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인생 살기 쉽지 않죠.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
하람이 말한 순정과 비눗방울은 대체 무슨 연관이 있을까? 오늘은 해당 사건에 대해 말씀 나눠 보겠습니다.
사건의 시작은 ‘김마리 씨’가 기숙사에 입주하던 날로 돌아간다. 그녀가 베푼 작은 호의는 사소한 정에 약한 비눗방울을 뻑가게 만들었다.
다음 날, 비눗방울은 그녀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하람을 붙잡고 부탁하게 된다. 그녀가 힐러인 점을 감안하여, 상처가 있으면 고쳐 달라는 핑계로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지.
하람은 친한 형이 오랜만에 활기찬 것을 보아 비눗방울의 부탁을 수락했다. 비눗방울이 반한 사람이 누군지도 보고, 겸사겸사 치료도 받으러 가기로 마음먹었으나,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저는 처음에 제가 잘못 본 줄 알았어요. 분명히 다른 사람인데, 뒤에 붙어 있는 건 제가 아는 사람이랑 똑같아서요.”
노란 눈의 악마가 만든 특급 아이템은 그 사람의 본질까지 덧씌울 수 있으나, 뒤에 따라다니는 떨거지들까지 숨겨 주지는 못했다.
하람은 알 수 없는 상황에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저건 분명히 손가락테크닉인데 왜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자기네 길드 신입으로 있는가.
저런 총천연색 무지개 전대를 끌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손가락테크닉 말고 또 누가 있다고.
하람은 대외적으로는 아주 드물게 착하고 선량한 헌터지만, 본모습은 그와 거리가 있는 편이다.
애초에 이미지 관리를 한다는 점부터 겉과 속이 다르다는 거 아닌가?
몇 차례의 스토킹과 던전에서의 몇 시간으로 평범한 척하던 민간인의 정체가 손가락테크닉임을 알아차리는 눈치.
옛 영주의 속셈을 파악하고 허점을 발견하여 제게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센스.
자기보다 몇 계단이나 높은 격을 가진 존재를 능수능란하게 휘두르는 배짱.
하람은 인간 중에서도 특히 난 놈이었다. 그는 이 미스터리한 상황을 파헤치고 저 수상한 신입의 정체를 밝혀내기로 한다.
“마침 도윤이 형이 도와주면 안 되냐고 부탁하기도 했고요.”
“뭘요? 고백하는 거? 잘되는 거?”
“그 형은 거기까지 바랄 깡도 없어요. 그냥 자주 볼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한 거죠.”
당시 하람은 비눗방울의 부탁으로 매화나비를 감시하는 중이었다. 매화나비의 배후좌는 유독 계약자를 아끼는 터라 매번 상처를 입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그건 나를 찾아올 구실이 되었다.
“저는 손가락⋯.”
“말하면 죽일 것임.”
“⋯⋯군신 님이 괴롭힘 같은 거 참고 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형한테 말했어요. 제가 모질게 굴면 형이 잘해 줘서 친해져 보라고. 이를테면 당근과 채찍 작전?”
하람은 내 정체를 까 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말 모질게 갈궜는데도 끝까지 정체를 안 깠다고 아쉬워하더라.
나는 순간 설명충 모드를 집어던지고 저 인간을 한 대 칠 뻔했다. 이번 거는 진짜 간신히 참았다.
“중간중간 계속 생각해 봤어요. 저 사람이 왜 다른 모습으로 여기 있을까? 혹시 길드장이 또 무슨 짓 했나? 보복하러 우리 길드에 위장 취업한 건가?”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상식적으로 다른 길드에 위장 취업하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산업 스파이면 모를까. 그런데 군신 님은 길드도 없으시잖아요. 단순히 길드에 가입하고 싶은 거라면, 본래 모습으로 오시면 됐을 텐데요. 다들 쌍수 들고 환영했을 테고요.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죠.”
하람은 고민했다. 저 사람이 왜 모습을 바꾸면서까지 여기 와야 했을까? 대체 목적이 뭐지?
무언가를 캐내러 왔다면 수상한 움직임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김마리’는 너무 평범하게 지냈다.
평범하게 일하고, 사람들과 어울렸다. 유아독존인 핑거킹과 닮은 점 하나 없다. 그 외 수상한 점조차 단 하나도 없었다. 누가 하람의 생각을 읽었더라면 분명 의심병이 도진 거 아니냐고 물어봤을 터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대로 놔둘 수도 없고, 더 알아낼 정보도 없다면 그냥 직구로 물어보자. 그런 생각을 했죠.”
손가락테크닉은 수많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 어마어마한 유명세와 이득 대신 정체를 숨기는 것을 택한 사람.
정체를 들먹이면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하람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이 베이스로 깔려 있었다.
“제가 입막음하겠다고 죽일 수도 있었잖아요. 그런 상황은 대비해 놓으셨어요? 그냥 도박으로 내뱉으신 건가?”
“그건 아니고⋯ 제 괴롭힘을 참아 가면서까지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으시잖아요? 그걸 믿었죠. 다 이루었다면 진작 떠나셨을 테니까요.”
하람은 확신을 가지고 수를 던졌다. 나는 완벽하게 걸려 줬고, 확신을 굳어지게 해 줬다.
“그래도 마법 소녀는 생각도 못 했는데요.”
“변명하려고 아무 말이나 한 거죠.”
“하긴 문제는 시한부 발언이니까요.”
시한부 소리를 딱 내뱉자마자 휴대폰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우리 둘은 비눗방울이 시한부 소리를 들은 거라고 추측했다. 그게 아니면 휴대폰까지 떨궈 가며 도망간 이유가 설명이 안 됐다.
“좋아하는 사람이 시한부라는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슬프겠어요.”
“잠수 이별보단 시한부 선고가 낫죠. 잠수 이별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잖아요.”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모를 예정에서 친절하게 시한부 선고까지 해 주고. 너무 착한 거 아니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따듯한 배려심에 감탄했다. 그러나 하람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남의 순정을 짓밟아 놓고 너무 매몰차시네요.”
“존재도 몰랐던 순정인데 뭘 어떡해요. 남의 순정 책임질 여유 없으니까 알아서 마음 접으라고 해요.”
안 그래도 실종 사건 조사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순정 타령이나 하고 앉아 있어.
이제 그것만 문제가 아니라 비밀 유지 각서 문제도 생각해야 한다.
크레이터 터져 나가서 S1 애들 바쁜데 왜 이런 일이 생기고 난리야.
이번 사건 말하자마자 날강도가 욕 오지게 할 게 벌써 눈에 선하다.
지금 그쪽 자극하면 안 된다. 별것도 아닌 일에 쓸데없이 뺑이치는 중이라 분노 게이지가 MAX를 찍었다.
“그래서.”
하람이 다시 분위기를 잡으며 운을 뗐다.
“저희 길드에 오신 이유가 뭐죠? 그것도 그런 모습을 취해 가면서까지.”
복도에 싸늘한 침묵이 한 번 더 내려앉았다. 나는 하람의 진중한 얼굴을 보며 말을 골랐다.
PK가 부탁했다고 말하는 건 조금 곤란하다. 우리의 거래는 내가 ‘정체를 들키지 않고’ 임무를 완수하는 게 핵심이다.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을 애쓴 만큼 이번 일을 망칠 수는 없다. 나는 억울해서라도 중도 포기할 수 없었다.
“조만간 사라질 테니까 입 다물고 계시는 건 어때요.”
얌전히 비눗방울만 지켜보다 갈 건데. 이 길드를 파괴하거나, 산업 스파이 따위로 들어와 있는 건 아니다.
“그럴 거면 제가 이 자리를 만들었겠어요?”
하람이 칼답하며 웃었다. 개소리하지 말란 뜻인 것 같았다.
“흠.”
하지만 ‘나는 비눗방울을 감시하러 왔으니, 그냥 비눗방울만 지켜보다가 떠나겠다. 너희 길드에 해될 거 하나 없다.’ 하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분명 내가 왜 비눗방울을 감시해야 하는지 말이 나올 거다. 그럼 나는 그걸 답할 방법이 없다. 아⋯ PK가 시켜서요. 이럴 수는 없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도 비눗방울을 감시해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 그때 PK가 말하려고 하긴 했으나⋯⋯.
‘들으면 이 일에 깊게 연관될 텐데, 괜찮겠어?’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
‘네가 우리나라 2위 3위랑 같이 찜질방 가서 걔들 머리에 맥반석 계란 깨는 정도?’
진짜 끔찍한 일에 연관될까 봐 안 듣는 쪽을 택했다. 귀찮은 일은 피해 갈 수 있으면 피해 가는 게 옳다. 우리 모두 한 귀로 듣고 흘리는 스킬을 생활화하도록 하자.
“요즘 조사하는 일이 있어서요.”
진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물러가지 않을 인간이다.
“크레이터 폭발 사건에 묻혀서 다들 모르는 일이긴 한데, 이게 제법 심각하고 흉흉한 일이거든요.”
그렇다면 다른 핑계를 대자. 나는 개인적으로 조사하는 사건을 들먹였다.
“자세히는 말씀 못 드리는데, 그 사건의 주모자를 찾기 위해 길드에 위장 잠입을 하고 있었죠.”
믿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법 그럴싸한 핑계다. 안 믿든 말든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뭔가 말하기는 했으니까.
“⋯군신 님도 알고 계세요? 그 사건.”
이상하다. 예상한 반응이 아닌데.
나는 살짝 당황한 채로 하람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을 찡그린 하람은 이 일에 대해 뭔가 아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실종 사건 같은 건 저희 길드보다 다른 길드 쪽이 더 의심 가지 않나요? 낙원이라던가요.”
“그쪽 길드원이 알려 준 사건이라서요. 그쪽에는 주모자가 없다고 판단했죠.”
“그럼 수많은 길드 중 저희 길드를 콕 집어 의심하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그냥 제일 커서 제일 먼저 살펴보러 온 건데요.”
열심히 따져 묻던 하람은 내 별거 아닌 대답에 맥이 빠졌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하긴 형사가 범죄 조사하러 왔다길래 벌벌 떨고 있는데 ‘이 집이 제일 커서 이 집 먼저 와 봤어요^^’ 이러면 쫄긴 할 듯.
한동안 복도에 정적이 흘렀다. 하람이 다시 입을 연 건 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
“그걸 조사하고 계신 거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겠네요.”
“어떤 식으로요?”
“도윤 형이랑 제가 그 일을 조사하고 있었거든요.”
하람과 비눗방울이 사건을 뒤쫓기 시작한 건 두세 달 전의 일이다.
두 사람은 자료 수집과 통계 분석을 통해 범인이 배후좌가 있는 고랭크 헌터라고 추측했고, 범인 후보를 추려내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범인 후보는 셋. 극야, 매화나비, 그리고 PK.
“극야는 왜 들어가 있어요? 최근에 수상한 행동 한 적 없지 않아요?”
“수족이 많은 데다 워낙 수상한 사람이잖아요. 지금은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한 상태예요.”
이유는 배후좌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 걘 배후좌가 생길 수 없다고. 그 자체로 배후좌니까.
“매화나비는 제가 쭉 감시해 왔는데, 오늘로 확실하게 매듭짓고 왔어요. 그 사람은 범인이 아니에요.”
“왜요?”
“주변을 털어 봤는데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더라고요.”
하람과 비눗방울은 셋 중 두 명의 이름을 지웠다. 남은 건 하나였다.
“저희는 PK를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어요. 물론 행적을 알 수 없는 만큼 배후좌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긴 하지만요.”
하람은 PK에게 배후좌가 있다면 범인이 확실할 것이고, 없다면 수사를 원점으로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제법 충격적인 정보에 머리를 땅 얻어맞은 상태였다.
짐작 가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군신 님께서도 이 일을 조사하고 계셨다니, 의외네요. 하긴 이 일을 아는 사람 중 아직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한 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은데. 그 형이라는 사람이랑….”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형이요?”
“아. 도윤 형이 말해 준 사람이에요. 웹사이트를 돌면서 이 일을 캐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느 방면이든 영향력 있는 사람이겠죠. 범인은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사람만 놔둔 것 같으니까요.”
하람은 힘 있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모든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속 그 형이란 사람을 또라이라고 욕만 하더니, 얼마 전에 그 사람한테 떡볶이 기프티콘을 받은 모양이에요. 그 뒤로 형 소리를 하면서 따르던데.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하긴 하네요.”
하람의 TMI 대방출이 끊이지 않는다. 나는 좀 죽고 싶었다.
“제가 보기엔 둘 다 또라이 같기도 하고.”
조용히 해, 이 새끼야.
나는 하람의 웃는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는 상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