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84화 (84/175)

제84화

“저 검은 슬라임들은 열에 약해요. 저는 그래서 안 잡아먹히고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벚꽃나비의 머리에 올라탄 삐약이가 으쓱한 표정으로 뺙 울었다. 세상 살다 지능 있는 병아리도 다 보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보셨어요?”

“그럼요. 슬라임한테 잡아먹히거나, 엘프한테 저격당해서 죽던걸요?”

오늘 숨을 쉬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태연한 목소리였다. 이 인간도 어디 좀 이상해 보이는데? 나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근데 어떻게 살아남으셨어요?”

저 병아리는 소환수 같은데, 아무리 봐도 강해 보이지는 않다. 많이 쳐줘도 D급?

B급도 어리바리하면 죽을 것 같은 동네인데 저 병아리만 가지고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대단한 미스터리였다.

“아~ 그거요.”

가방 지퍼를 닫은 벚꽃나비가 눈을 데록 굴렸다. 입가에 걸리는 미소가 묘했다.

“다 방법이 있어요. 알고 싶으세요?”

조금 궁금했는데, 눈가를 찡긋거리며 윙크하는 얼굴을 보니 묻고 싶었던 마음이 사라졌다.

저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

나는 소심하고 유약한 편이라 저런 사람하고 있으면 주눅 들고 만다. 던전 파훼하고 빨리 보내 버려야지.

“⋯⋯제 윙크 그렇게 별로인가요? 열심히 연습한 건데.”

벚꽃나비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돌이 해도 봐줄까 말까 한 판에, 아이돌도 아닌 사람이 했는데 오죽하겠는가. 나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둡고 긴 통로에 두 사람의 발소리가 깔렸다. 벚꽃나비가 자신 있게 안내한 장소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누군가가 일부러 땅을 파내고 만든 공간. 쏟아지는 비와 쓸려 나가는 토양 때문에 지반 사정이 좋지 않은데도, 지하의 천장은 굳건했다.

분명 누가 수를 써 둔 것이리라. 이 땅 밑에는 그게 아니면 설명하지 못할 규모의 시설이 펼쳐져 있었다.

“벚꽃나비 님. 비눗방울 님은 이곳에 언제 오셨어요?”

대리석이 깔린 바닥이 잘 관리한 것처럼 매끈하다. 던전은 결국 저 바깥 세계의 모습을 끌어온 것. 엘프들은 영지에서 쫓겨난 후 이 숲에 무엇을 만들고 있었던 걸까.

“비눗방울 님이요? 비눗방울 님이라면 가신 지 꽤 됐어요. 이 밑은 위험하니 다른 사람들을 기다려 보자고 그분한테도 말했거든요. 그런데 자기는 게이트를 빨리 닫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말하곤 혼자 가셨어요.”

“왜요? 이유라도 있나?”

“찾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말하시던 걸요? 그 사람은 아주 약한데 허세가 또 장난 아니래요. 죽기 전에 구해서 가족들 품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나 뭐라나.”

벚꽃나비가 별꼴을 다 본다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아니, 그걸 그대로 믿었다고? 그걸 믿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냐?

완전 사기꾼 인생 스토리잖아. 내가 10억 그대로 받아먹고 튀었으면 어쩌려고.

사람이 그렇게 순진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는 건지. 옆에 구미호 같은 하람이라도 붙어 있어서 다행이지.

“그 사람이 대체 누구길래 비눗방울 님이 그렇게 찾아다니시는 걸까요?”

“글쎄요.”

“비눗방울 님이 대기 장소에 오셨을 때, 이런저런 뒷말이 많았거든요. 솔직히 하늘에 계신 그분이 이런 심해로 오시면 저희 눈에는 밥그릇 뺏는 거로밖에 안 보이잖아요. 그렇죠?”

삐약이의 등을 가볍게 문질러 준 벚꽃나비가 명랑하게 말했다. 붙임성이 아주 제라늄 급이었다.

“그래서 다들 누구 버스 태워 주러 온 거 아니냐고 수군댔거든요. 사람들 다 그러잖아요. 유명인한테 관심 없는 척해도 누구보다 관심 많은 거.”

“네. 그렇죠.”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라지만, 저는 대놓고 관심 많은 편이에요. 그런데 저런 소리까지 들으니까 너무 궁금한 거 있죠? 비눗방울 님이 찾는 사람은 대체 누굴까요? 숨겨 둔 애인? 길드 신입 헌터?”

벚꽃나비는 자신이 품은 망상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초면에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낙원의 레터를 닮으셨네요. 저랑 진짜 안 맞는 인간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끝없이 말 붙이는 사람이 있어서 어색하진 않았다. 나는 냉기가 올라오는 통로를 지나 빛이 들어오는 방에 들어섰다.

“맙소사.”

뒤따라 들어온 벚꽃나비가 기겁하며 중얼거렸다. 코를 찌르는 악취가 인상 깊다. 우리가 들어선 곳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엘프가 아닌 몬스터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방치되고 있는 게 보인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벌레들이 죽어 부패하는 시체들의 살을 파먹고 있었다.

꽃 한 송이 없는 장소였으나, 이곳이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숲의 지하에 마련된 장소는 무덤이었다. 델리키아에게 생명력을 갈취당한 생명체들의 무덤. 생명을 빨아먹고 갈 곳 없는 시체들을 몽땅 다 이쪽에 버린 거다.

나는 썩은 고깃덩어리나 하얀 백골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중간중간 죽진 않았으나 상태가 이상한 것들이 섞여 있었다. 무덤보단 폐기장 쪽에 가까운가. 그래도 이 정도면 됐다.

“⋯⋯저희 그냥 나갈까요?”

손으로 코를 틀어막은 벚꽃나비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밖에 나가 봤자 헤매기만 할 텐데요. 차라리 이 게이트를 연 작자를 이쪽으로 부르죠.”

“어떻게요?”

질문을 던진 벚꽃나비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나는 무덤 천장에 새겨진 거대한 마법진을 올려다보며 엄지와 검지를 모았다.

“눈 감아요.”

손가락 끝에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나는 숨을 힘껏 들이켜고 집중했다. 와. 이런 상황에 이런 말 하기 싫은데, 코 썩을 것 같다.

안 그래도 린스나 트리트먼트를 취급하지 않는 머리에 정전기가 일어났다. 나는 천장에 박힌 노란 마법진을 향해 검지를 곧게 폈다.

이윽고 푸르다 못해 하얀 전기가 마법진을 향해 거침없이 쏘아져 나갔다.

쿠구구궁-!!!

노랗게 빛나던 마법진이 방금 전 공격에 손상을 입고 빛을 잃었다.

하얀 전기가 벚꽃처럼 하늘하늘 흩날렸다. 무덤의 천장을 지탱하던 마법진에 흠집이 나자 무덤이 거세게 흔들렸다.

“지금 대체 뭘 하신 거예요?! 여기서 당장 나가야 할 것 같은데요?! 이러다 무너질 것 같아요!!”

“별건 아니고, 마법진 부쉈어요.”

“네? 왜요?!”

“보스 부르려고요.”

내 것이 아닌 힘을 과하게 써서 그런가, 부작용이 도졌다. 나는 서서히 차가워지는 손발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작용이 무슨 수족 냉증이야?

사람이 어느 부분에서 고통받는지 아주 잘 아는 놈들이다. 나는 저릿한 손끝을 주무르며 고개를 돌렸다. 벚꽃나비가 음침하게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트 선글라스 쓴 패션 테러리스트 같은 걸 뭐 하러 따라와서 이런 개고생을….”

“저기요.”

“하연이 말대로 나대지 말고 집에서 발 닦고 잠이나 잘걸 그랬어.”

“이보세요.”

“하여간 내 인생은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다니까.”

투둑.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벚꽃나비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저한테 어떻게 살아남았느냐고 물어보셨죠?”

“예?”

“보여 드릴게요.”

벚꽃나비의 마젠타 색 눈이 섬뜩한 빛을 발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뭐야.”

분명 옆에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다. 혹시 특성이 공간 쪽인가? 네가정말좋아랑 비슷한 느낌?

그런데 내가 알기론 공간 특성 헌터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의 구멍을 만들려면 랭크가 꽤 높아야 한다.

이런 게이트에서 용병으로 뛰는 헌터가 그런 높은 랭크를 가지고 있진 않을 텐데. 이상하지.

나는 차가워진 손을 주무르며 무너지는 천장을 바라봤다.

번개 특성을 너무 많이 썼다. 몸 상태가 이상해지고 있었다. 더 썼다간 수족 냉증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숲이 조금만 밝았더라면 쓸데없이 힘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에이,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뭐 하겠는가. 다 지나간 일인 것을.

콰광-!!

무덤이 슬슬 무너지려는지 거대한 돌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흔들거리는 무덤 안에서 보스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숲에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은 죄다 엘프. 내가 본 그들의 공주는 더럽고 추한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런 존재가 이렇게 더럽고 불결한 것들을 남겨 놓았다는 건 이것들도 어딘가 쓸 데가 있다는 뜻.

천장에 거대한 마법진까지 새겨 가면서 공들여 관리한 이유가 따로 있지 않겠는가. 나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공간을 느긋하게 구경했다.

“이런.”

아니나 다를까.

“범상치 않은 침입자가 또 있었구나.”

이 게이트의 주인이 무거운 엉덩이를 이끌고 나타나셨다.

동그란 금테 외알 안경. 긴 갈색 머리카락을 말끔하게 묶어 넘긴 엘프가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망가진 마법진이 복구되며 무너진 천장 조각이 원래 자리를 찾아갔다.

금술 달린 견장이나 가슴팍에 주렁주렁 매달린 훈장들이 엘프의 사회적 신분을 알렸다. 저거 높으신 분이잖아? 하긴 게이트를 여는 건 쉬운 게 아니라고 했지.

“너도 이것과 같은 목적으로 이곳을 찾아왔느냐?”

호박색 눈의 엘프가 손을 뻗어 마법진을 띄웠다. 마법진이 뜬 하늘에서 무언가가 떨어진다. 나는 시체 더미 꼭대기에 떨어진 것을 보기 위해 고개를 쭉 뺐다. 엘프는 친절하게도 떨어진 것을 다시 주워 보기 편하게 해 줬다.

“이것은 몇 시간 전에 내게 찾아왔지. 이 게이트를 빠져나가고 싶었던 모양이더구나.”

엘프가 들어 올린 무언가. 두 눈을 감고 쓰러져 있는 그것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비눗방울.

“그러나 이곳은 내가 설계한 너희들의 무덤. 너희는 영원히 이곳에 묻히게 될 것이다.”

비눗방울을 다시 구석에 대충 던져 버린 엘프가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지하 무덤이 거세게 진동한다. 엘프가 그린 마법진이 숨은 붙어 있지만 죽기 일보 직전인 것들의 뺨 위에 새겨진다.

나는 마법진이 새겨진 머리가 뚝 떨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는 주변의 시체들과 마구 뒤섞이며 무언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키메라⋯⋯.”

나는 거대한 키메라 몇 개를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죽은 자의 몸뚱이를 움직이는 것과는 다른 개념. 살아 있는 것을 바탕으로 온갖 재료를 다 갖다 붙여 만드는 저 흉물은 특별한 몇몇 개체만이 만들 수 있는 병기였다.

비리비리한 인간 하나 상대하는 데 뭘 그리 힘을 쓰시겠다고. 나는 차가운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구석에 버려진 비눗방울은 난리가 난 와중에도 곱게 자고 있었다.

“신기하구나.”

키메라를 만들어 낸 엘프가 소리 내어 말했다. 나는 엘프가 떠 있는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 환영 마법이 통하지 않는 상대는 드문데 말이다. 덕분에 키메라를 꺼내게 됐으니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구나.”

“비눗방울 재운 게 너냐?”

“기분 나쁜 꿈을 깔아 줬지. 지금쯤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을 게다.”

쭉 올라가는 입꼬리가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 흠. 나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벚꽃나비의 모습을 찾았다.

키메라를 상대하려면 다른 특성을 사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벚꽃나비가 남아 있고, 혹시라도 그걸 본다면 그만한 낭패가 없었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벚꽃나비가 이 공간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땅을 박찼다.

구성이 끝난 키메라 몇 개가 무덤 전체를 울리며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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