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왼쪽 팔꿈치부터 손목까지 길게 팬 상처. 너덜거리는 살점이 제법 먼 거리에서도 보였다.
그럼 오른쪽은 멀쩡하냐.
그렇지 않았다. 촘촘한 그물처럼 잘게 난 상처가 그의 오른팔을 빼곡히 덮고 있었다.
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매번 저런 상처를 입고 오는 거지? 아까 비눗방울이 얼쩡거리던 걸 보아하니 둘이 싸운 것도 아닐 텐데.
한두 번 이러는 것도 아니고 매일 이러니 치료하는 입장에서 한숨만 나왔다. 김마리 씨는 괜히 <최고의힐러는딜러> 같은 닉네임을 지은 게 아니었다.
무릇 진정한 힐러는 맨날 다쳐서 오는 동료 머리통을 깰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일이 많이 힘드신가 봐요. 매일같이 다쳐서 오시고.”
나는 하람의 상처를 살피고 그 위에 손을 댔다. 하얀빛이 김마리 씨를 바라보는 비눗방울의 눈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떠안은 책임이 있으니까요. 김마리 씨도 많이 힘드시죠?”
“네. 하람 님이 매번 다쳐 오셔서 너무 힘드네요.”
비꼬는 듯한 말투가 절로 나갔다. 입사 첫날의 초짜 힐러 김마리는 이제 없다. 여기 있는 건 동료 머리통을 깨고 싶은 파워 힐러뿐이다.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요. 그나저나 요즘은 어때요? 조금 살 만하신가요?”
“원래 살 만했는데요.”
“그런 뜻이 아니라.”
하람이 말을 끊고 주위를 살폈다. 텅 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김마리’로 살 만하시냐는 뜻이에요. 당신은 진짜 김마리 씨가 아니잖아요?”
매끈해진 팔을 만지작거린 하람이 고개를 살짝 떨구고 작게 속삭였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분명 헌터 아닌 민간인이라고 하셨는데, 갑자기 힐러가 되어 나타난 순간부터 설득력 없는 주장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요?”
하람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웃었다. 나는 담담하게 그간 하람이 보여 준 태도를 떠올려 보았다.
배후좌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하람은 급격히 상승한 랭킹과 개념 있는 인터뷰 따위로 호감형 이미지를 구축해 둔 상태다.
민주나 제라늄은 그런 하람이 재수 없다고 자주 속닥거렸지만, 이미지 관리 잘하는 것도 나름의 재주였다.
하람이 그들에게 유독 본모습을 보여 주는 건 반서빈을 제외한 3공대 멤버들과 오래 안 사이기 때문일 거다. 그들은 이 길드 초창기 멤버니까.
‘김마리 씨.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이리 좀 와 볼래요?’
‘힐러라고 뒤에만 있으면 되겠어요? 그대로면 던전에서 짐만 될 텐데, 훈련하는 게 어때요? 제가 도와줄까요?’
‘기숙사 산다고 했죠? 출근할 때 앞집 사는 인간도 같이 챙겨 와요.’
바운더리 밖의 인간에게는 철저히 이미지 관리를 하는 하람.
그러나 그가 그동안 보여 준 모습은 이미지 관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하람이 시키는 잔심부름을 하러 다녀야 했고, 훈련을 빙자한 갈굼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비눗방울 출근 셔틀까지 할 뻔했다.
이미지 관리 어디 갔어. 이미지 관리 어디 갔냐고.
울화통 터지는 일이지만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있나. 나는 이를 악물고 하람의 갈굼을 견뎌야 했다.
보다 못한 3공대 팀원들이 종종 도와주기는 했지만, 하람은 그럴수록 더 집요하게 굴었다.
‘김마리 씨는 정말 특이한 것 같아요. 자기 수준을 모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사람은 보통 코앞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피할 수 없어요.’
마치.
‘특성이 신체 강화면 모를까.’
무언가를 캐내는 것처럼.
“제 말이 틀린가요?”
확신을 가진 하람이 추궁하듯 묻는다. 그의 시선은 내 등 뒤를 향하고 있었다. 그가 내 뒤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네. 틀렸어요.”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내 뒤에서 무언가를 보는 건 오직 하람뿐이니까.
하람이 내 등 뒤에서 무엇을 보든 간에 그것을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면 말짱 꽝이지.
눈 색도 특성도 이름도 모습도 다른 사람을 등 뒤에 똑같은 게 달려 있다는 이유만으로 똑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저한테 자꾸 그러시는데, 이거 사내 괴롭힘으로 고소해도 될까요?”
네가 산업 스파이 감지하고 쫓아내려는 모양인데, 안 그래도 곧 떠나니까 제발 좋게 헤어지자.
나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하람을 노려봤다. 네가 그러면 진짜 김마리 씨가 얼마나 슬퍼하겠냐? 안 그래도 취직하자마자 인생 최대의 불운을 맞이하신 분인데.
난 아직도 김마리 씨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렸다.
너무 불쌍해서. 가기 전에 딜은 하고 가셨을까.
가죽을 뒤집어쓰는 것도 모자라 본질까지 빌린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했다.
“고소요? 하셔도 되긴 해요. 그 전에 제가 당신 정체를 밝히는 게 더 빠르겠지만요.”
지지 않고 도발한 하람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왕들한테 밀려 콩 라인이 된 배후좌께서 허공이 계시는 모양이다.
“무슨 목적을 가지고 위장 취업을 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라면 위장 취업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위장 취업이라뇨.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계속 발뺌하실 생각인가요? 괜찮아요. 저는 제 말만 할 거니까요.”
네 말은 다 무시할 거라고 대놓고 말한 하람이 내 머리 위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른 길드면 몰라도 저희 길드에는 제가 있는데 용케 들키지 않을 생각을 하셨네요. 차라리 낙원이 나았을지도 몰라요.”
낙원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거기 회귀자 있다. 잠입하는 순간 발각된다고.
“등 뒤에 예비 배후좌를 붙이고 다니는 사람은 드문 편이죠. 현재 내부 차원에 간섭 가능한 개체들은 안목이 제법 높거든요.”
배후 계약 같은 경우에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불안정하게 열린 차원을 넘어 간섭하려면 어느 정도 수준이 있어야 했다.
괜히 고랭크 헌터가 배후좌를 만날 가능성이 높은 게 아니다.
“아주 드물게 두셋쯤 붙어 있는 걸 보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에는 배후좌들끼리 싸우고 있어요. 점찍은 계약자를 독차지해야 하니까요.”
하람은 그런 경우엔 주변에서 끊임없이 재앙이 일어난다고 덧붙여 설명했다.
“일곱이나 되는 사람은 지금까지 딱 두 명 봤어요. 두 분 다 일곱이나 되는 배후좌가 싸우지 않고 얌전했죠. 당신처럼.”
싸한 기운이 목을 조른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려 허공을 휘저어 보았다. 손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하람이 한쪽 눈을 감은 채로 날 바라보고 있었을 뿐.
“이제 인정하실 때가 되지 않았나요?”
하람의 시선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배회한다. 그와 동시에 나는 목을 조르는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말을 시인하고 협조를 바라는 게 나을까, 아니면 끝까지 발뺌하는 게 나을까.
그것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지만, 크게는 저 두 갈래로 나뉘는 것 같았다. 시인하느냐, 발뺌하느냐.
둘 중 하나가 아닌 다른 방법은 이 자리를 뜨거나 하람을 처리하는 건데, 그 두 개는 후환이 안 좋았다.
자리를 뜨면 그의 말을 시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고, 처리하려면 본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결국 모든 게 한 곳으로 귀결됐다.
진퇴양난이라는 게 이런 건가. 나는 미간을 좁히고 하람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이 상황이 아주 흥미로운 듯했다.
“하람 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 제가 누군지 아신다는 뜻이겠죠?”
“네.”
“아시면서 이러시는 거예요?”
하람은 어디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내가 저번 게이트에서 만난 자칭 민간인이라는 것? 아니면 손가락테크닉이라는 것?
자칭 민간인이야 조금 전에 언급했으니 알고 있는 게 확실했다. ‘두 분’이라고 강조한 걸 보아 손가락테크닉까지 아는 모양인데, 그럼 상황이 아주 많이 복잡해진다.
저번 게이트 시뮬 사건 때 여러 명한테 정체를 들켜서 S1팀이 고생한 거로 아는데. 날강도가 비밀 유지 각서에 지장 받고 다니느라 고생했다고 빽빽거려서 알았다.
심증만 가지고 있으면 될걸, 굳이 비밀 유지 각서를 쓰고 싶다고 덤비다니. 이상한 인간이네.
“물론이죠. 알고 있기 때문에 궁금한 것 아니겠어요? 그 모습으로 여기 있는 이유가.”
“은근슬쩍 말 놓지 마세요. 제가 보기엔 하람 님이 모르고 계시는 게 좀 있거든요.”
“뭔가요?”
하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제가 사실 마법 소녀라서요.”
“네?”
“그래서 변신 능력이 있어요.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지켜 주려면 필수적인 능력이죠.”
“네?”
“게다가 제가 시한부라서요. 아마 몇 주 뒤면 그대로⋯.”
콰당탕-!!
엘리베이터가 있는 코너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우리 둘은 소리를 들은 즉시 그쪽으로 달려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했다.
사람은 온데간데 보이지 않고 액정이 깨진 휴대폰 하나만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이건⋯⋯.”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든 하람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그가 든 휴대폰을 살폈다.
투명한 젤리 케이스가 끼워진 휴대폰은 아직 이어폰 단자가 있는 기종이었다. 일단 내가 아는 사람들 건 아니다.
“큰일 났네요.”
하람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바지 주머니에 휴대폰을 챙겨 넣었다. 나는 그런 하람을 보며 물었다.
“왜요?”
“지금 가엾은 헌터 한 명의 순정이 짓밟혔어요.”
휴대폰 주워 놓고 순정은 뭔 순정. 순정이고 나발이고 비밀 유지 각서 쓸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누군데 그래요.”
나는 하람의 팔을 툭툭 치며 설명을 요구했다. 자기만 휴대폰 주인 알면 다냐. 지금 내 정체가 사방팔방에 퍼지게 생겼는데.
“그냥 순순히 인정하시면 되는 걸 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지금 정말로 큰일 났어요.”
“왜 큰일 났는지 말씀이나 하시라고요. 그리고 괜히 그 소리한 거 아니거든요? 저 시한부 맞거든요?”
“세상 멸망해도 끝까지 살아 계실 분이 시한부 타령하시면 누가 믿는다고 그러세요?”
“그러니까 제 말은 ‘김마리 씨’가 시한부라는 거죠.”
한 달 넘게 여기서 지냈으니 조만간 퇴사할 시기가 온다. 그때가 되면 이 세상 그 누구도 ‘김마리 씨’를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머리가 있는 사람이면 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수가 없다. 하람은 많은 뜻이 내포된 내 말에 입을 꾹 닫았다. 나는 하람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비밀 유지 각서 쓸 생각이나 하세요. 판도라의 상자를 여신 걸 축하드립니다.”
“비밀 유지 각서까지 쓸 일인가요?”
“그럼요. 안 쓰시면 외부 차원에 묻어 드릴 거니까 고향 땅에 묻히고 싶으시면 얌전히 쓰시는 게 좋아요. 참고로 각서 쓰고 어기셔도 고향 땅에 묻히실 수 있어요.”
좋은 묫자리까진 못 알아봐 드리고 길드 건물 밑에 묻어 드리는 건 가능할 듯.
나는 시한부 마법 소녀 드립이 불러온 결과를 참담하게 바라보았다.
설정 과다는 이다지도 곤란한 일이다. 사람은 늘 무리수를 두지 않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결국 그 휴대폰 주인이 누군데요?”
한 사람에게 비밀 유지 각서 경고를 때렸으니 다른 사람에게도 경고를 때릴 필요가 있다. 우선 어디부터 들었는지 물어보는 게 좋겠지.
나는 하람을 툭툭 치며 대답을 재촉했다. 하람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느리게 입을 열었다.
“⋯⋯도윤 형이요.”
엘리베이터 앞 복도에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건 분명 비눗방울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