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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82화 (82/175)

제82화

내가 숲을 잠깐 둘러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이 숲에는 몬스터가 없다.

계속해서 내 뒤를 따르고 있는 저 검은 덩어리는 인간을 잡아먹지만, 몬스터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기본적으로 몬스터는 외부 차원의 주민을 가리키므로, 생명 없는 것도 그에 해당되는지는 잘 모르겠다는 의견이었다.

그럼 이 숲에는 과연 무엇이 있느냐?

그리고 무엇을 위해 이 게이트를 열었느냐?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걸 알면 몬스터나 하고 앉아 있지, 왜 김마리 씨 같은 거나 하고 있겠는가.

옆에서 꾸물거리며 쫓아오던 덩어리가 또 한 번 합체했다. 누구 소유인지는 모르겠지만, AI가 쓸 만해 보였다. 겁 없이 달려드는 게 아니라 삼킬 수 있을 때까지 힘을 불리는 게.

나는 불이 옮겨 붙는 방향을 살피며 숲을 가로질렀다. 이동 경로를 정하는 것 자체는 쉬웠다.

검은 덩어리는 나와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움직였다. 그러면서 주변에 다른 덩어리가 있다면 그쪽으로 먼저 움직여 합체하길 반복했다.

나는 몸집을 불리는 덩어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저것들은 놔둬 봤자 다른 헌터들을 씹어 삼키니 차라리 합체하게 두는 게 나았다.

지독한 습기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꺼져 가는 불길을 바라보며 손을 올렸다.

그때였다.

쐐애액-!!

그늘진 나무 틈에서 푸르스름한 빛의 화살이 거칠게 쇄도했다. 눈이 있는 자리를 정확히 조준해 쏜 것을 보니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나는 팔을 움직여 달려드는 화살을 잡아챘다. 맥없이 부러진 화살 촉 끝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잠깐 한눈팔기 무섭게 낙하하는 유성처럼 아름다운 화살 비가 쏟아진다. 나는 젤리처럼 말랑한 검은 덩어리를 밟고 힘껏 도약했다.

다짜고짜 공격을 시도한 불청객은 정말 놀라운 속도로 몸을 숨겼다.

눈을 부릅뜨고 집중하니 나뭇가지 사이로 짧은 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선빵 맞고 얌전히 물러나 주는 성격은 아닌데.

나는 도망가는 불청객을 뒤따라 나무 위를 달렸다. 아까부터 졸졸 쫓아오던 검은 덩어리가 내 뒤를 쫓으려다가, 불어난 몸집을 이기지 못하고 나무에 퍽 부딪혔다.

반으로 갈라진 덩어리가 퐁 하고 튀어 오르더니 다시 합체한다. 그리고는 입을 크게 벌려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와작와작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작은 게 움직이기 편할 텐데 저 크기를 고집해야 할 이유가 있나?

AI가 제법 쓸 만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머리가 없으면 곤란한가.

저 흉물이 지금까지 합체한 횟수를 생각해 봤을 때, 이 숲에 흩뿌려진 저것의 개수는 어림잡아 수십 개에서 수백 개.

어떤 것이든 수가 많아질수록 컨트롤하기 어려워지는 법이다. 양이 늘면 늘수록 더 단순해지는 법이지.

쿠구구궁-!!

나는 나무를 죄다 쓰러뜨리며 달려오는 검은 덩어리를 슬쩍 내려다보았다. 저것을 어떻게 써먹을 방법이 없을까?

원거리 공격으로 선빵 친 불청객이 도망가는 방향은 오른쪽. 나는 저 무식한 덩어리로 불청객의 진로를 방해하는 방안을 생각해 봤다.

근데 생각해 봤자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존나 빨리 달려서 저게 존나 빨리 쫓아오게 하기.

문제는 저게 커질 대로 커진 상황이라 속도가 안 난다는 점이지. 나는 한숨을 가볍게 내쉬고 불청객을 노려 낙뢰를 떨궜다.

하늘이 쾅쾅 울리며 푸른빛이 지상에 내리꽂히는 모습이 보인다. 눈 아프게 번쩍인 번개는 이 일대를 밝히는 것으로 모자라 새로운 불씨를 남기고 갔다.

활활 불타는 나뭇가지 위에서 새의 형상을 이룬 바람이 날개를 파닥였다.

나는 바람 뒤에 숨은 존재의 모습을 살폈다. 불길에 일렁여 비치는 불청객의 얼굴이 입이 떡 벌어지게 아름답다. 황금색 머리카락 사이로 뾰족하게 솟은 귀는 날 공격한 것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엘프⋯⋯?”

엘프가 왜 여기서 나오지? 외부 차원의 엘프들이 사는 곳은 이런 어두컴컴한 숲이 아니었다.

꽃이나 풀 따위의 식물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나무의 도시. 전쟁 당시 내가 보았던 그들의 영토는 풍족하고 아름다운 땅이었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하트 선글라스를 쭉 잡아 내렸다. 엘프는 낙뢰가 남긴 충격을 완전히 상쇄하지 못했는지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분명 격 높은 존재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이르셨거늘⋯⋯.”

워낙 고요한 숲이다 보니 혼잣말하는 것도 쌩쌩하게 잘 들렸다. 나는 일렁이는 불길 아래의 엘프를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어-이-!!”

엘프의 곁에 머무르는 바람의 새가 날개를 파드득 떨었다. 엘프의 청록색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여기 너 말고 다른 놈 없어?!”

가까이 다가가려는 낌새를 보이면 다시 도망치겠지. 나는 배에 힘을 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엘프는 고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답했다.

“네게 알려 줄 이유는 없다.”

“알려 주는 게 좋을걸. 그래야지, 내가 빨리 나가 줄 거 아니야.”

“너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

“뭔 소릴 하는 거야. 내가 여길 왜 못 나가?”

여기서 못 나가면 이 던전은 웨이브로 바뀌는데, 그럼 저 시커먼 게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잡아먹겠어. 인천이 진짜 마계가 되는 수가 있다고.

“이 게이트 연 놈이 누구냐? 협조해 주면 넌 안 때릴게.”

던전 안이 너무 광활해서 보스 찾기가 어려웠다. 인천에서 빨리 튀려면 지성체의 도움을 받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일 것 같았다.

“이 게이트는 ‘갈취’를 목적으로 열린 게이트다. 이 안에 들어온 너희 종족을 모조리 잡아 죽이는 게 우리가 받은 임무지.”

엘프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활을 쥐었지만, 아까의 여파가 큰지 폼이 엉성했다.

“중앙에 침입한 자도 수준이 높더니, 너 또한 같군. 그 간신은 영역 관리를 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 거지?”

엘프의 화살촉 끝에 푸르스름한 빛이 맺혔다. 하지만 팔을 덜덜 떠는 모습을 보아 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은 저런 약자를 괴롭힐 때가 아니라 쟤가 술술 불어 준 정보를 정리할 때다.

나는 엘프가 줄줄 읊었던 말에서 핵심 단어를 꼽았다. ‘그분’, ‘갈취’, ‘간신’.

‘그분’은 저 엘프보다 높은 누군가를 칭하는 말. 정황상 저 엘프보고 이 던전에서 인간을 다 죽이라고 한 게 그분일 것이다.

다음으로 ‘갈취’. 내가 알기로 갈취는 특성이었다.

인간 중에는 저 특성을 쓰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은 없고, 보스 몬스터로는 한 번 만나 봤다. 조금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흐릿하다.

마지막으로 ‘간신’. 다른 건 몰라도 간신이 뜻하는 게 누군지는 확실히 알겠다. 저건 분명 PK를 지칭하는 단어일 것이다.

쪼렙 양학할 생각으로 여기 왔는데 제가 나와서 놀라셨겠어요. 걔도 관리를 아주 안 한 건 아닙니다. 그냥 제가 오지 말라는 거 와서 그럼.

나만 안 왔어도 여기 들어온 헌터 꿀꺽 삼키고 해피 타임 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게 됐수다.

잠깐의 대화로 상황에 대해 고작 몇 조각 얻어들었을 뿐이지만, 머릿속에는 한 편의 그림이 펼쳐졌다.

PK가 계약한 배후좌의 특성은 ‘갈취’.

남의 생명을 빼앗아 자기 힘을 불리는 그 특성은 물량 승부가 필수인 특성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실종되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 저 배후좌의 특성에 모조리 희생되었을 것이다.

PK는 자기 배후좌가 강해지는 걸 돕다가 상황이 답 없어지니까 배신하려는 거고.

이게 무슨 한 편의 희곡이란 말인가. 나는 입 안이 텁텁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건 기회였다.

지금은 외계의 침략자인 배후좌들이 각광 받고 있는 시대. 사람들은 배후좌가 무슨 초대박 로또인 줄로만 알고 있는데, 결국 그것들도 자기 이익을 꾀하는 타 종족 외계인일 뿐이다.

이번 사건을 널리 알리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것들이 과연 우리한테 무료 봉사를 해 주러 왔겠냐고. 다 우리를 이용해 먹으려는 거 아니냐고.

“엘프야. 못 쏘는 활 내려놓고 내 말이나 들어 봐라.”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활 쏴 봤자 딴 데 날아가기밖에 더하겠냐고. 조준도 제대로 못 하면서 갖은 애를 다 쓴다.

“너희 동네 여기 아닌 거로 아는데, 왜 이런 숲에서 게이트를 열었어? 너희들 꽃이랑 나무랑 풀이랑 기르면서 밀 농사짓고, 옥수수 농사짓고, 그러지 않았어?”

외부 차원의 식물이니 그게 정말 밀이랑 옥수수였는지까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저 종족이 이런 숲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름다운 땅에서 살았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그야 내가 직접 봤으니까.

“그냥 알아. 아는 배후좌가 알려 줬어.”

사실 게이트에 들어가서 보았던 거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말해 좋을 건 없을 것 같았다.

그 땅을 게이트에서 봤다는 소릴 하면 저쪽이 자연스럽게 앞뒤 상황을 이해하게 될 텐데, 그럼 쟤랑 나는 철천지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

숨쉬기가 꺼려질 정도로 지독한 습기다. 기껏 냈던 불길 또한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흐린 불길 사이로 고민하는 엘프의 얼굴이 보인다. 엘프는 시간을 제법 끈 후에야 겨우 입을 뗐다.

“우리는 왕에 의해 쫓겨났다.”

“왜?”

“그분이 너희 종족에게 패배하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용께서는 그분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분노하셨다.”

위대한 용. 나는 손목 안쪽에 새겨진 문양을 만지작거렸다. 위대한 용은 탐욕왕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왕’이란 말이 나왔으니 틀림없었다.

“그분은 그 죄로 작위와 영토를 빼앗기셨다. 우리 종족은 그 책임을 함께 물어 대수림으로 쫓겨났다.”

“너희가 우리 종족의 생명을 갈취해 가는 것은 빚을 갚기 위함인가?”

“그렇다. 그분께서는 종족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작위와 영토를 되찾길 바라시니.”

외부 차원의 소문난 노예 주인 탐욕왕과, 그 부하 이야기.

수금하는 장면이라면 저번에 봤었지. 나는 문득 편애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 손목에 있는 그게 필요했거든.’

‘내 손목에 있는 거?’

‘곧 필요해질 거야. 그 악덕 사채업자가 부하를 얼마나 갈구는데. 효과가 아주 기막힐걸.’

그땐 이해 못 했는데, 지금은 알겠다. 편애가 말한 악덕 사채업자는 바로 탐욕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탐욕왕의 부하이자 우리나라를 좀먹고 있는 원인, ‘그분’.

저 엘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탐욕왕의 (전)군단장이자 직위를 박탈당한 군단장, 특성 ‘갈취’의 소유자, 계약자를 얻어 이런 판을 짤 정도로 대담한 인물.

엘프 공주 델리키아.

‘내 앞을 막아선 인간은 네가 처음이다. 너희 종족도 쓸 만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다니. 기특하구나.’

‘기특이고 나발이고, 다른 사람들 어딨어? 네가 끌고 갔잖아.’

아름다운 엘프의 영지에는 크리스털과 유리로 장식된 궁전이 있다. 나는 궁전의 무도회장에서 수정보다 눈부신 그녀를 마주했다.

‘미끼로 쓸 하나를 제외하곤 이미 없애 버렸지. 내 궁전에 쓰레기는 필요 없으니.’

수십 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그녀의 목에서 빛을 발했다. 흰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양산이 궁전의 바닥을 톡톡 쳤다.

‘나는 델리키아. 곧 백작위에 오를 왕의 측근이자 이 영지의 주인이다.’

유리와 수정으로 장식된 무도회장이 새카만 그림자로 물들어 갔다. 나는 아름답게 미소 짓는 엘프 공주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내 서클의 일부가 되는 것을 감사히 여기거라, 작은 인간아.’

그녀는 내가 만난 최초의 군단장급 몬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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