레기장이잖아.”】

나도 알아. 조용히 해.

외부 차원의 이름난 악마 새끼는 사람을 화나게 하는 재능이 있었다.

변명하건대, 안 치우는 게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는 것뿐이다.

“안주는 있는 거 대충 차렸는데⋯ 필요하시면 뭐라도 시킬까요?”

나는 비눗방울을 조르르 따라가 부엌 식탁에 도착했다. 식탁에는 소주 몇 병과 과자 몇 봉지, 그리고 견과류 통이 놓여 있었다.

손님 대접이 박한 것 같지만 초상집이니까 봐준다. 나는 의자를 빼서 앉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술이나 까죠.”

이후 소주 두 병을 비울 때까지 우리 사이엔 말이 없었다. 소주잔이 없어서 찻잔에 소주 부어 먹는 건 또 처음이다.

‘어디부터 말을 꺼내야 하지⋯ 왜 속였냐고 말하면 너무 갑작스럽나?’

그런 고민을 하는 비눗방울은 안주도 안 먹고 술만 처먹고 있었다. 저러다 속 버리지.

나는 아몬드를 와작와작 씹으며 잔을 비웠다.

참고로 나는 특성 때문에 안 취한다. 내게 소주는 그냥 더럽게 비싸고 더럽게 맛없는 음료수였다.

【“기억은 언제 읽어? 안 읽을 거면 나 딴 거 하러 간다?”】

아니. 슬슬 읽어 봐라.

이대로라면 딱히 건질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도망가려는 편애를 붙잡고 비눗방울의 기억을 뒤졌다.

【“어디부터 읽어?”】

시한부 드립 친 부분부터.

차 대신 소주가 담긴 찻잔에 내 얼굴이 비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내 머리에 정보를 때려 박는 감각이 느껴졌다. 와, 진짜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다.

‘네?’

비상계단을 타고 올라온 비눗방울이 처음으로 들은 목소리는 하람의 것이었다.

하람이 반문하는 목소리를 들은 비눗방울은 걸음을 잠깐 멈추고 이어지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제가 시한부라서요. 아마 몇 주 뒤면 그대로⋯.’

콰광!!

순수하게 마리 씨를 한 번 더 보러 가려던 비눗방울의 머리에 낙뢰가 떨어졌다.

시한부? 시한부라고?!

들고 있던 휴대폰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러나 비눗방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를 뛰쳐나갔다.

시한부라니, 시한부라니!!

악독한 길드장이 핑거킹 님이란 소리를 들어도 그렇게 충격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시한부라는 말은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한 남자의 순정을 그렇게 박살 내고야 만 것이었다.

【“쟤 진짜 웃기네. 저걸 믿어?”】

기억을 뜯어 온 편애가 기가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세상엔 그걸 믿는 사람이 있어.

조금 더 빨리 와서 마법 소녀 타령만 들었어도 저걸 믿진 않았을 텐데. 기막힌 타이밍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다음은 어떤 거?”】

송도 게이트에 들어간 이후로.

나와 비눗방울, 그리고 벚꽃나비만 살아서 돌아온 그 게이트는 소소한 화제가 되고 있었다.

특히 S급 헌터였으나 활동 내역이 전무했던 ‘우연’은 그 게이트의 최고 기여자로 이름을 알렸다.

미국 간 딸이 인천 쪽 게이트에서 나타나서 놀라셨죠?

나는 인천 공항에 내려서 여차저차하다가 그쪽으로 빠졌다고 변명했다.

이런 거에 관심 없는 엄마는 이런 걸 본인이 아닌 이모한테 들어야 되겠냐고 한동안 잔소리했다.

이모. 조만간 한 번 봅시다.

이모 아들 성적표 어디 있는지 제가 아주 잘 알고 있거든요.

아무튼 송도 게이트는 S급 두 명과 D급 하나만 살아 나온 게이트로 나름 주목받고 있었다.

막 빵! 하고 뜬 건 아닌데, 우연으로 실적 올려서 만족하는 중이다. 이 외계인이랑 조만간 종신 계약 맺어야 하는 것 빼고.

【“이상한 생각 그만하고 이거나 봐.”】

편애가 생각을 자르고 들어왔다. 나는 지끈지끈한 머리에 박힌 기억을 더듬었다.

던전 내부로 진입한 비눗방울은 다 깨진 글씨와 지옥 같은 환경을 보며 깨달았다.

이 게이트는 저번에 보았던 교만왕의 게이트와 비슷한 재질이라는 것을.

심지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비명이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눗방울은 컴컴한 내부에서 뭐든 찾기 위해 움직이게 된다.

‘어?’

그러다 만나게 된 게 벚꽃나비.

‘안녕하세요! 혹시 오시면서 다른 사람 보셨나요?’

‘⋯⋯아니요.’

‘제가 이 밑으로 가는 통로를 발견했는데, 저랑 여기서 다른 사람들 올 때까지 같이 기다리실래요?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모르는 데다 소수면 위험하잖아요!’

벚꽃나비는 밝고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밑에 뭐가 있을지 모르니 다른 사람을 기다려 단체로 들어가는 것은 그 상황에서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게이트 확산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으니까.

‘저는 먼저 갈게요.’

‘아⋯ 왜요?’

그러나 비눗방울은 다른 선택을 했다. 그는 찾아야 하는 사람이 있었고, 이 던전은 급이 낮은 던전이었다.

즉, 자신감이 과도하게 넘치셨다는 소리다.

‘⋯⋯게이트를 빨리 닫아야 할 이유가 있어서요.’

‘그, 그래도⋯⋯.’

‘찾아야 할 사람이 있어요. 약하면서 허세만 가득한 사람이라, 벌써 위험에 빠졌을 수도 있어요.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 줘야 해요. 시간이 없어요.’

비눗방울은 벚꽃나비의 만류를 뒤로하고 밑으로 내려갔다.

나와 벚꽃나비는 한 층만 내려가 무덤에 도착했지만, 비눗방울은 두 층을 내려가 던전 보스인 엘프를 만났다.

‘호오, 인간이 여기까지 내려올 줄이야. 신기하구나.’

엘프는 겁 없이 연구실에 침입한 인간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비눗방울도 엘프에 맞서 응전했다.

둘 중 하나가 근거리 딜러였다면 몇 차례의 공방 만에 승패가 갈렸겠지만, 안타깝게도 둘 다 원거리 딜러였다.

‘네 특성은 용언와 비슷한 종류인 게냐? 흥미롭구나. 연구할 가치가 있겠어.’

엘프는 비눗방울의 특성을 파악하곤 환영 마법을 걸어 그를 재웠다. 멘탈이 아슬아슬한 비눗방울은 환영 마법에 덜컥 걸렸고,

이후는 내가 아는 것과 같다.

【“내가 힘을 썼지.”】

편애가 자신의 공을 뽐내며 으쓱거렸다. 어휴, 그게 좋냐? 실컷 좋아해라. 유치하긴.

나랑 정말 지독하게 얽혔는데, 어떻게 이리 아무것도 모를 수가 있나.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는 잔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연거푸 술을 들이켠 비눗방울의 뺨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입 안에 남은 아몬드 조각이 알콜 당기게 짭짤하다. 비눗방울은 취기가 오르면 술을 다 비울 때까지 자작하는 타입인지 술 먹는 하마처럼 소주를 처먹고 있었다. 저러다가 급성 알콜 중독으로 응급실 가지.

“무슨 생각하시는 건지 알아요.”

나는 용기 없는 비눗방울을 배려해 먼저 입을 뗐다. 비눗방울이 고개를 들고 날 보았다.

“일부러 속인 건 아니고⋯ 얕보이기 싫었거든요. 그래서 나이도 올려 부르고, 성별도 남자인 것처럼 굴었어요. 잘 생각해 보시면 직접 남자라고 말한 적은 없거든요.”

계속 형이~ 형은~ 이 형아는 말이야~ 이랬을 뿐이다. 사실 형이라고 말한 순간부터 빼도 박도 못하게 거짓말하긴 한 건데.

근데 랜선에서는 진실만 말하는 인간이 극히 드물다.

예시로 게임 하다가 여자인 거 들키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여러 의미에서 게임 제대로 하기 힘들어진다.

커뮤니티도 여초가 아니면 남자인 척하는 게 묻어가기 편하다.

“실망하셨다면 죄송하네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따르실 줄은 몰라서요. 가볍게 스쳐 갈 인연일 줄 알았죠. 아무래도 저희가 첫 만남이 좋았던 건 아니잖아요?”

완전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던 과거가 구름처럼 뭉게뭉게 떠오른다.

나는 그런 생각을 애써 지우며 변명했다. 아, 그러니까요⋯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일이 여기까지 흘러오게 된 101가지 이유가 마구잡이로 튀어 나간다. 반쯤은 비눗방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개소리였는데, 비눗방울은 그걸 듣고도 반응 없이 잠잠하기만 했다.

나는 혼자 주절거리다가 분위기를 파악하고 입을 다물었다. 소주가 담긴 찻잔 위로 눈물 맺힌 비눗방울의 얼굴이 비쳤다.

비눗방울은 초췌한 얼굴 위로 눈물을 뚝뚝 떨구며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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