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지구가 한창 공격당하던 시기엔 자길 군단장이라고 칭하는 몬스터를 수없이 봤다.
진짜 군단장이야 수가 무척이나 적으니, 제 입으로 자길 군단장이라고 칭하는 것들은 대부분 떨거지였다.
막말로 이건 다른 나라 가서 나 대한민국 국회의원이요, 하고 자랑하는 거랑 다름없다니까?
엘프 공주 델리키아는 탐욕왕의 왕국에서 자작위를 받은 귀족으로, 그 누구보다 빨리 성과를 올려 백작위를 받겠다는 꿈을 품은 몬스터였다.
그래서 그녀는 군단장급은 코빼기도 안 보이던 전쟁 초기에 지구에 발을 디뎠다.
이런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
‘그리하여 내가 너를 마주하고 있는 것이지. 영광으로 여기거라.’
공주님이 혼자서 주절주절 설명해 줬다. 완전 안물안궁인데? 이런 tmi 필요 없는데?
그때의 나는 파릇파릇한 초보 헌터였고, 같이 게이트에 휘말린 사람들과 떨어져 불안한 상태였다.
같이 휘말린 사람 중 나 홀로 각성자였으니 오죽했겠는가. 심지어 그때는 인류애가 좀 남아 있는 시기였다.
물론 인류애는 지금도 아주 충만하지만 말이다! 저는 외계인보다 인간을 더 사랑합니다! 인간 최고!
아무튼 그때는 인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저 공주가 딱 나타나서 자기가 얼마나 위대한지 열심히 뽐냈던 거다. 정말 어이없기 짝이 없다.
‘그래. 델리키아.’
‘건방지게. 어딜 감히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냐?’
‘네가 이름 알려 줬잖아. 이름 부르라는 뜻 아니야? 아무튼 그런 건 됐고, 다른 사람들 어디 있어?’
나는 공주가 자랑을 하든 탭댄스를 추든 딱히 관심 없었다. 그냥 남아 있는 인간이라도 구해서 밖으로 나가는 게 내 목적이었다.
‘알 필요 없다.’
‘왜?’
‘어차피 너도 내 일부가 될 텐데,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겠느냐?’
아름다운 엘프 공주가 양산을 펼치며 웃었다. 나는 몰려드는 그림자 떼를 보며 말했다.
‘그 말 되돌려 주지.’
지금 생각해 봐도 간지 폭풍인 대사다.
크으. 다만 저 대사가 도발이 되는 바람에 치고 나서 개고생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 뒤에는 엘프 공주와의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나 홀로 생사를 오가는 접전 끝에 승리한 건 나였고, 공주가 죽으며 남긴 것은 그녀의 양산이었다.
받은 공격이 어떤 것이든 그대로 되돌려 주는 그 양산은 분명히 범상치 않은 물건.
하루에 한 번이라는 제약이 걸려 있었지만, 귀중한 물건임은 틀림없었다.
양산을 걸고 양산만큼의 힘을 얻은 그녀는 그렇게 무시하던 인간에게 패퇴했다.
나는 전리품으로 얻은 양산을 쥐고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인간 하나를 찾아 게이트 밖으로 나왔다.
나와 함께 게이트에 휘말린 건 근처에 있는 대학의 학생 무리. 같은 과 친구들을 모두 잃고 홀로 남은 한 사람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면 목숨값은 두 배로 드릴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요, 앞으로 어쩌시게요? 같이 다니던 사람들이 다 죽었잖아요.’
‘집으로 내려가서 가족들이 무사한지 찾아볼 생각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남자가 울어서 발갛게 된 눈가를 문질렀다. 나는 양산을 흔들거리며 고민했다. 내 이름을 말해 줄까?
아직 단말기가 없던 시절이라 닉네임 같은 것도 없었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름 대신 다른 걸 주었다.
‘이건 왜⋯⋯.’
‘가져가시라고요. 저보단 그쪽이 더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어디서 그런 이타심이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냥 잘생겨서 홀랑 넘어갔을 수도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시각에 약한 동물이다.
‘⋯⋯.’
양산을 받아 든 남자가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나는 까만 뒤통수를 보며 간지나는 대사를 날렸다.
‘저한테 빚 갚으실 필요는 없고, 다른 사람이 곤경에 처했을 때 똑같이 도와주세요.’
‘⋯⋯.’
‘세상이 뒤집혀도 인간의 도리라는 게 있잖아요. 상황이 이렇게 되고 다들 내키는 대로 살지만, 한 명쯤은 바르게 살아도 좋지 않을까요?’
반복해서 말하지만 한창 흑염룡이 날뛸 시기였다. 그 당시의 나는 입시 신의 축복을 받아 상향 지원마저 원큐에 합격한 기적의 수험생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폭발했단 뜻이다.
나는 개떡 같은 말을 던지고 유유히 사라졌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멋있게 퇴장하던 과거의 나.
그리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 사람.
그 사람이 흑염룡 날뛰던 시기의 내 개똥철학에서 무슨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람은 결국 살아남았고, 각성했으며, 훗날 이 나라의 얼굴이 된다.
그래. 내가 그때 구했던 인간은 반서준이었던 것이다!
목숨을 구해 줬는데 신명나게 엿이나 먹이고 말이야. 개자식.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러나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게 시간의 법칙이다.
나는 회고를 마치고 다시 엘프를 바라보았다. 그 공주는 졌으면 얌전히 살 것이지, 왜 다시 우리 차원을 약탈하러 온 거냐고. 안 왔으면 얼마나 편해?
“그래, 알았다.”
앞뒤 사정은 다 이해했다. 이제 여기서 건질 만한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수고해라. 난 이만 간다.”
최악의 상황이 올 경우엔 델리키아와 다시 싸워야 하는데, 군단장이라는 애들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할 방법이 없다.
게이트라는 건 결국 무언가를 건 만큼 받을 뿐이라서, 그동안 내가 상대했던 군단장들도 모두 본신의 힘이 아니었다.
나는야 우물 안의 개구리. 더 정확한 수치가 필요하죠.
이런 건 외계인 애들한테 물어봐야 하나? 조만간 편애를 찾아갈 이유가 또 생겼다.
부상을 입은 엘프는 날 따라올 바에야 재정비를 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엘프를 뒤로하고 다시 숲을 거닐었다. 얼마 안 가서 비가 내렸다.
쏴아아아-
앞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폭우가 쏟아진다. 빗소리를 타고 와작와작 오돌뼈 씹는 소리가 났다.
통, 통, 통.
가볍게 튀는 소리가 난다 싶더니, 검은 덩어리가 다시 뒤를 따라왔다. 저 방향에는 아까 두고 온 엘프밖에 없는데. 종족을 가리지 않고 잡아먹는 편이구나?
나는 주인의 동족마저 씹어 먹은 것으로 보이는 덩어리를 툭 쳤다. 덩어리는 움푹 파였다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직 날 잡아먹을 수준은 아닌지 합체할 것을 찾아 꿈틀거리는 게 우스웠다.
그 엘프 공주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양산을 내놓으라고 소리칠까?
주운 물건이야 경찰서 갖다주는 게 맞지만, 전리품을 달라고 하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전리품은 지금 내 손이 아닌 다른 인간 손에 있었다. 반서준을 찾아가서 내가 예전에 준 거 다시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이유가 뭐냐고 물어보면 델리키아를 만났다고 이야기해야지.
그럼 반서준 반응이 대단할 거다. 자기 친구를 죽이고 자기마저 죽이려고 했던 가장 첫 번째 몬스터니 아주 인상 깊게 남았겠지. 어쩌면 눈이 돌아가서 복수하겠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복수 대상 이전에 탐욕왕의 (전)군단장.
PK의 주 활동지는 크레이터니 본진도 아마 크레이터 안에 틀었을 것이다. 크레이터 연쇄 폭발한 거 봐라. 이 나라 크레이터가 죄다 걔 영역이라는 소리지.
그럼 다시 만난다면 크레이터 안에서 만날 확률이 높은데, 크레이터는 양쪽 차원에 연결된 특수한 공간이다.
다음번에 만날 때는 델리키아 본신의 힘을 고스란히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나도 군단장을 상대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 판인데, 반서준이 상대할 수 있긴 하나?
걔 죽으면 우리나라 얼굴마담은 회귀자 외계인이 되는데?
아무리 봐도 안 될 일이었다. 외계인이 대표는 무슨 대표야. 어떻게든 이번 일이 반서준 귀에 안 들어가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 하람을 매수해야지.
미래를 상상하는 동안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뒤에서 졸졸 따라오던 콩콩이가 무슨 냄새를 맡은 건지 전력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무를 마구 삼키며 거침없이 나아가는 콩콩이를 따라 달렸다.
진흙탕에 발이 푹푹 빠지고 습기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콩콩이가 향하는 방향에서 붉은빛이 어른거리기를 반복했다.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으아아악-!!”
나무를 박살 낸 콩콩이가 무언가를 향해 뛰어들었다. 화르륵 타오른 불꽃이 춤추듯 물결친다.
“삐약아! 파이어!!”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불이 확 퍼졌다. 날 잡아먹기 위해 몸집을 키운 검은 덩어리에겐 영향도 주지 못할 크기였다.
“삐약아, 넌 할 수 있어!! 다시 한번 파이어!!”
대체 뭘 보고 파이어거리는 건지. 나는 고개를 쑥 내밀어 덩어리 너머에 있는 것을 보았다.
“옳지! 녹는다! 잘한다, 우리 삐약이!!”
저건⋯.
“우리 저것만 물리치면 여기서 나갈 수 있어! 저 정도 크기면 분명히 보스일 거야! 파이팅!! 할 수 있다!!”
불닭⋯⋯?
아니. 불닭이라고 부를 크기도 아니었다. 작고 보송보송한 병아리가 안간힘을 써 불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참혹한 병아리 혹사 현장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순식간에 하얀 낙뢰가 하늘에서 떨어져 검은 덩어리를 파괴했다.
“누, 누구⋯⋯.”
파이어 병아리 주인이 말을 더듬거리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나는 산산이 흩어지는 덩어리를 걷어차고 앞으로 나섰다.
“아! 아까 그 패션 테러리스트!!”
파이어 병아리를 손바닥에 올린 한 여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뭐? 패션 테러리스트? 말 다 했냐?
나는 미간을 팍 구기며 말했다.
“뭐라고요?”
“네? 패션 피플이요.”
병아리를 크로스백에 집어넣은 여자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나는 기가 차서 헛숨을 토해 냈다. 패션 테러리스트라고 말한 거 다 들었거든. 병아리가 귀여워서 봐준다.
“안녕하세요. 전 벚꽃나비라고 해요.”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어두운 숲속을 가득 채웠다. 크로스백에 손을 넣은 여자는 동그란 무언가를 꺼내 들며 말했다.
“안경 닦으실래요?”
안경은 없고 안경 닦이만 들어 있는 안경집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안경 닦이를 받아 들며 대답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하트 선글라스는 캡 모자 위에 올려놨는데 언제 발견한 건지. 나는 물기 묻은 선글라스를 잡아 안경 닦이로 닦았다. 벚꽃나비는 크로스백에서 자꾸 물건을 꺼냈다.
“에너지 바 드실래요?”
“아니요. 괜찮아요.”
“물 있는데 물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다친 곳 있으세요? 구급 용품도 있어요.”
“다친 곳 없어요.”
손만 넣었다 하면 뭐가 쑥쑥 나온다. 나는 다 쓴 안경 닦이를 접어 벚꽃나비에게 건넸다. 안경 닦이를 받아 든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오실 때 다른 사람들은 못 보셨나요?”
“네. 숲이 워낙 넓어서요.”
“아, 그럼 이제 어쩌실 거예요? 저는 일단 여기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받은 안경 닦이를 크로스백에 쑤셔 넣은 벚꽃나비가 내 쪽으로 찰싹 붙었다. 그리고는 작게 속삭였다.
“사실 여기 오자마자 숨겨진 통로 같은 걸 발견했거든요. 비밀 아지트로 가는 통로 같은 거?”
“그래요?”
“한 명이 내려가는 것까지는 봤는데, 저는 혼자 가기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갈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삐약이랑 같이? 검은 덩어리가 계속 찾아왔을 텐데. 버티는 것도 힘들었겠는걸?
“이 밑으로 내려간 사람이 누군데요?”
나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벚꽃나비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비눗방울 님이요.”
세상에. 대어를 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