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유구하게 이어져 온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유독 세 사람 앞에서만 빛을 잃었다.
극야, PK, 그리고 마지막 블랙리스트가 된 하람이 그 주인공인데, 나는 저 세 사람이랑 대화할 때면 그렇게 화가 났다.
혼자만 정보를 독식하고 예쁘게 웃어서 사람 홀리는 외계인, 사고 조지게 치고 맥없는 웃음으로 사람을 화나게 하는 쓰레기, 그리고 간보는 듯한 미소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샤먼킹.
이 세 사람 때문에 웃는 얼굴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차라리 까칠한 야옹이처럼 구는 반서준이 그리울 지경이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알 수 없는 함정에 발을 들이지 않겠지만, 도윤 형은 조금 다르죠. 말씀하신 것처럼 목표가 생기면 뒤도 보지 않고 달려가는 사람이에요.”
사람만 보면 움츠러드는 비눗방울은 알고 보면 불도저 같은 면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괜한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 입에 얼음을 물었다.
“인천에 있을 함정에는 뭐가 있을까요? 무엇이든 함정에 빠진 사람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겠죠. 저는 그 함정이 저희 위인지 아니면 그 아래인지가 중요하다고 봐요. 위라면 저희가 죽어 문제가 생기고, 아래라면 잘 기능하는 함정을 버려야 하니 문제고. 어느 쪽이든 문제가 생기네요.”
플라스틱 컵의 겉면으로 물기가 송골송골 맺혔다. 얼음이 가득 든 잔에서는 덜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람은 한때 제 것이었던 커피잔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
“⋯⋯오산에 열렸던 게이트에서, PK로 추정되는 사람의 모습을 봤어요.”
S1팀에게 절망을 불러왔던 거대한 혹한의 빙원. 하람은 새벽 제1공대의 일원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PK의 행적을 쫓던 중 그게 생각나서 S1팀이 올린 당시의 보고서를 열람했어요.”
“⋯⋯.”
“PK가 군신 님의 부름을 받고 합류했다고 적혀 있더라고요. 선명한 라임 색 눈의 1세대 헌터. 특성은 염동력. 말과 행동을 보아 손가락테크닉 님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판단. 중앙으로 향하는 데 도움을 줌.”
“⋯⋯.”
“그 사람이 범인이라면, 그리고 그 사람과 친분이 있다면 대충 짐작할 수 있겠죠. 그 함정이란 것의 규모를.”
또박또박 자신이 추리한 것을 늘어놓던 하람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닫았다.
훈련장 안에는 무거운 적막이 감돌았다.
얼음이 한가득 든 잔을 쥔 손이 차갑다. 나는 두 개의 반지를 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 모습으로 펀치를 날린다 한들 하람이 기절하는 일은 없겠지.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나는 하람을 전치 16주로 병원에 입원시켜 주고 싶었다.
하람이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입을 닫았는지는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내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PK와 무슨 사이인지 순순히 실토하라는 거지.
“저는.”
나는 생각에 앞서 운을 뗐다. 그럼 세 명의 범인 후보를 말해 주었을 때부터 내가 공범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나?
뒤늦게 깨닫게 되니 찝찝하기 짝이 없다. 와그작. 컵 끄트머리가 또 구겨진다.
“제가 PK와 무슨 관계인지 말씀드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김마리 씨로 사는 동안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많이 참고 살았다.
본 모습이었다면 벌써 주먹이 나가고도 남았다. 나는 정체를 까 보겠다는 핑계로 날 귀찮게 한 하람을 많이 배려했다.
그동안 참아 준 건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하람 님한테 협조를 부탁할 필요도 없긴 해요. 그냥 비눗방울 님 사지를 분질러 놓고 방에 처박아 두면 그만이니까.”
“그건⋯⋯.”
“제가 말하고 있잖아요.”
약자를 배려하는 건 강자의 여유였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하람을 죽이고 감쪽같이 사라질 자신이 있었다.
인간의 도리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목숨에는 가치를 매길 수 없다고 우기던 시절은 지나간 지 오래다. 아, 예전에도 돈 많은 인간 목숨이 더 가치 있다고 여겼던가.
“저는 정말로 좋게 좋게 지내고 싶거든요. 근데 하람 님이 그렇게 나오시면 제가 좋게 지내고 싶겠어요?”
거슬리면 죽이면 되고, 불쾌하면 치우면 된다. 그렇게 살아도 날 찾을 사람은 많았다. 특급 게이트를 닫을 수 있다는 건 그런 것이다.
“저희 선 넘지 말고 타협점을 찾기로 해요. 제가 범인이나 공범자였으면 하람 님이 지금처럼 멀쩡하게 계실 수 있었겠어요? 벌써 땅 밑에서 주무시고 계셨겠죠.”
하람쯤 되는 인간을 묻으려면 리스크가 크긴 한데, 필요하면 못 할 것도 없으니까.
나는 바짝 얼어붙은 하람을 바라보며 웃었다.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괜히 나대다가 사자의 콧수염을 뽑느니 그냥 사는 게 낫지 않나. 자비는 베풀어 줄 때 감사합니다 하면서 넙죽 받아야 하는 거다.
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하람의 뺨에 얼음이 가득 든 컵을 가져다 댔다. 화들짝 놀라며 파르르 떠는 꼴이 눈물 나게 웃겼다.
“그러니까 궁금하신 게 제가 왜 비눗방울 님 인천 가시는 데 과민반응하냐, 그거잖아요.”
“아⋯ 네. 그렇죠.”
“별거 없어요. 제가 그 양반 인천 갈 빌미를 제공해 준 것 같아서.”
그 인간이 얌전하게 지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하람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윤 형이 저렇게 급발진 스위치를 누를 만한 게, 지금 딱 두 사람밖에 없어요. 김마리 씨랑 그 형이라는 사람.”
“⋯⋯.”
“그럼 혹시 그 ‘형’이라는 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두 달만 회귀시켜 주면 안 될까?
이 엿 같은 길드에 위장 취직하기 전으로 돌아가면 인생이 필 것 같다.
나는 멍청했던 과거의 나를 탓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람이 곧장 재앙을 부르는 입을 열었다.
“분명 서른다-”
“더 말하면 죽임.”
“⋯⋯.”
내가 서른다섯 소릴 하면서 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겠어? 알았으면 회귀자 하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섣불리 일을 벌이고 뒤늦게 후회하는 꼴이 꼭 금붕어 같았다.
사실 내 인생의 90%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 *
지금 용병 판에서 가장 큰 일은 송도에서 열릴 추정 D+급 게이트였다.
돌발 게이트가 쉴 새 없이 뿅뿅 생겨나는 시대. 길드들은 저마다 담당 구역을 정해 놓고 돌발 게이트를 틀어막기 바빴다.
그러다 보니 생성일 추측이 가능한 몇몇 게이트들은 낙점 없이 버려지는 게 현실.
헌터 협회는 그런 일에 용병을 불러다 썼다. 특정 인원을 게이트에 밀어 넣고, 무사히 게이트를 닫으면 참여 인원에게 동등한 보상을 지급하는 것이다.
게이트 안에서 획득한 물품은 최초 토벌자 몫으로 쳐주기까지 하니 인기가 많은 건 당연하다.
용병이란 게 원래 다 밑바닥 인생 아니던가. 이쪽 일이 벌이가 짭짤해서 뛰긴 뛰어야겠는데, 가진 힘이 보잘것없는.
그런데 불법적인 일은 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 이 판에는 그런 사람들이 왔다.
“현수 아빠, 저기 봐. 저거 6위 아냐?”
“잘못 본 거겠지. 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장비나 챙겨. 그러다 누가 채 가면 어쩌려고.”
“진짜라니까!”
아니. 그것도 다 옛말인가 보다. 저기에 우리나라 6위가 있는 걸 보면⋯⋯.
‘미친 건가.’
각성한 지 일주일 된 새내기 헌터, 벚꽃나비는 새벽 길드 홈페이지에서나 봤던 비눗방울의 모습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미쳤나 봐!!’
비눗방울이라 하면 세계 제일의 방구석 폐인 아닌가! 그 폐인력이 오죽하면 천하의 새벽 길드장도 이긴다고 하던데!
‘저 사람이 왜 여기 있는데? 이거 밸붕 아닌가?!’
길드에 속하지 않고 용병 일을 뛰는 헌터들은 대개 D에서 F정도다. 고랭크 헌터들은 길드에 속해 일하는데, 뭐 하러 낮은 물에 온단 말인가. 적은 수고를 들이고 돈 되는 일이 지천에 널려 있는데!
이 정도면 프로 축구 선수가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초딩들이랑 같이 축구해 주는 격이다.
“비눗방울이 왜 여길 온대요? 새벽 탈퇴했대요?”
“기사 난 거 없으니 그런 건 아닐걸요? 버스라도 태워 주러 온 거 아닐까요?”
‘버스?’
눈이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그래, 돈 많은 집 자식들은 랭크 높고 돈 궁한 헌터나 특정 길드를 매수해서 쩔 받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좋은 길드에 입사하려면 현장 경력이 있어야 하니 말이다. 가족이 길드장이거나 치유쯤 되는 희귀한 특성을 가진 게 아닌 이상 입사 시험은 필수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근데 6위에 새벽 길드면 돈 엄청 많지 않을까요? 돈으로 매수가 가능한가?”
“그거야 모르죠. 맨날 방구석에 처박혀 있으니 돈이 궁할 수도 있잖아요.”
각지에서 추측성 대화가 오갔다. 동료나 파트너가 있는 헌터들은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비눗방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래도 고랭크 헌터인데 돈이 궁하진 않을 것 같은데.’
이 판에 뛰어든 지 고작 일주일밖에 안 된 벚꽃나비는 같이 다닐 파트너가 없었다.
헌터 중 아는 사람이라곤 오직 동생뿐. 하지만 그녀의 동생인 매화나비는 비각성자 상태에서 배후좌의 선택을 받아 단숨에 A급이 된 인물이다.
D~F급이나 오는 이 게이트에 끌고 오기엔 수준이 맞지 않았다. 동생의 배후좌가 우리 애 쓸데없는 곳에 끌고 다닌다고 심술부릴지도 모르는 일이고.
“에휴.”
사람은 어딜 가든 힘이 있어야 한다. 벚꽃나비는 평생 구설수에 오르더라도 비눗방울처럼 강해질 수만 있다면 뭘 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부럽다.”
임시로 만들어 놓은 대기 장소 구석에 고독하게 홀로 선 모습이 작살나게 멋있다.
‘저런 고랭크 헌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게이트 공략법?’
비눗방울을 바라보는 벚꽃나비의 마젠타 색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살짝 경직된 모습마저 앞으로 있을 토벌에 대비하는 프로 같다.
“고랭크 헌터들은 다 저런가? 포스가 장난 아닌데?”
“그 새벽 소속이잖아. 당연히 저 정도는 되어야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벚꽃나비의 생각과 비슷한 말이 오간다.
‘역시 다들 생각하는 게 거기서 거기⋯⋯.’
“포스 같은 소리 하네. 그냥 사람 많은 곳 싫어서 쫄아 있구먼.”
‘⋯⋯가 아닌가?’
비스듬하게 눌러쓴 분홍색 캡 모자가 눈앞을 휙 스쳐 지나간다.
벚꽃나비는 방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지나간 사람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다른 사람들은 다칠 것을 대비해 보호 장비로 꼭꼭 싸매고 있는데, 혼자만 바캉스 온 것처럼 입고 있다.
벚꽃나비는 하와이안 셔츠에 캡 모자라는 파격적인 패션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모자라도 다른 거 쓰지.’
모자 아래에서 반짝이는 하트 선글라스가 사람 숨통을 조였다. 진정 저 차림으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오백 리 밖에서도 돌아볼 기상천외한 패션이었다.
정신 나간 패션 센스로 모두의 이목을 끈 그 사람은 의외로 얌전하게 대기했다.
벚꽃나비는 넋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비눗방울이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기웃거릴 때마다 그 사람도 같이 움직인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비눗방울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이.
‘왜?’
옷차림으로 어그로를 다 끌어 놓고서 그럴 이유가 있나? 아무리 봐도 이해 안 가는 행동이었다.
“헌터님들! 곧 게이트 열립니다! 준비해 주세요!”
게이트가 열릴 지점을 막고 있는 공무원이 대기 장소 밖에서 크게 소리쳤다.
벚꽃나비는 걸음을 옮기는 하와이안 셔츠를 보며 그 뒤를 밟았다.
어차피 비눗방울이 싹 쓸어 갈 던전이라면 흥미 위주로 움직여 보자고 결심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