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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75화 (75/175)

제75화

나는 생각했다. 나한테 무차별적으로 인성질하는 이 새끼는 누굴까. 얼마나 할 짓 없는 자식이길래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사람한테 시비를 터나.

할 짓 없어도 보통 할 짓 없는 놈이 아닌지 쌍욕과 차단을 같이 먹여 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연락을 해 왔다.

이쯤 되면 그 끈질김에 갈채라도 보내 줘야 하지 않나 싶다.

하긴 저쪽은 보통 끈질긴 놈이 아니었지. 나보다 먼저 이 일을 조사하고 있었다고 했으니.

먼저 조사하고 있었다고? ◀

왜? ◀

나는 편애한테 들은 게 있어서 이러고 있다지만, 쟤는 왜? 가족이 실종되기라도 했나?

내가 주시하는 사이트마다 다 쫓아오길래 그냥 스토커인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다른 인간이었나.

나는 의문을 듬뿍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그날 야근을 하는 바람에 답장은 그다음 날 봤다.

▶ 처음엔 그냥 심심해서 했는데

▶ 점점 상황이 이상해지길래

▶ 실종되는 헌터 비율이 처음보다 늘어난 건 알아요?

▶ 처음엔 그냥 아무나 잡아가는 것 같았는데

▶ 요즘엔 대놓고 헌터 위주로 잡아가

기대도 안 했는데 식견이 제법 높았다. 나는 알고 있는 정보를 조금 풀어도 될 것 같다고 판단했다.

글 올린 사람들이랑 갠메 나누면 ◀

살려 달라는 글 이후에 ◀

인천으로 오라는 메시지 뜬다 ◀

아냐? ◀

‘당분간 감시해 주면 돼. 뭘 하든 상관은 없는데 인천 쪽으로 못 오게 막아 줘. 너도 인천엔 오지 말고.’

‘인천?’

‘응. 거기 요즘 흉흉하거든.’

PK도 저번에 지나가듯 인천을 언급했다. 인천에 진짜로 마계가 열린 건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PK가 한 말이면 신뢰할 만한데.

게다가 PK가 부탁한 게 비눗방울이 인천에 가지 못하게 감시하라는 거였다.

이 정도면 인천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봐도 좋았다.

▶ 알지

▶ 그거 미끼잖아

▶ 뭐 인천으로 오라니까 순순히 인천에 가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내가 미쳤냐? 위험한 델 왜 기어 들어가 ◀

▶ 가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 사람 죽는 꼴 또 보기 싫으니까

분명 며칠 전까지는 욕만 조지게 했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인간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말문을 한번 트니 정보를 공유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글 올린 애들이 공통적으로 ◀

사라지기 전에 검은 그림자를 봤다고 했는데 ◀

아냐? ◀

▶ 내가 보기에 이번 사건 범인은 고랭크 헌터야

▶ 배후좌 끼고 저지르는 범죄일 거고

크레이터 터지는 건 어떻게 생각하는데? ◀

▶ 범죄 묻으려면 더 큰 사건으로 주의를 돌려야지

▶ 크레이터 박살 나면 직통 게이트 슝슝 열리고

▶ 온갖 난리가 다 날 거 아냐

▶ 뻔한 수법이죠 뭐

▶ 다른 곳에 시선 쏠리면 좀 잠잠했다가

▶ 좀 사그라들면 다시 일 터뜨리는 거

완전 미친 새끼라고 생각했던 인간은 생각보다 더 그럴듯한 조사를 이어 가고 있었다.

다짜고짜 신상 정보를 요구하길래 보이스 피싱이나 사이비나 다단계나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로 순수하게 날 지키려고 신상 정보를 내놓으라고 한 건가? 그럼 한 자릿수 랭커라는 것도 진짜고?

근데 한 자릿수 랭커가 뭐 하러 이런 짓을 해? 나 말고 다 길드에 소속된 헌터들인데.

한 자릿수 랭커라는 건 그냥 기선제압용 개뻥이겠지. 나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대충 넘어갔다.

당시 하람과 비눗방울이 나란히 지하 훈련장에 갔다가 어디 한쪽 박살 내고 돌아와서 몹시 바빴기 때문이다.

뒤지게 싸워서 작살 난 건 쟤넨데 치료는 왜 내가 해야 하냐.

나는 눈물을 머금고 두 사람과의 대면을 이어 갔다. 정체 모를 미친놈과의 메시지는 그 뒤로도 꾸준히 이어졌다.

▶ 아니 내 말이 맞다니까

니 말이 뭐가 맞아 내 말이 맞아 ◀

형이 분노 조절 장애 좀 고치라고 몇 번을 말해 ◀

범인이 극야라는 헛소리는 짱구를 어케 굴려야 나오는 거냐? ◀

너 극야한테 돈 빌렸어? ◀

아니면 걔가 너보고 자기 길드 오래? ◀

▶ 한 자릿수 랭커라니까 나

▶ 내가 걔한테 돈을 왜 빌려

▶ 나 멀쩡한 길드도 있어 낙원 같은데 절대 안 가

▶ 극야 수상한 거야 개나 소나 다 알잖아 왜 반응이 그런데

▶ 그리고 범인 아니라 범인 후보라고

▶ 그 개같은 형 타령 할 거면 연장자의 모범을 보이던가 좀

대부분 싸우기만 한 것 같지만 그래도 꾸준히 하긴 했다.

이 나이 계란 한 판도 안 된 게 이게 어디서 ◀

넌 장유유서도 모르냐 이 근본도 없는 새끼야 ◀

어디서 인간의 도리도 모르는 천한 게 반말질이야 ◀

▶ 그럼 나이 그렇게 처먹고 6살 어린 동생이랑 말싸움하는 게 잘하는 짓이야?

▶ 공자님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고 그래?

▶ 우리 집 기독교라 장유유서 그런 거 몰라도 되거든?

▶ 엿같은 소리하지 말고 논어나 떼고 오세요

우리집 불교야 이 새끼야 ◀

▶ 그럼 머리 깎고 절로 꺼져

니가 뭔데 내 미래를 결정해 ◀

나 종갓집 장손이야 ◀

우리 집 선산 못 물려받으면 니가 책임질 거냐고 ◀

▶ 넌 그냥 인천이나 가라

사실 정보 공유보단 욕을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사람이 다 그렇지. 이래서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거다.

본명 달고 욕하면 그 순간 현피가 성립되니까.

참 길고 험난한 나날이었다. 돌이켜 보면 김마리 씨로 받은 스트레스 풀 곳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이름 모를 저 미친놈은 참 고마운 친구였다. 어디다 함부로 말 못 할 쌍욕 실컷 하게 해 줬으니까.

야 ◀

(사진) ◀

그러다 우리 관계의 전환점이 온 건 내가 대자연의 계시를 받은 날이었다.

▶ ????

▶ 이걸 왜 줘

돌발 게이트 갔다가 다쳐서 나온 다른 공대원 치료하느라 정신없지, 하람이랑 비눗방울은 자꾸 찾아오지, 때마침 야근인데 대자연이 날 부르지.

순간 다 때려치우고 PK 멱살 잡으러 갈 뻔했다. 마법이 뭐라고 내가 이러고 있어야 하냐.

마법 그게 그렇게 중요해? 물론 중요하지. 훗날을 도모할 거면 당연히 배워야지.

그러나 대자연의 섭리는 너무나도 가혹했고, 나는 골로 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신체 강화가 이렇게나 소중한 거였구나.

특성 없는 삶이 너무 오래전이라 이 고통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법. 나는 지금의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을 살폈다.

지금 가장 생각나는 게 뭐죠?

떡볶이. 달고 짜고 맵고 자극적인 거.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배달앱을 켜고 가끔 방문하던 떡볶이 가게를 찾았다. 눈물 나게도 이미 영업 종료 시간이었다.

인생 사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 빨리 퇴사하든가 해야지.

서러워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홧김에 떡볶이 기프티콘을 사서 주변인에게 몽땅 돌렸다.

예솔이, PK, 네정좋, 러브리스, 편애에 극야, 그리고 그 미친놈한테까지.

돌이켜 보니 왜 주변인이라고 표현한 게 낙원 애들밖에 없냐.

나는 내 절망적인 인간관계에 충격을 받았다. 제라늄처럼 친구 사귀고 다녀야지.

어쨌든 기프티콘은 그 미친놈에게도 전달되었다. 이 친구는 갑작스러운 선물에 생각보다 더 놀란 듯했다.

▶ 이거 왜 주냐니까

▶ 갑자기 미쳤어요?

새벽 한 시에 떡볶이 기프티콘 보내는 인간이 정상으로 보이냐. 나는 감정을 가득 담아 답장을 보냈다.

형 힘들다 ◀

퇴사 하고 싶다 ◀

형은 바빠서 못 먹으니까 너라도 많이 먹어라 ◀

그래도 우리가 남들 몰래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

힐링도 하고 살아야지 ◀

너도 조사 적당히 하고 좀 쉬어라 ◀

힘내고 ◀

응원한다 ◀

지금 봐도 제대로 미친 인간 같았다. 맨정신으로 쓴 건데 누가 보면 술 처먹은 줄 알겠어.

나는 다음 날 아침에 저 메시지를 보낸 걸 후회하며 침대 헤드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런데 이상하지.

▶ 형

▶ 내가 다시 생각해 봤는데

▶ 극야는 확실히 아닌 거 같아

그다음 날부터 저 친구가 날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색깔 잘 아는 친구한테 물어봤는데

▶ 배후좌가 없는 것 같다더라고

당연하지. 걔는 외계인이야. 걔가 배후좌라고.

▶ 행적도 아주 깔끔해

▶ 최측근인 ㄴㅈㅈ도 얌전히 자기 길드에 붙어 있었고

▶ 그래서 형 말처럼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거지 나도

정말 놀라울 만큼 유해진 채팅이었다. 뭐야. 떡볶이 하나에 홀라당 넘어온 거야? 이렇게 쉬운 애였나?

▶ 사실 극야 말고도 생각한 범인이 둘 있거든

누군데? ◀

▶ PK랑 매화나비

매화나비.

나는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닉네임이라고 생각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 배후좌 잘 만나서 갑자기 스타 된 애 아니야?

▶ 매화나비는 색깔 잘 아는 친구한테 부탁해서 조사하고 있어

▶ 대충 결과 나오면 공유해 줄게

▶ 형도 수고하고

유의미한 대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나는 PK랑 매화나비를 범인으로 추측한 이유를 알고 싶었는데, 얘는 결과가 대충 나오면 알려 주겠다면서 말하는 걸 자꾸 미뤘다.

시간이 차곡차곡 흘렀다. 이름 모를 그 친구와는 종종 실종 사건과 관계없는 대화를 나눴다.

▶ 형 나

▶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주제는 주로 연애 상담이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면서 후광이 천사가 어쩌고저쩌고하는 꼴을 보니 제대로 빠진 모양이었다.

▶ 근데 형

▶ 연애 경험은 있어?

▶ 경력 35년짜리 마법사 아니지?

답장을 고민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선빵을 쳤다. 나 마법사인데. 아니지. 지금 마법사 되겠다고 이 고생 중이었으니 아직 마법사는 아니었다.

형 완전 카사노바야 ◀

21세기 의자왕이야 ◀

인기가 너무 많아서 결혼을 못 해 ◀

만인의 연인이랄까⋯⋯ ◀

손가락테크닉 정도면 만인의 연인 맞지. 내 얼굴이야말로 만인의 이상형 아니겠는가.

진실을 모르는 손가락이 컨셉질의 정점을 찍었다.

형 타령 저것도 그냥 컨셉질이었는데 밝히기엔 너무 멀리까지 와 버렸다. 사건 해결하면 적당히 연락 끊고 살아야겠다.

이름 모를 그 친구는 꾸준히 연애 상담을 해 왔다.

말을 붙이고 싶은데 붙이려면 어느 타이밍이 좋으냐, 갑자기 선물을 줘도 되겠느냐 이런 거.

나는 볼 때마다 적당한 조언을 해 줬다. 너무 말 걸고 싶은 티 내지 말고, 갑자기 선물 같은 거 주지 말고.

관심 있다고 표현하는 건 좋은데, 상대가 부담스러워하면 적당히 빠지고.

그리고 일단 상대와 자주 마주치라고 했다. 그래야 뭐든 시도해 볼 기회가 생기지.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얘기해 주고 싶었는데, 요새 비눗방울이 자꾸 따라다녀서 그럴 틈이 없었다.

저 인간은 문제가 대체 뭐냐? 인성? 특성?

뭐든 문제가 있겠지. 그래도 내가 김말이로 있는 이상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비눗방울이 치근덕대는 건 싫긴 한데, 요즘 하람이 안 보여서 좋았다.

나는 꼬박꼬박 김말이 씨라고 부르는 하람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둔 지 오래였다.

어디 가서 조난이라도 당했나. 그럼 기분이 째지다 못해 등선할 것 같았다.

“아, 김마리 씨.”

늦은 오후였다.

새로 터진 크레이터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운 오후.

나는 6층 회의실 앞에서 깊은 자상을 입은 하람과 마주쳤다. 하람은 빙그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찾고 있었는데, 마침 여기 계셨네요.”

꺼두지 않은 휴대폰이 부우웅 진동했다. 나는 뭐 씹은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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