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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85화 (85/175)

제85화

가끔가다 그런 생각을 한다.

게이트에서 만나는 외계인들은 왜 다 저런 말투를 쓰는가?

일부러 있는 척 말해서 사람을 화나게 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들이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지배 계급의 일원이라는 걸 어필하는 걸까.

막돼먹은 프롤레타리아의 피가 끓어올랐다. 결국 쟤들이 우리 차원 넘어오는 것도 권력자들의 땅따먹기 싸움 문제 아닌가.

조만간 만국의 헌터들에게 단결하자고 선언문이라도 읊어야 할 판이다. 얼마 안 가서 정말로 그렇게 되겠지만.

나는 바닥을 울리며 다가오는 키메라를 바라봤다. 아까 남의 힘을 과도하게 빌린 탓에 감각에 문제가 살짝 생겼지만 나름 살만했다.

재빠르게 아공간을 열고 검을 꺼낸다. 다른 키메라의 위치를 확인하고 몸을 움직인다.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콰광-!!

갑자기 하늘에서 뼈 같은 물건이 떨어지더니 곧 폭발한다. 나는 고개를 들어 엘프가 있는 쪽을 보았다. 그는 웃는 얼굴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이 싸우고 있는데 비겁하게 중간에 기습을… 할 수도 있긴 하지. 이게 무슨 파워레인저 변신하는 거 기다려 주는 악당도 아니고.

나는 순간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다가 정신을 차렸다.

쾅! 쾅! 쾅!

폭발물이 반복해서 떨어지며 시야를 가렸다. 저 귀쟁이가 진짜. 나는 달려드는 키메라를 대검으로 세게 내려쳐 박살 냈다. 박살 난 키메라는 훼손된 일부를 스스로 복구하는 기행을 보여 줬다.

저 귀쟁이가 만든 키메라의 중추는 머리. 머리를 훼손하면 마법이 풀려 기능을 잃게 된다.

나는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키메라의 머리에 접근했다.

쾅-!!

어김없이 지원 사격이 등장해 기회를 속수무책으로 날려 버렸다.

“재미있는 재롱을 부리는구나.”

사람을 열받게 하는 데 재능 있는 귀쟁이가 조롱하듯이 말했다. 뭐든 제대로 해 보려면 저것부터 처리해야겠는데? 나는 손에 쥔 대검을 다른 모습으로 변형했다.

교만왕의 군단장이 떨군 검은 특별한 기능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검의 모습을 바꾸는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지정한 적을 죽일 때까지 추적해 공격하는 기능이다.

이 검의 기능을 알게 된 협회에서는 검에 프라가라흐라는 이름을 붙였다. 나는 이 검을 보통 대검의 모습으로 바꿔서 썼다. 검술 같은 건 모르고 힘은 있으니 박살 내는 쪽이 편했기 때문이다.

자동 공격 기능이 있는 좋은 물건이지만, 그 기능을 쓴 적은 거의 없다. 그걸 쓰면 나는 다른 무기를 쥐어야 하는데, 내 힘을 버티는 무기가 이것 말곤 없었기 때문이다.

즉, 검에 딸린 기능을 사용하는 순간 맨손 격투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계속 견제용 폭탄을 처맞고 있느니 맨손 격투가 훨씬 낫지 않을까.

나는 프라가라흐를 날 있는 칼로 바꾸고 귀쟁이를 향해 던졌다. 오랜만에 스스로 움직이게 된 검이 목표를 죽이기 위해 날뛰었다.

“이건⋯⋯!”

당황한 귀쟁이가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꼴이 보였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뒤로 빠졌다. 기괴한 모양새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들이 보였다. 이제 남은 건 키메라뿐이다.

쾅-!!

얄팍한 몸체를 가진 키메라의 거대한 주먹이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에 내리꽂혔다. 묵직한 한 방이다. 맞으면 조금 곤란할 듯싶었다.

옆에서는 칼날 같은 비늘을 가진 키메라가 몸을 마구잡이로 들이밀었다. 스치면 좀 아프겠는데. 나는 반대 방향으로 뛰어올라 다른 키메라의 어깨에 섰다.

거인의 몸통에 개의 머리를 단 키메라가 팔을 움직였다. 나는 팔꿈치로 키메라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쿵! 불쾌한 체액이 튐과 동시에 키메라가 실이 풀린 것처럼 쓰러졌다.

하나, 둘, 셋, 넷. 키메라는 아직도 네 개나 남아 있었고, 귀쟁이는 슬슬 여유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아까보다 빈도가 줄었지만 지원 사격은 계속해서 종종 날아온다. 나는 똑같은 방법으로 키메라 한 개를 더 처리하고 비눗방울이 있는 자리를 보았다.

쓰러진 비눗방울 곁에 노란 병아리가 올라타 있는 게 보였다. 벚꽃나비의 삐약이와 똑같이 생긴 그것은 비눗방울의 뺨을 콕콕 쪼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비눗방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왜지? 일주일 밤 새워도 이런 난장판에서는 벌떡 일어나겠다.

나는 쏟아지는 공격을 피해 움직이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내 환영 마법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드문데 말이다.’

저 귀쟁이가 환영 마법 소리를 하지 않았나. 나는 고개를 휙 들어 귀쟁이를 보았다. 동시에 키메라의 거대한 주먹이 내 몸통을 세게 후려갈겼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나는 그대로 벽에 쾅 소리를 내며 처박혔다. 죽을 만큼 아픈 건 아닌데, 오랜만에 맞아 보니까 신선하기 짝이 없었다. 날 때릴 수 있는 건 우리 엄마뿐인데 말이야.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나는 동안 키메라 세 개가 아웅다웅 달려오는 게 보였다.

비눗방울을 깨워 전투에 참여시키면 좋겠지만 환영 마법에 걸려 누워 있는 상태.

저 삐약이를 보니 벚꽃나비는 사라진 게 아니라 모습을 감춘 상태인 것 같고.

엿같은 귀쟁이는 하늘 위에서 검을 쳐 내며 날 내려다보고 있다. 저 뒤에서 키메라 세 개가 추가로 만들어지는 게 보였다.

하긴 무생물이 혼자 상대해 봤자 얼마나 길게 시간을 끌겠는가. 프라가라흐의 진면목은 주인과 같이 2대 1로 싸울 때나 나오지.

키메라를 박살 내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남의 힘을 빌리는 권능을 쓰긴 좀 어렵겠지만, 저건 나 혼자서도 어떻게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수가 끝이 없다면? 저 귀쟁이가 끝없이 키메라를 일으킨다면?

물론 그런 일은 없다. 살아 있는 것이 필요하니까 몇몇 개체의 목숨을 붙여 놨겠지. 근데 저러다 마지막엔 비눗방울의 목을 뚝 떼 갈지도 모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땅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낙뢰를 떨궈서 귀쟁이를 공격해 볼까? 저걸 처리한 후에도 이미 만들어진 키메라를 처리해야 하긴 하겠지만, 공급은 그대로 끊기지 않겠는가.

찰나의 순간에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눈앞에 스치듯이 떠오른 건 선명한 녹색의 글씨였다.

[‘녹색 눈의 악마’가 당신의 배후자(背後者)가 되길 원합니다.]

어디선가 많이 본 문장이다. 나는 편애가 써낸 녹색 글씨를 보며 말했다.

“가계약으로 문장 고쳐 와.”

교만왕 게이트에서 가계약도 되는 걸 봤는데, 어디서 정식 계약서부터 들이밀어.

나는 몰려드는 키메라를 보면서 말했다.

[‘녹색 눈의 악마’가 당신과 가계약(假契約)을 맺길 원합니다.]

편애는 물러남을 아는 외계인이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좋아. 계약하자.”

눈앞이 녹색 빛으로 가득 찼다.

* * *

비눗방울은 어리숙한 사람이었다.

그를 아는 모두에게 ‘걔 어때?’하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응. 착한 애야.’하고 말할 터였다.

처음부터 낯가림이 심한 건 아니었는데, 나쁜 의도로 접근하는 사람이 많아 가면 갈수록 의기소침해졌다.

집에 돈이 많은 건 사소한 물건과 말투, 행동에서 묻어나는 거라 숨겨도 제대로 숨겨지지 않았다.

친구는 늘 많았지만 대부분 비눗방울을 물주로 보고 붙어 다니는 관계였다. 착하다는 건 재미없고 무난하다는 소리다.

결국 다 돈 때문에 접근하는 것이겠지. 모든 이유를 알면서 모르는 척 웃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비슷한 관계는 성인이 되고 나서도 계속 생겼다. 군대 가기 전에도, 다녀와서 복학한 후에도 비슷한 사람들을 만났다.

평소에는 자기들끼리 놀다가도 술자리에는 꼭 끌고 가는 사람들. 맨날 밥 사 달라고 부르는 사람들. 조부모상이 있어서 조별 과제할 때면 못 나오겠다더니 클럽 앞에서 발견된 사람까지.

비눗방울은 이름난 호구였다. 시간이 흘러도 그냥 착한 애였다.

‘내일 미팅 가기로 한 거 도윤이는 안 불러도 돼?’

‘걔 재미없잖아. 나중에 술자리에나 부르자.’

반복되는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조용하고 소심한 게 문제인가 싶어서 밝고 활기찬 사람을 연기해 보기도 했다.

수업은 물론이고 학생회 활동, 동아리 활동, 손이 필요한 자잘한 일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동기나 후배들 상대로 돈도 자주 쓰고, 선배들이나 교수님의 비위도 적당히 맞췄다.

남들은 인맥 관리가 대단하다, 부럽다고 말하는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분명히 그동안 생각했던 이상적인 인간이 되었는데, 바라던 건 이게 아닌 것 같았다.

휴대폰은 언제나 끊임없이 울렸다. 비눗방울은 가끔 새 메시지로 꽉꽉 찬 메신저 창을 바라보며 아는 사람들이 다 사라지는 생각을 했다. 죽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왔다.

잘못된 게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모두 포기하고 잠적하면 되돌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지독히도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라서, 다른 사람이 곁에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불편한 시간은 꾸역꾸역 흘렀다.

게이트가 터진 건 그쯤이었다.

비눗방울은 게이트가 터졌을 때 학교에 남아 있었다. 어떤 연유로 동아리 사람들끼리 조촐하게 파티를 열고 있었는데, 게이트가 터지며 학교에 고립됐다.

부족한 물자로 겨우겨우 생존할 수 있었지만,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비눗방울의 동아리실까지 쳐들어온 트롤은 거대한 몽둥이를 휘두르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서, 선배⋯.’

‘잠깐만⋯!’

‘죄송합니다!!’

그동안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후배가 비눗방울을 트롤 앞으로 떠밀었다. 그는 멀어지는 후배와 나 몰라라 하며 숨어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다 죽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그가 살면서 가장 처음으로 표출한 적의였다.

말을 내뱉기 무섭게 코앞에 있던 트롤의 몽둥이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와 동시에 트롤의 목 또한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바닥을 구르는 건 트롤의 목만이 아니었다. 비눗방울은 방금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사람들의 목이 바닥을 구르는 것을 봤다.

‘우욱⋯! 윽⋯!’

빈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비눗방울은 피범벅인 동아리실을 부리나케 뛰쳐나왔다.

그 뒤로는 한동안 머리 달린 것을 보지 못했다. 세상이 안정되고 길드에 속하게 된 후에도 사람 만나는 것을 피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지만, 이 모든 걸 알고도 그를 사람으로 취급해 줄 사람이 있을까. 비눗방울은 살인자라고 손가락질당할 그 순간이 끔찍하게 두려웠다.

밖에 나가길 거부하고 방에 틀어박혀 인터넷만 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심을 보인다.

‘누구든 좋으니까 진심으로 호의를 베풀어 준 사람이 있었더라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비눗방울은 방구석에 처박혀 생각했다. 사람의 호의는 지나치게 달았고, 그는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형’에게 그렇게 신경 쓴 것은 그가 비눗방울에게 호의를 베풀었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것일지 몰라도,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을 내보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각오하고.

“⋯일 ⋯어나.”

흐린 의식 사이로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눗방울은 여전히 목이 나뒹구는 동아리실에 서 있었다.

“일어⋯ 나!”

쩌저적.

천장이 부서지며 재차 목소리가 들렸다. 비눗방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만 처자고 일어나라고!!”

천장이 부서지고 있었다. 아니, 부서지는 건 천장이 아니라 세계였던가?

세계가 뒤흔들리며 눈부신 빛을 발한 순간, 비눗방울은 자신이 쓰러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써 들어 올린 눈꺼풀 너머로 잔뜩 구겨진 얼굴이 보인다.

“누구⋯?”

수분기 없이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나갔다. 몹시 화난 얼굴의 여자가 노란 병아리를 머리에 얹은 채로 말했다.

“형이다.”

“예?”

비눗방울은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떡볶이.”

“어?”

“10억 필요 없어, 이 새끼야.”

“⋯⋯네?”

아니, 그⋯ 본인을 형이라고 말하시기엔 성별의 문제가⋯⋯.

비눗방울은 얼빠진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그러나 여자의 다음 말이 그를 정신 차리게 했다.

“너 때문에 치킨도 못 먹고 여기 왔다. 고생 쌔빠지게 했으니까 나가면 밥이나 사라. 그리고 연애 상담 같은 건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한테 하지 말고 친구한테 가서 하라고. 괜히 다른 인간 의자왕 만들지 말고.”

⋯⋯성격 개같은 거 보니까 아무래도 저 여자가 비눗방울이 아는 형이 맞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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