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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87화 (87/175)

제87화

너 대체 뭐 했길래 저 귀쟁이가 과민 반응하냐. 나는 침착하게 물었다.

【“별거 안 했어. 예전에 날 따르던 애들 후손을 찾아갔을 뿐이야.”】

후손한테 무슨 짓 했어. 순순히 불어.

【“몇 명만 가지고 놀았어. 근데 갓 태어난 애들은 정신이 약하거든. 금방 백치가 되더라. 그랬더니 녹색 눈의 악마가 저주를 내렸다느니 뭐라느니⋯⋯.”】

그냥 저주 내리는 것보다 더 악독한 짓을 했는데?

저주 내려서 백치가 된 거면 아무것도 모르기라도 하지, 저건 직접적인 위해를 가해서 백치로 만든 거잖아.

이래서 사람 말은 양쪽을 다 들어 봐야 한다. 물론 이건 양쪽을 다 들어서 한쪽 주장이 더 확고해진 타입이다.

“그 이후에도 악마와 계약한 자들은 꾸준히 나왔지. 그들은 단명했지만, 어느 분야든 한 획을 긋고 갔느니라.”

중세가 시작되며 인간이 사라지고, 근대가 시작되며 신이 사라졌지만, 악마는 꾸준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악마와 계약한 자들을 보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은 그들의 분야에 무시무시한 업적을 세웠지만, 언제나 단명했다. 천재는 단명한다는 이미지가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럼 그들의 마지막은 행복했는가? 아니. 그들은 끔찍하고 파멸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다른 사람의 기준에서 행복한 끝을 맞이해도, 회고록을 살펴보면 불행했노라고 적혀 있었다.

아주 먼 옛날에 신으로 추앙받았던 이들은 그렇게 악마의 이미지로 굳어져 갔다.

“인간의 시간은 덧없다고 들었지. 나는 네가 맞이할 결말이 궁금하구나. 너의 파멸이 부디 값진 것이기를 바란다.”

엘프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여섯 개던 키메라가 어느덧 한 개만 남아 있었다.

다시 키메라를 일으키면 되는 상황임에도, 엘프는 키메라를 다시 일으키지 않았다. 나는 엘프를 보며 물었다.

“왜 저항하지 않지?”

“음?”

“당신의 모습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처럼 보이는데.”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없다고 단언하던 처음의 모습은 어디 갔는가. 엘프는 내 질문을 듣자마자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왜 웃어. 저게 미쳤나.”

【“눈 노란 애들은 좀 미친 감이 있어.”】

편애가 불쑥 끼어들어 속삭였다. 엘프는 웃겨서 미치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가 날 죽여 봤자 내가 진짜로 죽겠느냐? 뼈만 아플 뿐이지.”

“사는 건 포기했고? 언제는 날 죽이겠다면서.”

“너는 녹색 눈의 계약자인데, 내가 어찌 이길 수 있을까. 아마 내 본신의 힘을 끌어와도 무리일 게다. 그리고 네가 가진 검, 다른 왕의 군단장이 가졌던 것 아니더냐?”

“그걸 어떻게 알아?”

“다 아는 수가 있느니라.”

엘프의 입꼬리에 걸린 미소가 기막히게 재수 없었다. 나는 얼굴을 팍 찡그리고 엘프를 보았다. 엘프가 제 외알 안경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만약 네가 달이 두 개 뜨는 날까지 생존한다면, 내 안경을 들고 연금 탑으로 찾아오거라.”

“내가 왜?”

“엘프 로에닌을 찾아왔다 이르면 안내해 줄 것이다. 네 덕에 강화 탑 부서지는 꼴을 재미있게 봤구나.”

말을 마친 엘프가 가만히 서서 날 응시했다. 그러자 편애가 은근하게 속삭여 왔다.

【“죽일까?”】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엘프의 얼굴이 흔들림 한 점 없이 고요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평온함이었다.

나는 그를 죽이기 전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았다.

“뭐 하느냐. 어서 죽이지 않고.”

이상하게도 생각 한 점 들리지 않았다. 저쪽에서 키메라를 상대하는 비눗방울이나 얌전히 구석에 박혀 있는 벚꽃나비의 생각은 잘 들리는 걸로 보아 고장 난 것은 아니었다.

그래. 이건 진짜 죽음이 아니니 태연한 것은 이상하지 않지.

나는 고개를 돌려 비눗방울과 키메라의 싸움을 보았다. 막 비눗방울의 소환수가 키메라의 머리와 함께 폭발한 참이었다.

【“죽일 거지?”】

편애가 재차 물었다. 상황이 모두 정리된 거라면 이곳을 나갈 타이밍을 미룰 이유는 없다.

나는 얌전히 서 있는 엘프에게 다가가 그의 목에 손을 올렸다. 엘프는 유하게 웃으며 마지막 말을 속삭였다.

뚜두둑.

나는 마지막 말을 듣자마자 엘프의 목을 꺾었다.

목이 꺾인 몸이 뒤로 추락하더니 소지품 하나만을 남긴 채로 사라져 간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흩어진 몸뚱이 사이에 놓인 외알 안경을 집어 들었다.

‘공주를 죽일 거라면 조금 더 기다리는 게 좋을 게다.’

그는 왜 그런 말을 남겼을까?

* * *

게이트는 제한 시간 내에 무사히 닫혔다. 엘프 로에닌이 남기고 간 영혼석은 그의 눈 색깔과 같은 호박색이었다.

한바탕 일을 벌이고 나니 처리할 일이 산더미다. 편애랑 얘기도 해 봐야 하고, 비눗방울에게 변명도 해야 하고, 하람이랑 나눌 얘기도 있고.

근데 다른 것들보다 이게 먼저지. 나는 꼬리를 말고 도망치려는 벚꽃나비를 잡아다가 S1팀 사무실에 배송했다.

오랜만에 사무실 의자에 앉은 날강도가 일을 한 건 더 물고 온 날 보며 소리를 빽 질렀다.

팀원들 들을까 봐 핑거킹 소리도 못 하는 거 봐. 웃겨 죽겠다, 진짜.

“저기, 이거 진짜 써야 해요⋯⋯?”

“예. 쓰셔야 합니다. 안 쓰시면 여행 가시게 될 거예요.”

“여행이요? 어디로?”

“지하로요.”

벚꽃나비는 날강도의 협박 아닌 협박에 얌전히 각서를 썼다.

나는 그 과정에서 벚꽃나비의 특성과 삐약이에 대해 듣게 되었다.

D+급 헌터인 벚꽃나비가 가진 특성은 동화(同化).

가볍게 말하면 어디서든 몸을 숨길 수 있는 특성이다. 카멜레온 같은 거지. 투명화 특성이랑 다른 건 환경에 맞춰 변하는 것이기에 물속에서 써도 호흡이 가능하고, 우주에 나가도 특성이 유지되는 동안은 살아 있을 수 있다 정도.

그리고 그녀의 펫 삐약이는 그냥 삐약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특성을 가진 동물인데, 종종 그런 동물을 사육해 펫으로 분양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어리지만 다 자라면 입에서 불을 뿜는 불닭이 될 거라고.

입에서 불 뿜는 병아리나 입에서 불 뿜는 닭이나 그게 그거지.

나는 열성적으로 삐약이 자랑을 하는 벚꽃나비에게 시큰둥한 얼굴로 응해 주었다.

‘와, 성의 진짜 없다.’

네 생각 다 들린다. 앞에서 욕하지 마라, 이 친구야.

“근데 걔는 왜 비눗방울 님 뺨을 쪼고 있었던 건데요?”

별거 아닌데 생각나서 질문해 봤다. 병아리 주제에 얼마나 날랜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머리에 올라가 있던데.

“아, 그건요….”

벚꽃나비가 삐약이를 머리에 올린 채로 눈을 굴렸다.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모습에서 망설임이 묻어났다.

“사실 저희 애가 사람 머리를 좋아해요.”

“예?”

“그래서 비눗방울 님 머리에 올라가려고 비눗방울 님 뺨을 쪼고 있었던 거죠.”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벚꽃나비는 동화를 켜고 정신없이 도망가다가, 삐약이를 놓친 걸 깨닫고 돌아왔다.

주인을 잃은 삐약이는 삐약삐약 울다가 근처에서 인간을 발견한다. 그게 바로 비눗방울이었던 것이다.

“비눗방울 님이 그때 누워 계셨잖아요? 그걸 깨워서 일으켜 세운 다음 그 위에 올라타려고 한 거죠.”

“그럼 제 머리 위에 올라탄 이유도…?”

“똑바로 서 있는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옮겨 탄 겁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삐약이를 바라보자 양 날개를 파닥거린다.

저거 털색이 노란색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진짜 날티 나는 짐승이네.

벚꽃나비와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나는 벚꽃나비의 번호를 따고 그녀를 집에 돌려보냈다.

“정체를 숨기겠다면서 매번 이게 뭐야. 힘숨찐 하고 싶으면 얌전히 좀 살아.”

“쉬른뎁. 연희는 자유로운 집요정이에요! 마음 내키는 대로 살 거예요!”

“야!!!”

날강도의 함성이 사무실로 모자라 건물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함성이 아니라 고함이 맞긴 한데, 함성 쪽이 더 좋으니까 그렇게 표현하겠다.

【“그러니까 매번 고함을 듣지.”】

외계인의 말은 맞든 안 맞든 무시한다. 나는 종족 차별주의자니까.

【“야!!!”】

어디서 개가 짖나. 날씨가 참 화창했다.

엄마 딸 집으로 귀환 ◀

저녁으로 돼지고기 듬뿍 넣은 김치찌개에 계란 프라이 두 개 희망함 ◀

사건의 전말을 알았으니 계속 김마리 씨 흉내를 낼 필요가 없다.

나는 S1팀 사무실을 나오며 엄마한테 문자를 보냈다. 하람이 변명을 잘해 줬으려나.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걸음을 빨리 놀렸다. 사람이 많은 거리를 걷고 있으면 온갖 생각이 머리를 꽉 채운다.

녹색 눈의 마법사들은 이런 게 뭐가 좋다고 이런 경지를 희망했을까.

나는 전례 없는 셀프 고문을 당하는 중이었다.

어딜 가나 다른 사람의 생각이 들리는 삶. 이거 맞아? 이거 맞는 삶 맞아?

편애와 가계약한 건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비눗방울을 깨워야 했고, 그 상황을 돌파할 힘이 필요했다.

게이트에서 주워 온 외알 안경은 아공간에 쑤셔 넣어 놨다. 편애는 그 외알 안경을 보며 말했다.

【“이건 노란 눈이 만든 다섯 개의 특급 아이템 중 하나야.”】

특급 아이템?

【“네가 낀 반지와 똑같은 거지. 노란 눈은 무언가를 만드는 데 재능이 있었거든.”】

노란 눈의 악마는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며 수많은 아이템을 만들었다.

그중 특급으로 분류된 아이템은 단 다섯 개. 내가 PK에게 넘겨받은 반지와 이번에 줍게 된 외알 안경.

그 귀한 아이템 다섯 개 중 두 개가 엘프에게 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엘프는 지금 몰락한 종족일 텐데.

공주를 죽이기 위해서는 기다려야 한다. 나는 외알 안경의 주인이 남긴 조언을 곱씹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그 엘프는 내게 무엇을 바라고 그런 말을 한 걸까. 엘프 공주를 죽이기를 바라나?

종족 내 분쟁이야 인간 사회에서도 늘 보이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공주를 죽이는 방법도 있을 텐데, 왜 나보고 그런 말을 했을까.

【“별거 없어. 그냥 엘프는 하이엘프를 해칠 수 없거든.”】

내 의문을 가만히 듣고 있던 편애가 불쑥 끼어들어 대답했다. 하이엘프면 엘프보다 더 고귀한⋯ 뭐 그런 거 아니냐.

【“하이엘프가 그냥 엘프보다 조금 더 뛰어나지. 특성도 갖추고 태어나고.”】

해칠 수 없다는 건?

【“그들 사이의 맹약이야. 백성은 왕족을 해할 수 없다. 천한 자는 고귀한 핏줄에 닿을 수 없다.”】

좋아. 모든 의문은 풀렸다.

내가 배후 계약을 한 건가, 아니면 이차원 백과사전을 들인 건가.

남의 생각을 읽게 해 주는 쓸데없는 효과를 가진 백과사전이 생겼다. 가계약이라고 해서 덜컥 맺긴 했는데, 적당히 우리 계약을 조정할 필요가 있겠다.

나는 기웃기웃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거리를 걸었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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