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녹색 눈의 악마가 관장하는 것은 자아와 무의식이다.
그의 첫 계약자는 그가 생물의 정신에 파고드는 것을 마나를 이용해 흉내 냈고, 그것은 현대에 이르러 환영 마법으로 발전했다.
마법의 일곱 계열 중 네 번째가 상징하는 것은 녹색 눈.
녹색 눈의 마법사들은 정교한 환영을 펼쳐 내는 것을 넘어 한 개체의 정신을 완전히 파헤치는 것을 원했다.
그들이 꿈꾸는 궁극의 마법은 ‘사람의 생각과 기억을 읽는 것.’
‘저건⋯ 범상치 않구나.’
이건 귀쟁이의 생각.
‘이 사람이 진짜로⋯ 형이라고?’
이건 비눗방울의 생각.
‘뭐야? 저게 뭐야? 배후좌?’
이건 여기 어딘가에 있을 벚꽃나비의 생각.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생각이 들렸다.
녹색 눈의 마법사들이 바라는 궁극의 경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경지였지만, 쉽게 손에 넣어서 그런지 뿌듯함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 정도 위압감이면 왕의 행차인가? 잠깐 멈추는 것이 좋겠다.’
‘근데 왜 여자지? 설마 이번에도 속은 건가? 그럼 던전에 용병 뛰러 간다는 것도 거짓말이었나? 여기 있으니까 아닌가?’
‘칼⋯ 저 칼 꺼낼 때부터 손가락테크닉이 아닌가 싶었는데, 저 인공 몬스터를 뻥뻥 차서 부순 거 보면 핑거킹 맞겠지? 근데 핑거킹이 여길 왜 와? 돈도 많이 벌면서 장난감 선글라스 쓰고 다니는 이유가 뭔데?’
힘이 필요해서 맺은 계약인데, 정도가 과해서 조금 토할 것 같다.
나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노력하며 고개를 들었다. 마구 흩어지는 세 사람의 속마음 사이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바라는 대로 비눗방울을 깨웠으니 만족해?”】
이게 만족하느냐 안 하느냐로 끝날 일인가. 알고 싶었던 적 없는 비눗방울의 과거까지 봤는데.
【“그건 트라우마를 자극한다고 쟤가 쓸데없는 짓을 해 놔서 그렇지. 나는 충분히 신사적으로 깨워 줬어.”】
하긴 편애와 가계약한 덕에 비눗방울을 깨울 수 있었다.
나는 내 머리 위에 올라탄 병아리를 휙 집어던졌다. 삐약하고 운 병아리가 허공에 톡 하고 안착하더니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악!!”
병아리가 모습을 감춘 데는 이유가 있겠지.
나는 조금 전까지 병아리가 있었던 곳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손끝에 머리카락이 걸리며 비명 소리가 났다.
“잘못했어요! 이거 놔 주세요!!”
조금 전까지 모습을 감췄던 벚꽃나비였다.
병아리를 꼭 끌어안은 벚꽃나비는 시퍼런 안색으로 파들파들 떨었다. 나는 벚꽃나비에게 닿았을 때 잠깐 투명해졌던 손끝을 보았다.
‘죽이는 거 아니야? 감히 혼자 튀었다고 죽이는 건 아니겠지? 일단 무릎 꿇고 빌자. 잽싸게 빌면 봐주지 않을까?’
여전히 벚꽃나비의 생각이 들렸다. 나는 몸을 숙이는 그녀를 제지하고 비눗방울을 흘끗 보았다. 비눗방울은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방금 무엇을 한 게냐?”
키메라를 멈춘 귀쟁이가 날아다니는 프라가라흐를 쳐내며 물었다.
나는 프라가라흐를 불러내 아공간에 넣어 버렸다.
상징성이 너무 큰 검이라서 비눗방울마저 눈치채기 전에 넣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계약했어.”
계약이라는 말에 귀쟁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속마음이 훤히 들리는 것도 모르고 면전에서 욕을 하는구나. 나는 목덜미를 긁으며 고개를 휙 돌렸다. 빨리 집에 가서 발 뻗고 눕고 싶었다.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 필요가 있어? 빨리 해치우고 나가자.”】
편애가 상황 파악도 못 하고 끼어들었다. 지금까지 이러고 있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지. 씁. 조용히 해.
【“내가 애냐?”】
계약하자고 징징거리는 외계인이랑 인간 어린애랑 얼마나 큰 차이가 있다고. 나는 편애의 말을 무시하고 비눗방울에게 눈짓했다. 난 귀쟁이를 맡을 테니 넌 저 키메라를 맡아라.
비눗방울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지금 상황이 물불 가릴 처지인가.
당장 눈앞에 키메라 여섯 개가 있으면 뭐라도 해야지.
‘간계를 꾸미고 있는 건가? 일단 떨어뜨려 놔야겠구나.’
엘프가 생각함과 동시에 키메라가 기동하기 시작했다. 병아리를 꽉 끌어안은 벚꽃나비가 저 멀리로 후다닥 도망갔다. 비눗방울은 평소 싸우던 대로 까마귀 소환수를 불러내 키메라와 맞섰다.
“피하지 말고 답해라. 너는 무엇과 계약한 것이지?”
남은 건 귀쟁이뿐이었다. 나는 내게 질문하는 귀쟁이에게 친절하게 답해 주었다.
“녹색 눈의 악마.”
“⋯⋯뭐라고?!”
귀쟁이가 화들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이상하리만큼 과민한 반응이었다. 내가 보아 온 왕들은 이렇게 과민 반응하진 않았는데.
무슨 눈의 악마라는 것들이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안다. 탐욕왕은 그들을 개념에 가까운 존재라고 말했고, 편애 스스로도 자신과 계약해 멀쩡할 생물은 없다고 말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것부터 일반적인 생물로 취급할 수 없었다. 남의 생각을 읽고, 기억을 읽고, 일방적으로 마법을 깰 수 있는 존재.
그런 게 일곱 개나 달려 있다니. 내 인생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시궁창?
이쯤 되면 지구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내 인생부터 걱정해야 했다.
아니, 그⋯ 내가 일단 살아야 지구를 지키든 말든 하지 않겠는가.
그런 것들이 따라다니고 있구나~ 할 때면 모를까, 그런 거랑 가계약까지 한 지금은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나는 대화가 가능한 외계의 존재로부터 이 이상한 악마 놈들의 정보를 캐고자 했다.
‘녹색 눈의 악마라니⋯ 그들이 드디어 움직였는가.’
그리고 이건 아주 나이스한 생각인 듯했다.
【“그런 걸 왜 캐? 직접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야?”】
불만을 표하는 외계인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남한테 듣는 것과 본인한테 듣는 게 같나. 원래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땐 보너스를 후하게 주기 마련이다.
편향된 시각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에게 이야기를 들어 봐야 했다.
“나는 녹색 눈의 악마를 잘 몰라. 그쪽이 그렇게 반응하는 이유도 모르고.”
“너는 인간이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그렇기에 녹색 눈의 악마와 계약한 것이겠지. 가엾은 것.”
엘프가 딱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어찌하여 녹색 눈과⋯ 아니지. 자색 눈이나 감색 눈이 아닌 것이 다행인가. 흥미롭기 짝이 없구나.’
속마음은 더 딱하게 보는 것 같았다. 편애는 저 엘프가 이상한 거라고 반론했으나, 믿기진 않았다. 보통 이렇게 의견이 갈릴 때는 남이 판단한 게 맞는 말이다.
“녹색 눈의 악마를 알아?”
나는 엘프의 호박색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엘프는 순순히 답해 주었다.
“알다마다. 그것은⋯⋯.”
* * *
외부 차원의 주민들은 두 가지의 힘을 썼다.
하나는 태어날 때 얻는 능력, 특성.
다른 하나는 수련을 반복해 성취를 이루는 능력, 마법.
개중 특성은 타고난 자만이 쓸 수 있는 힘으로, 정형화되지 않은 힘이었다.
외부 차원에서는 이 특성만을 사용하는 사람을 특성사라고 불렀다.
반대로 마법은 타고난 자만이 쓸 수 있는 특성과 다르게 모두가 같은 시작점에서 배워 나가야 하는 힘이었다.
즉, 특성은 선천적인 것이고 마법은 후천적인 것이다.
물론 마법도 타고난 재능이 끼치는 영향이 적잖게 있었다.
뛰어난 두뇌, 풍부한 상상력, 학문에 깊게 파고들 집중력, 노력을 멈추지 않을 끈기 등 마법도 제법 많은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누구나 시작은 같다는 점이 마법의 공평함이지 않을까. 엘프는 그리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마법은 모두에게 공평하고 대중적인 힘이지만, 태초부터 있었던 힘이 아니다.
과거에 신으로 추앙받았던 일곱 존재의 특성을 마나로 흉내 낸 모조품. 그것이 바로 마법이었다.
따라서 마법은 특성과 달리 매우 체계적이고 정형화된 힘이다.
“이 정도 말했으면 감이 오느냐?”
“오고말고. 녹색 눈의 악마가 그 신으로 추앙받았던 일곱 존재 중 하나라는 거잖아.”
“그러하다.”
기적은 보통 상식에서 벗어난 힘을 뜻한다.
놀라울 만큼 강대한 특성을 가져 신으로 군림하던 일곱 존재의 힘을 다른 사람들도 쓸 수 있게 된 순간부터, 그들은 이제 신이 아니었다.
신을 따르던 사제들은 이제 은총을 부르짖지 않았다. 그들은 일곱 학파를 세운 최초의 마법사가 되었다.
신대가 닫히고 고대가 열린 것이다.
“별로 이상할 게 없는데.”
“더 들어 보거라.”
한국사도 이렇게 열심히 듣지 않았는데, 남의 차원 역사를 열심히 들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나는 간질거리는 입을 꾹 닫고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시간은 고대로 넘어간다.
“마나가 비교적 풍부했던 고대에는 수많은 강자가 등장했지. 그들은 대륙을 72개로 갈라 가졌고, 우리는 그들을 영주라고 칭했다.”
72명의 영주. 익히 아는 이야기였다.
신을 섬기는 풍습이 남아 있던 그때는 영주들을 신처럼 모셨다. 그들은 신이나 영주로 불렸고, 우리는 오늘날에도 그들을 고대 신이나 옛 영주라고 칭한다.
옛 영주들 중에는 자비로운 자도 있었고, 악랄한 자도 있었다. 대륙의 정세는 하루하루 바뀌었다. 고대는 완전 춘추전국시대였다.
그리고 고대가 끝나고 중세로 넘어간 것은 그들이 한 인간에 의해 몰락하고 난 후다.
“옛 영주들의 몰락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그들 또한 개입되어 있었지. 옛날에 신이라고 불렸던 일곱 존재는 옛 영주들을 모조리 봉인했고, 세계는 전환기를 맞이했다.”
그래. 그들이 악마라고 불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인간을 도와 수많은 주민을 학살하고 영주들을 봉인한 시점부터.
옛 영주들이 사라지며 시작된 중세는 암흑기였다. 영주들이 가지고 있던 마법에 관한 자료들은 모조리 소실되었고, 신을 섬기는 이단은 늘어났다.
정치에서 한발 물러나 있던 일곱 학파는 일곱 악마의 시선을 피해 마법을 발전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동안 일곱 악마들은 내키는 대로 살았다. 붉은 눈이나 녹색 눈, 그리고 감색 눈의 악마처럼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이 있었고, 주홍 눈이나 푸른 눈처럼 자신의 특성을 흉내 내는 자들을 학살하고 다니는 자들도 있었다.
반면에 노란 눈이나 자색 눈처럼 어딘가에 처박혀 코빼기도 안 보이는 악마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각자 어떤 행보를 보이든,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그들이 주인으로 섬겼던 것은 오직 하나, 우리 세계에 다녀갔던 인간뿐이며.”
【“뿐이며?”】
“그들이 주인을 찾게 되는 때, 세상이 다시 한번 혼란기에 접어들 것이다.”
엘프의 호박색 눈이 우려를 담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의 뜻은 명확했다.
【“주인이 집 나가서 개들이 목줄 풀고 날뛰었는데, 주인이 돌아오면 다시 주인 말 잘 듣는 똥개로 돌아갈 거다.”】
그렇게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웃기는 악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