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72화 (72/175)

제72화

힐러.

현실에서나 온라인 게임에서나 한결같은 귀족 직업.

싸우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다칠 수밖에 없고, 그 상처를 치료할 사람은 언제나 귀중하다.

더 많이 싸울수록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는데, 크게 다쳤다고 한세월 누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누워 있는 시간만큼 경쟁자들이 치고 올라오는 게 바로 자연의 섭리.

그렇기 때문에 전치 몇 주짜리 상처를 단숨에 치료할 수 있는 힐러는 더욱 귀중하다.

뭐, 특성의 스펙트럼이 다양하고 그중 치유와 관련된 특성이 나올 확률이 매우 낮아서 이 모양이 된 거지만.

원래 수요가 많은 특성은 어딜 가나 대접받는다.

“와아⋯⋯.”

비눗방울의 연갈색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을 피해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맨날 때려 부수기만 하다가 뭔가를 고치게 되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름 특이한 김마리 씨의 특성은 재생이었지. 전투에서는 직접적으로 써먹기 어려운 특성이다.

전투에 도움 되는 거 하나 없으니 쪼르르 팀원들 따라 게이트 들어가면 뒤에서 구경만 하게 되겠지.

물론 급 높은 게이트라면 불의의 상황을 대비해 힐러가 하나쯤 있으면 좋다. 하지만 그 힐러가 자기 몸도 지키지 못하는 초짜면 팀원들만 힘들어진다.

그래서 힐 특성 가진 헌터들은 던전에 안 들어가고 밖에서 대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특히 랭크 낮은 친구들일수록 더.

새벽은 이 김마리를 어떻게 써먹으려고 영입했을까? 밖에서 상주하는 응급 팩? 던전에서 힐하는 프로 힐러?

뭐든 힐 노예인 점은 다르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적성에 맞을 것 같았다. 나는 주로 내 딜 미터기를 보며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다. 남들 지원하는 데서 보람을 느끼는 게 아니라.

그리고 김마리 씨도 그건 나와 다르지 않았는지, 헌터 닉네임이 아주 특이했다.

“상세 정보창.”

손목에 건 팔찌 형태의 단말기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창을 띄웠다.

[<상세 정보>

<최고의힐러는딜러>(A-)

-> 특성: 재생(A)

-> 스테이터스: 체력 F-(Lv. 11), 힘 F-(Lv. 7), 민첩 F(Lv. 22), 행운 S(Lv. 411)

-> 랭킹: -

-> 업적: -

-> 정복도:

<교만왕의 영토 정복도: 0%>

<인색왕의 영토 정복도: 0%>

<시기왕의 영토 정복도: 0%>

<분노왕의 영토 정복도: 0%>

<색욕왕의 영토 정복도: 0%>

<탐욕왕의 영토 정복도: 0%>

<나태왕의 영토 정복도: 0%>

]

난 닉네임만 이상하지 이름은 멀쩡한데, 이 사람은 이름도 닉네임도 이상하다.

나는 행운이 너무 높은 나머지 적성을 찾지 못한 그녀를 동정했다.

물론 저 높은 행운 수치도 노답 오브 노답 PK에게 걸린 나머지 종잇조각이 되어 버렸다는 게 마리 씨 인생의 핵심이다.

* * *

“안녕하세요, 마리 씨.”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 초코우유가 새로운 동료를 맞이하며 웃었다.

“네. 안녕하세요.”

나는 신입 된 도리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동시에 나머지 공대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재잘재잘 떠들어 댔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특성이 무려 재생이시라고요! 저 A급 힐러 처음 봐요!”

“초면에 그렇게 들이대면 어떡해, 바보야. 안녕하세요. 저는 강민주예요. 저쪽은 박선우.”

“안녕하세요. 저는 반서빈이에요. 새로운 팀원이 온다고 해서 다들 들떴나 봐요.”

다들 잘 지냈는지 얼굴색이 좋아 보였다. 나는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착석했다. 임시긴 하지만 어떤 팀에 소속된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럼 본격적인 환영회 전에 앞서,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하겠습니다.”

6층 회의실 상석에 앉은 초코우유가 입을 열자 부산우유가 크게 손뼉을 쳤다. 다들 따라 치길래 나도 따라 쳤다.

초코우유가 준비한 오리엔테이션은 초보 헌터를 위한 공략집 같은 느낌이었다. 몽마 같은 몬스터를 만나면 어떻게 대처하고, 조금 특이한 영토에 진입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팀원과 떨어졌을 때, 목숨이 위험할 때, 낯선 헌터한테 목숨을 위협당했을 때 등 위기 상황에 대한 대처가 주를 이뤘다.

이 변신 아이템을 착용 중인 지금은 손가락테크닉일 때처럼 몸으로 때우지 못하니 소소하게 쓸모 있는 이야기다. 나는 초코우유가 풀어내는 각종 주의 사항을 흥미 있게 들었다.

“게이트와 던전 쪽은 다른 공대원도 있고, 길드에서 지급하는 아이템도 있으니 그리 크게 문제가 되진 않을 거예요. 사실 저희 길드는 게이트보단 다른 쪽이 문제거든요.”

“맞지, 맞지.”

“주의할 인간이 산더미지.”

제라늄과 민주가 초코우유의 말에 추임새를 넣었다. 나는 어제 부산우유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어제 예리 선배한테 잠깐 들었어요. 1공대 보면 도망가고, 빨간 머리 보면 도망가고.”

“맞아요. 빨간 머리는 몰라도 1공대는 그림자만 봐도 도망가세요.”

“일단 엮이기 시작하면 답도 없어요. 약간⋯⋯ 자연재해 같다고 해야 하나.”

입 잘 터는 제라늄이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표정이 얼마나 심각한지, 나는 무심코 헛소리를 내뱉을 뻔했다.

아니, 너⋯⋯ 네정좋도 주하형이라고 부르는 사람 아니었냐.

저번에 보니까 반서준도 길마형이라고 부르던데. 보통 인싸인 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뒤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아싸는 평생 가도 이해 못 할 인맥 관리법이었다.

“그럼 누가 제일 위험해요?”

나는 그들의 과장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 엮이기 시작하면 답도 없는 인간이 주변에 한둘이 아니라서 더 놀랄 것도 없었다.

야, 그래도 너희 길드에는 회귀자 같은 건 없잖아. 나는 다른 길드 갔다가 회귀자에 외계인인 자식까지 보고 왔다.

“글쎄요. 다들 만만치 않아서 재기 힘든데. 제일 짜증 나게 하는 거라면 길마형?”

“저는 하람 님이 제일 불편해요.”

제라늄과 민주가 제각기 다른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반서준 짜증 나지. 나도 잘 알아. 하람도 정말 불편하지. 나도 잘 알아.

“형은 누가 제일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이 길드에 오래 있었잖아요.”

“난 다 꼴도 보기 싫다.”

제라늄에게 깜짝 질문을 받은 초코우유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제라늄은 다음 타자로 부산우유에게 물었다.

“누나는요?”

“난 비눗방울.”

“아. 그쪽이 있었지.”

제법 골똘히 궁리하던 부산우유가 예상외의 닉네임을 꺼냈다. 부산우유의 대답을 들은 제라늄이 미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도 비눗방울 님이 제일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3공대의 비눗방울 위험인물 설은 서빈의 대답을 화룡점정으로 진실이 되었다. 비눗방울은 대체 어떤 인간이길래 ‘그’ 반서준과 ‘그’ 하람을 뚫고 위험인물 랭킹 1위가 된 거지?

남들이 욕 실컷 하고 다녀도 별 제재를 가하지 않는 새벽 최대 아웃풋.

나는 멀쩡한 껍데기 뒤에 숨은 알맹이를 궁금해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크게 볼 일 없으니까 괜찮겠지.

지금은 김마리 씨로 변신한 상태고, 김마리 씨는 두 달 뒤에 세상에서 사라질 사람이니까.

결국 핑거킹인 것만 안 들키면 그만 아니겠는가. 김마리 씨가 아직 살아 계신 상태면 유감인 거고.

“말씀 감사합니다. 조심할게요.”

나는 감사 인사로 이 주제에 마침표를 찍었다. 길드의 또라이들을 생각한 건지 안색이 살짝 안 좋아진 초코우유가 다음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으로 저희 공대의 주 임무를 말씀드릴게요.”

길드야 다 그렇지만, 새벽도 공대를 나눠 팀 단위로 움직인다.

S급으로만 이루어진 새벽 1공대는 반서준이 특급 게이트를 대비하기 위해 만든 팀이다.

평소에는 같이 움직이는 일이 없고, 일 있을 시에만 뭉친다고 들었다. 소속 인원은 새벽, 하람, 비눗방울, 그리고 랑.

“1공대를 제외한 다른 공대는 팀 단위로 움직입니다. 앞 번호일수록 베테랑이 많죠. 예전에는 지정된 게이트에 들어갔지만, 돌발 게이트가 급격히 출몰하기 시작한 이후로 정해진 구역을 순찰하는 게 주 임무가 되었습니다.”

초코우유는 서울시 지도를 꺼내 새벽 길드가 맡은 구역을 짚어 주었다. 매일같이 순찰하는 건 아니고 적당히 교대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저희 3공대는 특별한 임무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옆에서 태블릿 PC를 톡톡 두드리고 있던 부산우유가 내 앞으로 그걸 들이밀었다.

태블릿 PC 화면에 떠올라 있는 건 한 영상.

건조한 사막의 던전 안을 배경으로 3공대 소속 헌터들이 몬스터 떼를 잡는다.

제라늄의 화염이 날뛰고, 부산우유의 바람이 불꽃을 확산시킨다.

빛의 창이 하늘에서 쏟아지고, 푸르스름한 궤적이 몬스터를 관통한다.

사막에 존재할 수 없는 식물이 자라나 도망가는 몬스터를 막는다.

영상 안의 화려한 연계 전투가 눈길을 확 사로잡았다. 이거 그거다. 새벽 길드 홍보 동영상.

“저희는 이 길드의 홍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마리 씨가 2공대가 아닌 3공대에 배정된 이유는 이것 때문일 거예요. 아시겠지만 힐러는 매우 희귀해서 주목받기도 쉽거든요.”

태블릿 PC를 가져간 부산우유가 그것 때문에 6층에는 임시 숙소도 있다고 덧붙였다. 영상 올릴 때마다 밤샘을 끝내주게 한다는 모양이다.

“힐러가 생겼으니 조만간 영상 한 번 더 찍겠네요. 오리엔테이션은 이쯤 할까요? 슬슬 점심시간이기도 하고.”

회의실에 걸린 시계를 슬쩍 본 초코우유가 밥 먹으러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들갑 잘 떠는 제라늄이 오늘 점심 치킨까스라고 시시덕거렸다.

“저희 길드 구내식당 밥 맛있어요.”

옆으로 총총 다가온 민주가 넌지시 말했다. 입술을 우물거리는 거 보니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기….”

“네.”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말 놓으셔도 돼요. 제가 여기서 제일 어리거든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떨군 민주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살짝 풀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편하게 불러.”

고개를 휙 들어 올린 민주의 뺨에 화색이 돌았다. 그 모습을 본 참견쟁이 제라늄이 뒤에서 시끄럽게 소리쳤다.

“저도! 저도 마리 씨랑 친해지고 싶어요. 저희 이제 같은 팀이잖아요! 마리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스물셋이요.”

“아~ 제가 두 살 더 많네요. 편하게 선우 오빠라고 부를래요?”

그새 옆으로 다가온 제라늄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민주가 제라늄의 등짝을 퍽 때리며 얼굴을 구겼다.

“개수작 부리지 마. 초면에 그런 소리 하면 어떡해? 불편해하잖아.”

“네. 선우 선배라고 부를게요.”

“마리 씨 사회생활 잘하시네요.”

제라늄을 퍽퍽 때려 밀어낸 민주가 저 인간은 무시하라며 작게 속삭였다. 이 팀 최고 연장자인 우유 콤비는 이 촌극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닌가 보군.

“민주 너도 이제 다시 오빠라고 불러. 형이랑 서빈이한테는 오빠라고 잘 부르면서 왜 나만 아저씨라고 불러? 나 형보다 여섯 살이나 어리거든?”

“나보다 일곱 살 많잖아. 그럼 아저씨지.”

“그럼 형도 아저씨라고 불러야지!”

“응. 그럴게.”

죽어도 오빠라곤 안 부르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제라늄 말투 괜찮은데? 나는 방금 대화를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써먹기로 했다. 그 미친놈이 또 메시지를 보내올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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