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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88화 (88/175)

제88화

일곱 눈의 악마와의 계약은 각각 패시브가 달려 있다.

먼 과거에는 계약자들이 사제로 활약했으므로 사제 전용 능력이었는데, 현대로 오며 ‘과연 악마와 계약해서 얻은 재능!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이다.

악마라고 불리는 것들은 계약자와의 격차가 몹시 크다. 그래서 그들의 계약자는 상하를 막론하고 단명했다.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얻은 죄는 크므로, 불행한 끝은 덤이었다.

【“내 건 그래도 괜찮은 패시브지. 생각만 들리잖아.”】

네가 사람 수십 명 생각 들어 봤냐. 머리통 깨질 것 같다.

【“난 이 차원에 있는 모든 생물의 생각을 듣고 살아.”】

죄송.

덤볐다가 괜히 사과만 하고 끝났다. 아무튼 이 패시브는 문제가 좀 있었다. 나는 남의 생각을 듣고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패시브는 주인공 전용 아니냐고.

【“그래도 자색 눈보다는 낫지.”】

걔는 또 왜.

【“걔랑 계약하면 망자가 보여. 귀신 좋아하면 어필해 보든가.”】

자색 눈의 악마가 극야라는 건 눈치가 있는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다.

어쩐지 사람이 좀 우중충하더라니. 얘, 너 그런 거 보고 사니? 그러니까 맨날 남극에 지은 비밀기지에 처박혀서 모략이나 꾸미고 있는 거 아니야.

얼굴이 화사하다고 다가 아니다.

우리 엄마가 말하기를, 남자는 얼굴과 인성이라고 했다. 돈은 내가 벌면 된다. 능력은 알 바 아니다.

【“결론은 나 정도면 양반이라는 거지. 사제 애들도 내가 준 특성 좋아했어. 사기당할 일 없잖아. 대신 인간 불신이 생기긴 했지만⋯⋯.”】

중요한 건 앞이 아니라 뒤 아니냐.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특성이 좋은 거냐고.

남의 생각을 읽고 다니는 매체 속 인물들의 사연이 머리를 꽉꽉 메운다. 남의 생각 함부로 읽고 다녔다간 인간 불신으로 모자라 중2병에 걸릴 것 같다.

나는 ‘남의 생각을 미리 읽고 모든 범죄를 막아 내는 멋진 나’를 망상하다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편애가 숨넘어갈 듯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중2병은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거지. 누구나 내가 천재라서 필즈상 받고 노벨상 받고 오스카상 받고 그래미상 받고 그런 생각하잖아. 더 나아가면 은행에서 차례 기다리다가 ‘만약 은행에 강도가 침입한다면⋯.’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평소에 이런 생각 하고 살아? 웃겨 죽겠네.”】

난 언제나 이런 생각을 하고 살지. 이 차원 모든 인간의 생각을 듣는다면서 왜 모름?

【“넌 반지 끼고 있어서 제외.”】

무슨 말만 하면 반지 때문에~ 같은 소리가 나온다. 이 반지는 정말로 절대 반지란 말인가.

노란 눈의 특급 아이템이 S급이라면 이 반지는 SSS급이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우리 계약 파기하자.”

배후 계약은 한 명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종신 계약이라지만, 우리가 한 건 가계약이었다.

그 급박한 상황에 가계약으로 고쳐 오라고 말하다니. 천잰가?

나는 26년 만에 발견한 내 천재성에 감탄했다. 얼마나 감탄할 거 없는 삶을 살았으면 이런 것 가지고 감탄한단 말인가. 외부 차원에 손해배상 청구합니다.

【“싫어.”】

물론 그 계약 파기 선언이 순순히 받아들여지는 일은 없었다. 편애는 드라마 채널 사수하는 엄마처럼 단호했다. 나는 단호박 따위의 개드립을 치려다가 말았다. 어차피 생각을 읽고 있을 테니 저쪽도 다 알 거라 상관없긴 하다.

“난 이렇게 살 수 없어. 길 가던 아저씨가 장롱 밑 졸업 앨범에 비상금 숨겨 놓은 사실까지 알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그 비상금을 꺼내서 아내분 몰래 코인을 해 보려는 사실도 알고 싶지 않았다. 이 패시브는 너무나도 많은 tmi를 강제 시청하게 한다.

【“그게 왜 싫은데? 쓸데없는 것도 듣긴 하겠지만, 도움 되는 점이 훨씬 클 텐데.”】

편애는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그렇긴 하지. 나도 이 특성이 앞길에 도움 될 거라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인간답게 사는 게 인간의 도리 아닐까.”

【“평범한 인간은 불 뿜고 낙뢰 떨구고 벽을 부수지 않아.”】

“그 점을 지적하면 할 말이 없긴 하지.”

근데 밖에 나갈 때마다 죽을 것 같은 두통을 달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방에 누워 있는 데도 엄마 생각 들리는 거 봐라. 내일 단수인가 보다.

아까 집에 오면서 느낀 건데, 이 특성은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약이 아닌 독으로 작용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을 때도 누가 말을 거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생각조차 모두 다 음성으로 들렸다.

게이트 안에서처럼 적은 숫자만 있으면 모를까, 사람 많은 대로변 같은 곳에서는 과부화로 머리가 뜨끈했다.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야.”】

남의 일이라고 막말하네.

나는 마리 씨 모습일 때처럼 침대 헤드에 머리를 박았다가 침대를 박살 냈다.

“우-연-희!!!”

진짜 개망했다.

* * *

이후는 칩거 생활의 연속이었다.

비눗방울은 그날 이후로 꾸준히 연락을 취해 왔는데, 그냥 씹었다.

[하람]▶ 말씀하신 대로 얘기해 놨어요.]

[하람]▶ 김마리 씨가 인천으로 갔다가 실종됐다고요.

하람은 적절한 시기에 적당한 도움을 줬다. 하람에게 메시지가 온 날부터 비눗방울이 보내는 연락이 끊겼다.

마리 씨를 좋아했으니 큰 충격을 받을 만도 하지.

나는 그동안 큰 도움이 되어 주었던, 그러나 어디 있는지는 모를 마리 씨를 향해 짧게나마 애도했다. 비눗방울이랑 그렇게 얽히다니. 세상은 참 아이러니해.

칩거 생활 동안엔 엄마의 많은 규탄이 있었다.

“이제 밖으로 안 나가? 며칠째 방에만 있는 거야?”

“내가 가서 깨닫고 온 게 있어. 지금 나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중이야.”

나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헛소리를 지껄였다.

헛소리는 의외로 잘 먹혔다. 남의 생각이 읽히는 것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내 몸무게를 앗아 갔기 때문이다. 이런 다이어트 싫은데. 나는 핼쑥한 얼굴을 보며 표정을 구겼다.

“야, 빨리 해결 방법 찾아와. 나보고 평생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라는 건 아니지?”

【“해결 방법이 없다니까 그러네.”】

“그럼 계약 해지해, 이 사기꾼아.”

【“싫어.”】

혼자서 방에 처박혀 혼잣말하는 시간은 내게 많은 깨달음을 안겨 줬다. 외계인과의 계약은 하등 도움 될 게 없다.

이 험악한 시기에 집 밖에도 못 나가게 만드는 계약이라니. 나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오라고 편애를 마구 쪼아 댔다. ‘없어’와 ‘싫어’ 두 가지로만 응답하던 편애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방법이 있긴 한데, 이건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말 안 했어.”】

“뭔데?”

【“다른 악마랑 계약해.”】

이게 방법을 가져오랬더니 약을 팔고 있어. 하나만으로도 엿같은데 이걸 추가하라고?

“안 되겠어. 우리 헤어지자.”

【“아니, 방법 말하라길래 말했잖아! 너 헤어지자는 말 좀 하지 마!”】

“그럼, 사람 생각 읽는 거로 모자라서 귀신까지 보라고? 장난해? 내가 그런 거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나 말하는 거야?”

【“자색 눈 말고 다른 눈이랑 하면 되잖아!!”】

편애가 억울하다는 듯이 빽 외쳤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팍팍 쳤다.

【“다른 눈이랑 계약하면 한 명의 특성만 골라 쓸 수 있을 거야. 내 건 꺼 놨다가 필요할 때만 켜면 되지.”】

아니… 부동산 계약도 신중한 마당에 종신 계약을 그렇게 맺어도 되는 건가. 그냥 가계약한 거 파기하는 게 낫지 않나?

【“계약을 무르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해.”】

“무슨 대가?”

【“빌려 쓴 특성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 것. 보통은 수명으로 지불하지.”】

수명을 아무리 비싸게 쳐준다 한들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존재했던 특성에 맞먹을 수 있겠는가.

결국 계약을 파기할 거면 죽으라는 소리였다. 뭐 이런 극단적인 사례가 다 있냐. 누리려면 살아서 누려야지, 죽어서 뭘 누릴 수 있다고.

【“아니지. 넌 살아 있을 때보다 죽어서 더 많이 누릴 수도 있어.”】

“죽어서 뭘 누려. 죽으면 죽는 거지.”

【“죽은 영혼은 자색 눈 쪽으로 굴러 들어가거든. 걔가 너 예뻐하잖아.”】

극야는 죽음 쪽이 전문 분야인 모양이다. 저런 말을 하는 거 보면.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죽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죽은 이후에도 극야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건 끔찍하기 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걔는 목표 망하면 회귀하는 놈인데, 내가 죽으면 이 세계에 남아 있겠냐?

물론 가장 처음의 약속이라는 걸 이루고 나면 남아 있겠지. 하지만 그게 뭔 줄 알고?

죽은 이후에 극야한테 예쁨 받는 세계든, 회귀자가 떠난 세계든 끔찍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계약은 살아 있을 때만 할 수 있으니까, 살아서는 걔랑 계약하지 말아야지.

잠깐의 고민 끝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조만간 패시브 괜찮고 성격도 고만고만한 악마를 찾으리라 결심했다. 그때 엘프 양반이 뭐라고 했었지? 노란 눈이 그나마 얌전하게 지냈다고 했나?

【“노란 눈이랑 계약하게? 그거 어려울 텐데.”】

고민 좀 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편애가 끼어들어 초를 쳤다. 네가 저번에 한 말대로라면 악마들도 나랑 계약하고 싶어 할 텐데, 그게 왜 어려워?

나는 속으로 말을 건네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편애는 살짝 까탈스러운 투로 대답했다.

【“노란 눈은 지금 억류된 상태야.”】

누구한테?

【“골드 용가리한테. 탐욕왕이 붙잡아 놓고 괴롭히는 중이지. 드래곤이란 죄다 탐욕스러운 족속들이거든.”】

그러니까 노란 눈이랑 계약하고 싶다면 탐욕왕이랑 맞짱 떠서 승리하라는 소리군. 이게 무슨 하드코어 난이도냐.

얌전하고 평화롭게 사는 게 이리 힘들다니. 힘을 얻은 주인공이 하찮았던 과거를 회상하며 그리워하는 장면은 괜히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부우웅-

나는 노란 눈이 당하고 있는 박해를 줄줄 늘어놓는 편애의 말을 무시하고 휴대폰을 무음으로 돌렸다.

▶ 형

낯익은 메시지였다. 나는 비눗방울이 보내는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은 채로 화면을 응시했다.

▶ 이제 형은 아니지만⋯

▶ 술 한잔할래요?

메시지는 굉장히 띄엄띄엄 왔다. 비눗방울은 아무래도 실종된 마리 씨의 일로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고작 몇 문장으로 제 속내를 이렇게 드러내는 걸 보면.

비눗방울이랑 술 먹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뒷정리는 해야 하지.

비눗방울이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선 넘게 알고 있으면 적당히 처리할 필요도 있고.

마침 생각도 들을 수 있고, 기억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번엔 가 보는 게 좋겠다.

주소 불러 ◀

나는 지갑을 챙겨 들며 메시지를 보냈다. 비눗방울이 날 부른 장소는 자기 집이었다. 정확히는 기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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