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78화 (78/175)

제78화

‘그래서, 그 협력 상대가 누군데?’

‘군단장.’

PK는 군단장이랑 계약했다.

‘굳이 따지자면 현 군단장은 아니고, 전 군단장이야.’

정확히는 (전)군단장이랑.

내게 리치의 라이프 베슬을 구해 오라고 한 것은 내가 하람과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의 일.

라이프 베슬은 그 군단장을 제어하는 데 쓰인다고 했으니, 그 시점부터 배후좌 관리를 제대로 못 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았다.

실종 사건이 통제가 어려울 정도로 확 떠오른 건 비교적 최근.

최근에 들어 PK가 더 이상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크레이터를 폭발시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이 일을 아는 이들을 죄다 잡아간 것도 일을 최대한 수습하기 위해서겠지.

라이프 베슬은 틀림없이 귀한 물건이지만,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귀중한 물건은 아니다.

헌터들이 이용하는 마켓 같은 걸 잘 뒤적여 보면 해외 배송으로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돈을 그렇게 많이 벌고도 수전노처럼 사는 인간이었다. 정말 필요하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구했겠지.

비눗방울을 감시해 달라고 부탁까지 하면서 시간을 끄는 건 아마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악랄한 배후좌는 한시라도 빨리 처리하는 게 모두에게 이득이다. PK 또한 도 넘은 배후좌를 잘라 내고 싶겠지.

하지만 세상에는 마음같이 되지 않는 일이 산더미다. 라이프 베슬을 이용한 무언가가 (전)군단장 토벌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PK는 시간을 끌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비싼 인력까지 고용해 가면서 사건을 파내는 위험인물을 감시 맡긴 데는 이유가 있겠지.

다른 쪽이면 몰라도 그런 쪽은 제법 신뢰하는 편이었다.

다만, 인천 같은 경우에는 조금 의문이 있는데.

▶ 형

▶ 그동안 조언해 준 건 고마운데요

▶ 다 의미 없는 일이었어요

뭐 하러 인간들을 그쪽에 불러 모았느냐다. 나는 비눗방울의 메시지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이 새끼만 생각하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동안 김마리 씨 모습을 한 날 조지게 따라다니더니, 이쪽에서도 알고 지냈을 줄이야.

PK가 부탁한 게 비눗방울 감시라는 걸 생각해 보면 어떻게 이런 악연이 다 있나 싶다. 나는 당장 앞집으로 쳐들어가 비눗방울의 뚝배기를 깨고 싶은 충동을 내리눌렀다.

물론 그동안 김마리 씨한테 뿅 가서 졸졸 따라다녀 준 관계로 감시하기 무척 쉬웠다.

어휴,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감시 대상이 알아서 기웃거려 주더라고. 편해도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 그 사람이 시한부래요

▶ 정말 좋아했는데⋯.

▶ 가슴이 너무 아프고

▶ 이런 게 실연의 상처인가 봐요

머리 깨진 비눗방울은 혼자서 열정적으로 개소리를 늘어놓는 중이었다.

야. 내가 김마리 씨 본인이어서 아는데, 걘 네가 좋아하는 줄도 몰라. 그냥 귀찮게 하는 상사인 줄로만 알았어.

그리고 사귄 적도 없는데 실연은 무슨 실연. 나는 베개에 이마를 묻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럼 군신 님께서는 이제 돌아가시나요?’

‘왜요?’

‘범인이 이 길드에 없다는 걸 아셨으니까요.’

하람은 내가 빨리 꺼지길 원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나는 뻔뻔하게 나갔다.

‘아뇨? 안 갈 건데요.’

‘용건 끝나신 거 아닌가요?’

‘이번 달 일 열심히 해서요. 월급 받고 갈게요.’

월급 타령을 들은 하람이 얼빠진 표정을 짓는 게 그렇게 기막혔는데.

그래. 헌터 월급이 한두 푼이야? 일했으면 그만큼 받고 가는 게 맞지.

솔직히 하람을 치료해 준 것도 추가 수당 받아야 한다. 나는 다음번에 하람을 만났을 때 추가 수당 내놓으라고 협박하기로 마음먹었다.

▶ 보고 싶고

▶ 곧 다시는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눈물 나고

▶ 진짜 가슴이 너무 아픈데

▶ 이게 바로 사랑이겠죠⋯.

그 와중에도 비눗방울은 끊임없이 개소리를 지껄여 대고 있었다.

가슴이 너무 아프면 병원이나 가라. 나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침대 헤드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맨날 수줍어해서 몰랐는데, 이런 지랄 같은 성격을 잘도 숨기고 있었구나.

그러니까 내가 못 알아채지. 말은 안 거는데 수줍은 표정으로 집요하게 쳐다보는 인간이랑 이 지랄 발광이랑 무슨 공통점이 있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났다. 김마리 씨는 당장 정리하지 못하더라도, 이 사기와 날조로 시작한 관계는 어떻게든 끝낼 필요가 있었다.

▶ 형은 이럴 때 어떻게 했어요?

▶ 술이라도 마시면 진정될까?

▶ 나 진심인가 봐

▶ 죽을 것 같아 정말

상대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혼자 쇼하고 있으면 뭐가 되냐. 얜 대가리가 없나.

나는 아프면 병원이나 가라고 답장을 보내려다가 생각을 바꿔 이 관계를 적당히 끝낼 멘트를 고민했다. 그런 답장을 보냈다간 대화가 계속 이어지잖아.

어 그냥 ◀

자작이나 해 ◀

사람은 어차피 다 죽어 ◀

이 인간이 시한부 드립 전 이야기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말하는 꼴로 봐서는 못 들은 것 같았다.

바로 전에 말한 게 마법 소녀 타령인데, 거기서부터 들었어도 딱 개소리라고 생각했겠지.

어떻게 타이밍이 이럴 수가 있냐.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버둥 쳤다. 세상이 날 엿 먹이기 위해서 짠 판 같았다.

▶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말해요?

▶ 난 진짜 죽겠는데 왜 그렇게 말하냐고

▶ 니가 형이면 다야?

▶ 나이가 다냐고!!

이 새끼 이미 술 퍼마신 거 아니냐. 나는 미쳐 돌아가는 메시지를 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럼 나이가 다지 ◀

장유유서 모르냐 ◀

내가 너보다 밥 수백 그릇은 더 먹었어 ◀

▶ 너 불교라면서 이 새끼야

▶ 왜 자꾸 유교 들먹이고 난린데

어 오늘부터 개종했어 ◀

사실 비눗방울이 나보다 세 살 더 많다. 익명은 가끔 사람을 인터넷 여포로 만들어 준다.

막돼먹은 대답에 혈압 올라 넘어갔는지, 비눗방울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나는 비눗방울의 메시지를 바라보며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했다.

여태껏 서른다섯 살이라고 거짓말하고 거드름을 피워 댔다. 게다가 저쪽은 날 형으로 알고 있는 상황.

그냥 차단 박을까?

나는 휴대폰 액정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았다.

비눗방울이 저 ‘형’을 찾겠다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내가 곤란해진다.

김마리 씨야 코앞에 있는 데다 사라질 일 없으니 ‘형’을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지.

그럼 행적 감시한다고 몰래 따라다니며 고생해야 할 거다. 그리고 내 정보는 파 봐도 기밀이라고만 나올 텐데, 그럼 쟤도 얼핏 눈치채지 않을까?

세상엔 곤란한 일이 너무 많다. 나는 휴대폰 자판을 톡톡 두드려 메시지를 보냈다.

또 삐지지 말고 ◀

(사진) ◀

차여서 슬프면 치킨이나 먹어라 ◀

술은 니가 알아서 사 먹고 ◀

저게 뭐가 예쁘다고 치킨 기프티콘까지 보내 줘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발 빼려면 빌드업을 쌓는 게 중요하다.

▶ 갑자기 왜 이래요?

▶ 막말한 거 후회해도 안 받아 줄 거거든요

▶ 내가 치킨으로 넘어갈 것 같아요?

▶ 애도 아니고

삐진 티 팍팍 내는 주제에 답장은 칼 같아서 웃기다. 나는 픽 웃으며 자판을 두드렸다.

애 아니라는 사람치고 어른스러운 사람 못 봤다 ◀

그거 먹고 발 뻗고 잠이나 자 ◀

그 뭐냐 ◀

형 이제 바빠서 상대 못 해 주거든? ◀

오늘이 마지막이야 ◀

처음부터 거짓말로 시작했으니 끝도 거짓말로 낸다. 나는 ‘형’의 설정을 즉석에서 짜냈다.

나이는 35살, 용병 일로 생계를 꾸리는 E급 헌터.

아픈 어머니랑 고등학교 다니는 여동생이 있고, 집이 찢어지게 가난함. 이유 모를 수억대 빚이 있음.

용병 일을 뛰다 만난 지인의 이유 모를 실종으로 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함.

이 사건을 조사하며 자신에게 위험이 닥친 것을 깨닫고 일을 쉬고 있었으나, 빚쟁이들의 압박과 생계의 위협을 느껴 다시 일 하기로 결심함.

설정만 보면 게이트 들어갔다가 기연을 얻어 SSS급이 될 남자였다.

가상 인물만 아니었다면 주인공 확정인데, 불쌍하다. 나는 짜 둔 설정을 곱씹으며 새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 왜요?

▶ 나 화 안 났어요

▶ 형이 너무 성의 없게 대답하길래 화난 척했어요

▶ 진짜로

나도 알아 ◀

▶ 그럼 왜 그래요?

▶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그런 거 아니야 ◀

이제 일해야 해서 바빠 ◀

나도 먹고 살아야지 ◀

세상에는 길드 소속 헌터들이 하기 싫어하는 더럽고 귀찮은 일이 널려 있다.

용병들에게 괜찮은 일이 없을 뿐이지, 용병이 필요한 일이야 얼마든지 있다는 뜻이다.

▶ 일이요?

▶ 무슨 일?

나 용병 뛰거든 ◀

E급이라 길드는 딱히 없고 대충 입에 풀칠하고 살았는데 ◀

요새 사건 조사하면서 위험할까 봐, 일 쉬고 있었어 ◀

기왕 속이는 거 확실하게 속인다. 나는 쉬지 않고 메시지를 보냈다.

마음 같아서는 일 해결되는 거 보고 싶은데 ◀

집에 빚도 있고 아픈 어머니도 계셔서 ◀

동생 학비도 대야 하고 ◀

집세도 내야 하고 ◀

그래서 제일 큰일 한탕 뛰기로 했어 ◀

지금 가장 큰일이 뭔지 모르겠지만, 뭐든 상관없겠지. 이 ‘형’이란 사람은 거기서 죽을 거니까.

나는 메시지를 다 보내고 액정에서 손을 뗐다. 오랜 시간 답장 없는 화면을 보고 있자니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 빚이 얼만데요?

10억 ◀

왜? ◀

▶ 내가 빌려줄 테니까 먼저 갚고 천천히 줘요

▶ 이자 안 받을게요

이거 미친놈 아니야? 먹튀하면 어쩌려고 거액을 선뜻 빌려줘? 게다가 쟨 내 이름조차 모르잖아. 드디어 돌아 버린 건가?

물론 업계 1위 길드에 속한 비눗방울이 버는 수익은 천문학적이다. 그동안 낭비하지 않고 살았다면 10억쯤은 껌이겠지만⋯⋯.

됐어 ◀

빌려주긴 뭘 빌려줘 ◀

너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거 빌려주고 다니지 마라 ◀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인 건 알겠는데 ◀

그러다 뒤통수 크게 맞아 ◀

차여서 슬프다며? ◀

치킨 먹고 잠이나 자 ◀

그래도 웹상에서 만난 인간한테 저걸 빌려준다는 건 문제가 있는 듯. 나는 필사적으로 비눗방울을 말렸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굳건했다.

▶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 아니에요

▶ 나 처음에 말한 것처럼 고랭크 헌터고

▶ 그 정도는 별거 아니야

▶ 지금 용병 구인 글 중에서 가장 큰 규모면 송도잖아요

▶ 형 미쳤죠

▶ 목숨 버리고 싶어서 인천에 기어 들어가요?

▶ 다른 쪽에서 용병 뛴다고 해도 미쳤냐고 할 판에 함정에 기어 들어가?

▶ 빨리 안 간다고 말하고 계좌나 불러요

▶ 바로 줄 테니까

⋯아니 뭐 이런 우연이.

그냥 대충 큰 거 뭐 있겠거니 하고 말한 건데 송도라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세상이 날 엿 먹이기 위해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뒷목을 주무르며 답장했다.

꼴사납게 차여서 질질 짜는 게 무슨 고랭크 헌터야 ◀

됐고 ◀

나는 이제 내 삶 살 테니까 너도 네 삶 살아라 ◀

호구처럼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한테 돈 주고 다니지 말고 ◀

그동안 고마웠다 ◀

어차피 선 긋기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는 관계를 대충 정리하고 눈을 감았다. 피곤해서 잠이 잘 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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