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두 사람 재밌죠? 맨날 저렇게 싸워요.”
제라늄과 민주 두 사람이 투닥대는 틈을 타 옆으로 다가온 반서빈이 작게 소곤거렸다.
“저거 안 말려도 될까요?”
“괜찮아요. 두 사람 다 진심으로 싸우는 건 아니거든요.”
제라늄이랑 민주는 입사 동기인 터라 저렇게 싸워도 여기서 제일 친하단다. 생각도 못 한 tmi였다.
“마리 씨가 오시기 전까지는 제가 팀 막내였는데, 마리 씨 덕에 벗어났네요. 아까 스물셋이라고 하셨죠? 저도 스물셋이에요.”
누가 반서준 동생 아니랄까 봐 슬며시 웃는 얼굴에서 반서준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숙사에서 지내게 되셨다고 들었어요. 저도 지금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거든요. 1101호에 살고 있으니까 곤란한 일이 생기면 찾아오셔도 돼요.”
“곤란한 일이요?”
“뭐, 벌레가 나왔다든가?”
벌레라니. 확실히 심각한 문제긴 하다.
근데 벌레라면 게이트에서 워낙 많이 봐서.
나는 벌레형 몬스터 사체 일부라도 뜯어먹고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걔들은 인간보다 더 컸는데, 인간보다 작은 벌레가 뭐가 대수겠는가.
이쪽으로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나는 악수했던 손을 놓으며 입을 열었다.
“관리가 워낙 잘되는 것 같아서 괜찮을 것 같아요. 그리고 나오면 그냥 잡으면 되죠.”
“의연하시네요. 몬스터 보셔도 충격 안 받으시겠어요.”
“벌레랑 몬스터는 비교도 안 되죠. 크기부터 다르잖아요.”
내 시큰둥한 대답을 들은 반서빈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기 얘기를 꺼냈다. 각성하기 전엔 형 집에 얹혀살았는데, 형이 그렇게 벌레를 싫어하더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벌레 잡기엔 도가 텄거든요. 혹시라도 무서워하실까 봐 말해 봤어요.”
호의를 반송당한 그는 제법 머쓱했던지 뺨을 긁적였다. 반서빈 형이면 반서준이잖아. 그 재수 없는 놈한테 그런 이면이 있었을 줄이야.
하긴 몬스터를 처음 맞닥뜨린 그때도 잔뜩 겁먹긴 했었던 것 같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짝!
가볍게 손뼉을 친 부산우유가 투닥투닥 싸우는 두 사람을 만류했다.
“그만하고 밥 먹으러 가자. 오늘 치킨까스 나오니까 첫 번째로 먹으러 가야 한다면서?”
열심히 나불대던 제라늄이 치킨까스 소리에 입을 닫았다. 민주 역시 입을 꾹 다물었다.
밥 앞에서는 얌전해지는 게 역시 한국인이었다.
조용해진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본 부산우유가 회의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누구지?”
의아한 듯 중얼거린 초코우유가 살짝 앞서 나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문밖으로 어째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단정하게 웃는 낯이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었다. 웃는 남자를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노란색과 보라색의 오드 아이.
“이번에 새로 들어오신 분이 힐러라고 들어서요.”
말을 마친 하람이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팔을 들어 올린다. 얼마 남지 않은 천 쪼가리가 과거에 제가 옷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흔들거렸다.
오, 저거 만나면 도망가라고 했던 인간 아니야? 모두의 블랙리스트, 하람의 등장에 분위기가 개판이 됐다.
나는 피 흘리는 하람과 그 뒤에 구겨져 있는 누군가를 보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문을 향해 다가오는 날 바라본 하람의 표정이 대놓고 굳어졌다.
표정이 무슨, 초면인 사람이 아니라 자주 보던 핑거킹 보듯⋯⋯.
아.
그러고 보니 하람의 특성이 샤먼으로 진화했다고 했지. 아이템이 모습과 특성은 바꿔도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외계인까지 숨기지는 못한단 말인가.
“상처 좀 볼게요.”
하람보다 키도 큰 주제에 하람의 뒤에 숨은 비눗방울이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나는 여전히 굳어 있는 하람을 무시하고 그의 상처에 손을 댔다. 하얀빛이 상처 위를 덮자 상처가 아무는 모습은 다시 봐도 신기했다.
“됐어요.”
특성을 쓰는 건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다. 나는 하람의 상처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뒤로 물러갔다.
“⋯⋯감사합니다.”
여전히 복잡미묘한 표정의 하람이 감사 인사를 건넸다. 뒤에 붙어 있는 걸 보니 그 인간이 이 인간인데, 특성은 다르니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하기야 모습은 바꾸기 쉬워도 특성까지 따라 하긴 어렵지. 눈속임이 쉬운 특성이면 모를까 이런 치유 계열 특성은 더욱더.
하지만 이걸 확인하자고 온 건 아닐 텐데, 높으신 두 분이 굳이 여기까지 행차하신 이유가 뭐지?
나는 어색하게 웃고 있는 하람을 빤히 응시했다. 잠깐 생각해 봤는데,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하람이 사헌 길드 등산 동호회 회장 아줌마처럼 천리안을 가지고 있다면 또 모르겠는데, 하람의 특성은 대놓고 샤먼이었다.
어제오늘 하람과 마주친 적이 없는데 날 어떻게 알고 여길 찾아온단 말인가. 그것도 상처까지 만들어서.
들킨 건 상관없다. 특성도 다르니 적당히 변명을 늘어놓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생각 정리를 마치고 고개를 휙 돌렸다. 시계는 어느덧 열두 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힐러가 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온 건데, 정말이었네요.”
“네.”
“앞으로 자주 뵙게 될 것 같아요. 제 이름은 이하람이에요. 헌터님은요?”
내 이름. 내 이름은⋯⋯.
김마리. 지금은 김마리였다.
“제 이름은,”
하지만 입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건 왜일까. 이 이름이 참을 수 없이 쪽팔리기 때문인가?
나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시계를 흘끔거렸다. 그러자 초코우유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하람아.”
“형.”
“우리 신입이 낯을 많이 가리거든. 일단 우리 밥 먹으러 가려고 했으니까 가면서 얘기하자. 여기 계속 서 있지 말고.”
초코우유가 하람의 어깨를 두드리며 문밖으로 이끌었다. 부산우유가 내 옆으로 살며시 다가와 서는 게 느껴졌다. 답지 않게 입을 닫고 있던 제라늄이 부산우유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다시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하람 형, 우리 신입 장난 아니죠? 저도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래? 먼저 봤어?”
“아뇨. 당연히 지금 봤죠!”
세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떠들며 먼저 나갔다. 정말 눈물겨운 사회생활이었다.
1공대 애들 사내 왕따 당하는구나. 근데 쟤들은 당해도 싼 것 같았다.
“우리도 갈까?”
부산우유가 회의실에 남은 나머지 세 사람을 향해 물었다. 나는 부산우유 옆에 찰싹 붙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문밖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비눗방울과 눈이 마주치지 않게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근데 내 생각엔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나는 아까부터 계속 집요하다 못해 뜨겁기까지 한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저 인간이 대체 어디에 꽂혀서 이런 시선을 보내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치킨까스 다 떨어지기 전에 빨리 갑시다.”
반서빈이 오늘의 메뉴를 언급하며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치킨까스에 꽂힌 민주가 따라 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피는 안 닦아도 되나요? 저러다 마르면 닦기 힘들어질 텐데.”
“그건 다녀와서 생각해요.”
나는 부산우유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회의실을 나왔다.
시선의 부재를 느끼고 뒤돌아보았을 때, 비눗방울은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 * *
으슥한 공동 속 거대한 수림.
토양을 휩쓰는 굵은 빗줄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린다.
“비가 많이 오는군.”
우산을 쓴 두 인영이 대수림을 거닌다.
대륙의 남쪽, 비옥하고 양지바른 탐욕왕의 영토.
넓은 평원부터 비옥한 농토, 온갖 광산까지 모두 가진 그의 왕국은 누구나 군침을 삼키는 노른자 땅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단 하나,
키에에엑-!!
야만족들이 쏟아져 나오는 대수림만 빼고.
“처리할까요?”
투명한 비닐우산을 쓴 PK가 쥐고 있던 우산을 놓았다. 대수림의 야만족 중 하나, 놀 떼가 두 사람을 향해 돌진한다.
“됐다.”
그러나 그들의 돌진은 두 사람에게 닿지 못했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검은 그림자가 놀 떼를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놀 떼가 죽은 자리에 검은 그림자가 눌어붙었다. 길게 깔린 그림자 안쪽에서 무언가가 부서지고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빠득. 콰드득.
그림자의 포식은 오랜 시간 이어졌다. PK의 옆에 서 있던 인영은 포식을 마친 그림자에게 다가가 하얀 실크 장갑을 낀 손을 내밀었다. 슬라임처럼 퐁 솟아오른 그림자가 주인의 손에 몸체를 비빈다.
프릴과 레이스가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빗물에 척척하게 젖어 들었다. 비 오는 날에도, 눈 오는 날에도, 해가 뜨거운 날에도 그녀는 레이스와 자수가 가득한 드레스를 입었다.
‘당신은 왜 수림에서 드레스를 입죠? 다른 엘프처럼 평범한 옷이 활동하기 편할 텐데요.’
‘그대는 이상한 것을 묻는군. 나는 공주니까 격에 맞는 옷차림을 갖추는 것이 당연하지.’
눈부시게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칼, 예쁜 아몬드형 눈과 선명한 군청색 홍채.
색채부터 남다른 그녀는 대부분이 미형인 엘프 중에서도 유달리 돋보이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과거에는 탐욕왕도 그 아름다움을 가치 있게 여겨 몇 번의 자비를 베풀었다고 했으나.
“이번에 끌고 온 인간은 몇 명이지?”
“스물입니다.”
“특성을 가진 개체는?”
“셋입니다.”
현재는 그녀의 종족과 함께 대수림으로 쫓겨난 신세였다.
지울 수 없는 죄를 지은 탓에.
탐욕왕의 종족인 드래곤은 본래 힘으로 다른 종족 위에 군림해 그들을 수탈해 가는 존재.
탐욕왕은 그들의 로드이자 왕으로서 자기 왕국의 모든 개체에게 상납을 받고 있었다. 참고로 상납금과 세금은 별개다.
“이번에는 특성을 가진 개체가 별로 없구나.”
“죄송합니다.”
탐욕왕의 군단장으로 대귀족의 위치에 서 있던 그녀는 상납금을 제대로 내지 못한 죄로 재산과 영지를 몰수당하고 대수림으로 쫓겨났다.
탐욕왕의 형벌은 악랄하게도 연좌제. 그녀의 종족인 엘프는 그녀와 함께 왕국에서 추방당했다.
대수림은 버려진 땅.
토양의 양분을 쓸어내리는 폭우와 지옥 같은 습기가 공존하는 곳. 키 큰 나무들 때문에 해가 들지 않아 늘 어둡고 축축한 곳.
공주인 그녀의 비호 아래 비옥한 영지에서 풍족하게 살아가던 그들이 대수림에 적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엘프들은 끊임없이 죽어 나갔고, 그녀는 빚을 갚고 종족을 부흥시킬 방법을 찾아야 했다.
“됐다.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 나는 나의 왕과 다르게 내 신하에게 자비로우니.”
이 이계의 침략자는 다른 종족을 죽여 제 종족의 부흥을 꾀하고자 했다.
산 자에게서 생명력을 뽑아내 마나로 치환한다. 특성을 가진 개체에서는 더 많은 마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PK가 그녀에게서 받은 특성은 갈취.
이 특성은 자신보다 수준 낮은 자의 생명을 빼앗아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든다.
다른 이의 희생을 토대로 그는 더욱 강해졌고, 저 공주는 종족 부흥의 뜻을 이루고 있었지만,
‘선을 한참 넘었지.’
모든 것에는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는 이 폭주 기관차를 멈출 방법을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