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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71화 (71/175)

제71화

날개뼈 아래까지 오는 검은 머리에 서글서글한 인상, 푸른 물감을 짜내 바른 것처럼 짙푸른 눈과 가지런한 미소.

이번에 새벽 길드에 입사하게 된 김마리 씨는 A-급의 힐러였다. 턱걸이로 A를 받았다지만, 그래도 A는 A.

거기에 귀한 힐러기까지 하니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물론⋯⋯ 이 동네 쓰레기한테 잘못 걸려서 인생 피기도 전에 나락으로 가신 모양이지만.

나는 PK에게 건네받은 김마리 씨의 단말기와 나를 이 사람으로 바꿔 준 반지를 보았다.

단말기로는 그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지 온통 ???만 뜨던 이 반지는 끼기만 하면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것도 모자라 그 특성까지 사용이 가능한 미친 아티팩트였다.

‘이거 엄청 귀한 거야. 내 배후좌한테 빌린 거거든.’

‘그 동네 기술력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것도 마법이야?’

‘그건 아니고, 뭐라고 했더라. 노란 눈의 악마가 남긴 다섯 개의 특급 아이템 중 하나라고 했어. 더는 몰라.’

노란 눈의 악마. 노란 눈의 악마⋯⋯.

나는 낯설지 않은 호칭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무슨 눈의 악마 시리즈는 잊을 때만 되면 불쑥 튀어나왔다.

지금까지 네 개 나왔지. 빨강, 노랑, 초록, 보라.

이런 말 하면 좀 그런데 완전 텔레토비 친구들 같았다. 보라돌이, 뚜비, 나나, 뽀. 색깔까지 매치 완벽하다.

‘그러니까 결국 비눗방울 감시를 위해서 위장 취업을 하라?’

‘언더커버 보스 같고 재밌지 않아?’

‘재밌으면 너나 많이 하던가.’

다른 곳도 아니고 새벽 길드 위장 취업이 말이 되는가. 아, 물론 낙원 길드보다는 쉽긴 하지. 거기는 길드장이 회귀자에 외계인이잖아. 설정 과다가 미쳐 버렸다.

본캐로 모자라 부캐까지 파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부계를 판 이 상황. 정말로 괜찮은 건가.

나는 정리가 덜 된 방 안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뒹굴었다. 기숙사랍시고 준 이 50평짜리 아파트는 혼자 살기에 너무 컸다. 심지어 우리 집보다 더 컸다.

‘넌 앞으로 A급 힐러 김마리로 사는 거야. 현장 나가면 너무 노련하게 굴지 말고 적당히 초짜인 척해.’

‘그게 마음대로 되나. 노력은 해 봄.’

저번에 우연으로 새벽 길드 입사할 뻔했는데, 이번에는 진짜로 입사했다. 새벽이랑 뭐 있나. 왜 이렇게 엮이지.

이 정도면 조만간 회귀자한테 뭐 있는 거 아니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그리고 답변으로 당연히 있다는 소리 하겠지. 가장 처음에 비슷한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네가 몇 호실을 받을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 1002호 줄 거야. 1001호랑 1101호는 사람이 살고 있거든. 그 두 개 말고는 전부 비었고.’

‘비눗방울은 어디 사는데?’

‘1001호. 1101호에 누가 사는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비눗방울 감시를 어떻게 하느냐지. 감시하라면서 출퇴근까지 시키는 게 말이 되냐. 복도에 감시 카메라라도 설치할까?

나는 잠시 복도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는 생각을 했다가 그만두었다. 여기 반서준이랑 하람이 자주 드나든다고 했는데, 그 인간들한테 걸리면 끝장이다. 부캐로 모자라 부계 파고 노냐고 시비 들어올 거 생각하면 골이 아프다.

지이잉- 지이잉-

안 그래도 골 아픈데 휴대폰마저 사색을 방해했다.

이번 일 때문에 마련한 업무용 휴대폰이면 대충 무시하려고 했는데, 내 본래 휴대폰이었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켜고 지문을 찍었다.

▶ 이봐요

▶ 나 진짜 참을 만큼 참았거든?

▶ 당신 이러다 죽어

▶ 알아?

누군가 했더니 한 사이트에서 차단했더니 다른 사이트에서 개인 메시지 보내는 미친놈이었다.

나는 우다다 몰려오는 메시지의 바다를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열받는데 얘로 스트레스나 풀까.

내가 죽긴 왜 죽어 ◀

▶ ???????

나 핑거킹이라 안 죽음 ◀

테러하지 말고 ㄲㅈ ◀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별 거지 같은 메시지나 보내고 난리야.

나는 메시지 창을 쭉 밀어 버리고 갤러리에 들어가 그동안 캡처해 둔 정보들을 보았다.

처음에는 캡처까지 하진 않았는데, 대다수의 게시 글이 1~2분 만에 사라지니 어쩔 수 없이 택한 방법이었다.

▶ 님 그거 사칭이거든요

▶ 고소당하고 싶어요?

▶ 개소리 말고 빨리 신상이나 까

▶ 그러다 진짜 죽어

그 와중에도 메시지는 끊임없이 떴다. 나는 이제 간절해 보이기까지 하는 메시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너무 귀찮게 구는데 대충 거짓 정보 알려 주고 말까. 어차피 넷상에서 그런 거 속이는 거 흔하고.

ㅋㅋ먼저 사칭한 게 누군데 ◀

그렇게 랭킹 한 자릿수 헌터들 사칭하고 다니면 좋냐? ◀

▶ 아니 ㅅ11ㅂ

▶ 진짜라고

ㅗ ◀

남한테 신상 까라고 우겨 댈 거면 너부터 까든가 ◀

요즘 것들은 버르장머리가 없다더니 ◀

싹수 드러운 거 봐라 ◀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개빡쳐서 급발진할 메시지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개빡쳐서 기절했는지 이 미친놈은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당신의 긍정적인 사이버 활동. 평화로운 세계를 지킵니다.

나는 보다 더 클린한 지구와 러브 앤 피스를 기원하며 몸을 일으켰다.

지이잉-.

아무래도 줄다리기는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 내 나이?

▶ 스물아홉이다 이 새끼야

▶ 넌 몇 살인데 말하는 꼬라지가 그따우ㅡㄴ데

▶ ㅅ11ㅂ 내가 진짜

▶ 좋은 일 하겠다는데 개빡치게 만드네

사람이 스물아홉이나 처먹고 이렇게 산단 말인가. 나는 표정을 팍 구기곤 자판을 마구 두들겼다.

어 그래 오빠는 35야 ◀

어따 대고 반말이야 어린노무 새끼가 ◀

이 오빠는 말이야 나보다 어린 것들한텐 관심이 없어요 관심이 ◀

구애 그만하고 잠이나 자라 ◀

인생 그렇게 살지 말고 ◀

나는 스물아홉 됐을 때 저러지 말아야지. 물론 그때 가서 봐야 할 일이다. 원래 계획이란 건 미루는 게 제맛 아닌가.

▶ 오빠 같은 소리하네

▶ 나 남자거든 이 새끼야

▶ 그리고 구애 아니라고

▶ 내가 너 같은 놈이라도 목숨 붙여 주겠다고 말하잖아 ㅆ11ㅂ

▶ 한번 말하면 말귀를 제대로 들어 처먹으라고

상대는 어지간히 할 게 없는지 꾸준히 메시지를 보내 왔다. 진짜 귀찮게.

나는 느릿느릿 마지막 메시지를 적었다. 적당히 하고 떨어져라 좀.

응 그래 이 형아는 ㅈ달린 것들한테 관심이 없어요 ◀

뭐 할 거 없는 백수인가 본데 열심히 살고 ◀

형은 일하느라 좀 바쁘거든? ◀

심심하다고 이 형한테 껄떡대지 말고 ◀

잠이나 처자고 ◀

메시지를 보고 울컥한 상대가 또 다른 메시지를 쓰는지 ⋯표시가 떠 있었다.

나는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칼같이 차단을 박았다. 누가 어디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착각?

아이고, 속 시원하다. 왜 사람들이 굳이 시비를 걸고 키배를 뜨는지 알겠다. 다 재밌어서 그러는 거다.

인간 하나를 박살 내고 나니 다시 살아갈 용기가 생겼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변신 아이템을 끼고 거실로 나왔다.

‘기숙사 들어가면 내부 구조 파악하고 연락해 줘.’

‘그건 왜?’

‘1001호나 1002호나 내부 구조는 비슷할 거 아니야.’

짐을 다 풀기 전에 PK가 부탁한 것부터 하는 게 좋겠지. 나는 카메라 앱을 켜고 내부를 꼼꼼하게 찍었다.

쾅쾅쾅-!!

호랑이도 말하면 나온다고, 일에 착수하기 무섭게 맞은편 집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소리만 듣고 판단해 보면 문이나 벽을 걷어차는 듯했다. 여긴 방음도 잘 될 텐데 뭐 얼마나 세게 처박는 거야.

소음이 이렇게 심하니까 사람들이 이 기숙사를 꺼리지. 소음도 오지는데 이상한 인간들이 상시로 방문한다고 생각해 봐라. 여기서 살고 싶은지.

‘마리 씨도 아마 집 구하고 싶어지실걸요? 그 기숙사에서 한 달 넘게 버틴 건 딱 한 명뿐이거든요. 다들 방 구해서 나갔어요.’

부산우유 언니 말이 맞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 간절히 이 기숙사를 나가고 싶었다. 이 기숙사에서 한 달 넘게 버텼다는 사람은 대체 누구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한 사람이었다.

아마 1101호 사는 사람이겠지. 나는 정체불명의 멘탈 미인을 적당히 추리하며 작업을 마쳤다. 작업 중에도 쾅쾅쾅 소리는 끝없이 이어졌다.

“미친놈인가⋯⋯.”

비눗방울 저거 저번에 카페에서 봤을 땐 그렇게 안 봤는데, 성격 진짜 끝내준다. 나는 지갑과 단말기를 챙기고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

기숙사에서 시간에 맞춰 식사를 제공한다고 적혀 있긴 했으나, 주마다 신청하는 거라 오늘 당장 먹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먹을 거 사러 나갔다 오면서 필요한 물건도 적당히 사 와야겠다.

나는 필요한 물건을 적당히 꼽아 보며 현관문을 열었다.

끼이익-

불 꺼진 복도에 문 여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내가 문을 그렇게 세게 열었나?

나는 고개를 돌려 문을 한 번 확인하곤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짝 얼어붙은 연갈색 눈이 갈 곳을 잃고 흔들린다. 두 손으로 맞은편 집의 문을 꽉 붙든 비눗방울이 곧장 고개를 푹 숙인다. 깨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 바닥에 점점이 떨어졌다.

“⋯⋯.”

“⋯⋯.”

침묵만 흐르는 복도가 지나치게 싸늘하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는 게 웃기다. 이게 무슨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아니고.

누구 한 명이 먼저 움직이면 이 기묘한 분위기가 깨질 것 같았지만, 나도 비눗방울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눗방울의 이마에서 떨어진 피는 이미 복도 바닥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이 침묵은 어디까지 가는 걸까?

나는 바닥을 붉게 물들인 피를 바라보며 깨달았다. 내가 먼저 움직이지 않으면 평생을 이렇게 있겠구나.

“저기.”

평생 이러고 있는 건 좀 오버다. 나는 내 집 문을 쾅 닫고 입을 열었다. 동시에 비눗방울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네?”

말 한마디 하는 데도 벌벌 떠는 게 마치 궁지에 몰린 초식 동물 같았다. 나는 짐을 나르느라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물었다.

“혹시 치료가 필요하신 거면 도와드릴까요?”

“아⋯⋯.”

“이마 말이에요. 당장 치료가 필요해 보이셔서요.”

고개를 아래로 푹 떨궜던 비눗방울이 시선을 살짝 올렸다. 천천히 올라가는 고개를 타고 계속 피가 흘렀다.

“아니에요. 그렇게 큰 상처도 아니고⋯⋯.”

문 뒤에 숨은 비눗방울이 입술을 우물거리며 말한다. 오~ 위층에서 말해도 저것보단 잘 들리겠는데?

나는 잔뜩 쫄아 있는 비눗방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가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비눗방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키만 멀대 같이 큰 비눗방울은 치료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의 앞까지 다가간 나는 우선 손가락을 까딱여 고개를 내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제스처를 본 비눗방울은 살짝 망설이더니 얼마 안 가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았다. 나는 그의 찢어진 이마에 손가락을 얹고 김마리 씨의 특성을 사용했다.

상처 부위에 하얀빛이 맴돌더니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와⋯⋯.”

밑에서 비눗방울의 짧은 탄성이 들렸다. 나는 상처 치료를 마치고 상처가 있던 부위를 살핀 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우연히 마주친 비눗방울의 눈동자가 동경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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