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70화 (70/175)

제70화

새벽의 비눗방울. 새벽 길드 최고 아웃풋.

뭐로? 밥값 못하는 거로.

그의 방구석 폐인 일화는 전 국민이 알 정도로 유명하고, 그의 셀프 감금 일화는 외국인들도 알 정도로 유명하다.

요즘 K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게 인기라더니, K음침 집돌이 이미지까지 외국에 알리고 난리야.

그래도 뭔가 알리긴 했다는 점에서 국위 선양을 하긴 했다. 저 인간 상사는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지만. 반서준을 고통 받게 하는 점이 정말 대단하다.

랭킹 한 자릿수 헌터면서 온갖 커뮤니티에서 까이고 다니는 비눗방울은 개백수 밥버러지라는 그 별명에 걸맞게 외출을 극도로 혐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내가 살아서 비눗방울 외출한 꼴을 보다니. 이런 걸 보통 기적이라고 하지 않나?

나는 무심코 로또 1등 당첨되는 상상을 했다가 포크 부러지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과하게 힘을 줬더니 똑 부러져 버렸다.

“포크 가져올게.”

부러진 포크에 겁먹은 PK가 무서운 속도로 자리를 떴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비눗방울의 동태를 살폈다. 아주 평범하게 주문 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카페의 단골이라더니, 메뉴판도 보지 않고 주문을 마친다. 옅은 색이 유난히 두드러지는 연갈색 머리카락은 비누로 머리 감은 인간처럼 뻣뻣해 보였다.

살짝 창백한 안색의 비눗방울은 제게 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입술을 잘근거리며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 자판 위를 누비는 손가락이 빛처럼 빠르다.

지이잉-

때마침 바지 주머니에 꽂아 둔 휴대폰이 진동한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켰다.

▶ 그래서 제 말은

▶ 지금 실종 사건을 조사하는 사람들끼리 뭉칠 필요가 있다는 거죠

▶ 며칠 봐서 아시겠지만 지금도 사람이 실종되고 있다니까요?

뭐 엄마한테 문자라도 왔나 했더니, 며칠 전부터 개인 채팅 테러하는 미친놈이었다.

ㄴ 나 ㄲㅈ 따위로 답장 몇 번 해 줬더니 악착같이 들러붙어서 징징거린다. 그래서 내가 쟤랑 손잡아서 이득될 게 뭔데. 쓸 만해야 손을 잡든 말든 하지.

그런데 난 쟤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그럼 신경 쓸 이유도 없는 거지.

나는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도로 꽂아 넣고 PK를 기다렸다. 이 새끼는 포크를 만들어 오는 모양이다. 철 캐러 광산 갔냐?

포크가 없으니 먹을 수 있는 게 커피뿐이었다. 나는 차가운 커피를 연거푸 들이키며 비눗방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눗방울은 여전히 휴대폰 화면에 코를 박고 있었다. 주변 시선을 느낄 때마다 움츠러드는 게 미모사 같다.

저렇게 움찔거릴 거면 그냥 집 밖으로 안 나오는 게 훨씬 좋지 않나? 나는 아직도 진동하는 휴대폰을 갖다 버리고 싶은 충동을 눌러 참았다.

“나 왔어.”

포크를 만들어 온 인간이 웃는 얼굴로 자리에 착석했다. 나는 시선을 견디다 못해 다시 모자를 주워 쓰고 있는 비눗방울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 배달 안 돼?”

“응. 포장만 된다는데?”

“그래서 저게 저기서 쪼그라들고 있는 거고?”

나는 검지를 곧게 펴 비눗방울 쪽을 가리켰다. 내 손가락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PK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히키코모리도 먹고 살아야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말 몰라?”

쫄리면 집에서 짜장면이나 시켜 먹을 것이지, 뭔 카페까지 나오고 그래.

어지간하면 이런 말까진 안 하는데 휴대폰 잘~ 하다가 시선 느낄 때마다 흠칫거리는 게 안쓰럽기 짝이 없다. 생긴 건 멀쩡한데, 왜 저런다냐.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게 바로 내로남불?”

잠깐 말이 없던 PK가 웃는 얼굴로 개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한쪽 슬리퍼를 곱게 벗어 손에 쥐었다.

“네 배후좌 곁으로 가고 싶어?”

“아니. 슬슬 배부르지 않아? 포장해 달라고 할까?”

“말 돌린다고 안 때릴 것 같냐.”

말을 마치기 무섭게 PK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운터까지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 꼴이 퍽 웃겨서 봐주기로 했다.

지이잉-

주머니에 꽂아 둔 휴대폰이 끊임없이 진동한다. 나는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으며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 와 진짜 돌겠네

▶ 이거 가벼운 사건 아니라니까?

▶ 당신 자꾸 내 말 무시하는데

▶ 그러다 큰코다치는 수가 있어

▶ 당신 내가 누군지 알아?

▶ 나 랭킹 한 자릿수 랭커거든?

단순한 미친놈인 줄 알고 얌전히 보고만 있었는데, 개뻥이 너무 심하다.

이 웹 사이트 용병 뛰는 애들이나 가입하는 곳인데, 한 자릿수 랭커가 이런 사이트에 왜 가입해? 걔들은 다 길드 있는 애들인데.

▶ 자꾸 제 채팅 무시하시는데

▶ 제가 지금 얼마나 상처받고 있는지

▶ 몰라서 이러시는 거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신 당신 이러면서 반말을 갈기더니 이번엔 갑자기 존대를 쓴다. 저건 무슨 지킬 박사와 하이드인가.

나는 미친놈의 채팅에 대답하진 않고 채팅 창을 바라보기만 했다. 채팅 창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 제가 지금 그쪽 때문에 밥도 안 넘어가고

▶ 이번에도 사람이 죽었나 너무 걱정되고

▶ 이틀씩 채팅 확인 안 할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프고

▶ 그쪽이 제 맘을 알기나 하세요?

내가 네 마음을 어떻게 알아, 이 정신 나간 새끼야….

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올라오는 채팅을 읽었다. 어느새 직원을 끌고 온 PK가 남은 타르트를 다 포장해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 아무튼 자꾸 이러면 곤란해요

▶ 좋은 말로 할 때 신상 정보 불어요

▶ 그래야 비상시에 내가 찾아가든가 하지

“이 새끼 진짜 미쳤나.”

나는 미간을 팍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PK가 그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나 또 무슨 짓 했어? 한 거 없는데?”

“너 말고 정신 나간 놈 하나 더 있어.”

그것도 아주 제대로 돌아 버린 새끼. 내 인생은 악천후가 왜 이리 심하냐. 먹고 살기 힘드네.

욕한 대상이 자신이 아닌 걸 확인한 PK가 먼저 나가 있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다.

나는 굳이 중지로 자판을 꾹꾹 눌러 답장을 보냈다.

ㅗ ◀

니가 랭킹 한 자릿수 랭커면 난 손가락테크닉임 ◀

물론 쟤가 랭킹 한 자릿수 랭커가 아니더라도 나느 손가락테크닉이 맞다.

엿 한 번 시원하게 날리고 나니까 속이 후련했다. 나는 자기가 랭킹 한 자릿수 랭커라고 주장하는 미친놈을 차단박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를 나가다 슬쩍 본 비눗방울은 기이하게도 지 대가리를 테이블에 처박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신이 많이 아픈가 보다. 이래서 생긴 것만 멀쩡한 인간들은 곤란하다니까.

나중에 반서준 만나면 네 팀원이 공공장소에서 발광했다고 알려 줘야겠다.

정말 아름다운 마음씨의 모범 시민이 아닐 수 없다.

* * *

PK가 떠맡긴 비눗방울 감시 업무의 핵심은 ‘비눗방울이 인천으로 가지 않게 막기’다.

‘근데 비눗방울이 집 밖으로 나가기는 해?’

‘나도 그 생각해 봤는데, 혹시 모르니까.’

PK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이 일 하나만을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는 건 알겠다.

“안녕하세요, 마리 씨. 오늘이 입사 첫 날이시죠?”

방긋 웃는 얼굴의 부산우유가 내 손에 있는 짐을 가져가며 말했다. 나는 뻣뻣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입을 열었다.

“네. 처음입니다.”

내 목에서 내 목소리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실전에서 어색한 티 내면 안 되니까 따로 연습까지 했는데도 아직 어색하다.

“저는 앞으로 마리 씨가 속할 3공대 소속의 하예리예요. 예리 언니나 예리 선배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네. 예리 선배.”

“기숙사 신청하셨다고 들어서 마중 나왔어요. 출근은 내일부터니까 오늘은 짐 정리하고 쉬세요. 이건 막 입사한 새내기 헌터를 위한 안내 책자인데, 읽어 두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오늘도 눈부신 미모의 부산우유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설명을 시작했다.

“기숙사 신청하셨다고 해서 조금 놀랐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돈 생기면 보통 집부터 사잖아요?”

“네, 맞아요. 보통 그렇죠.”

“그래서 저희 기숙사는 조금 한적한 편이에요. 길드에 소속된 헌터의 기숙사와 다른 직원 분들의 기숙사가 따로 분리되어 있거든요.”

헌터는 고급 인력이라 특별 대우 해 준다는 건가. 이런 점은 마음에 들었다.

“저희 회사 기숙사는 다른 곳보다 좋은 편이에요. 회사랑도 가깝고, 넓고 한적한 데다 밥도 잘 나오고요. 아, 청소나 빨래 같은 가사일 서비스도 있어요. 책자의 기숙사 항목 보시면 더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까 관심 있으시면 한번 살펴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네, 네.”

“그런데 살아 보시면 아시겠지만, 거기 살면 좀 개같아요.”

예, 예? 방금 뭐라고 하셨죠. 저 잠시 환청을 들은 것 같은데.

나는 돌처럼 굳은 얼굴로 부산우유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방긋 웃는 그녀의 얼굴엔 이유를 알 수 없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까 들은 육두문자는 잘못 들은 게 아닌 모양이다.

“마리 씨도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 길드에는 아주 심각한 방구석 껌딱지가 하나 있거든요.”

“아, 그.”

“네. 비눗방울이요. 그 인간이 기숙사에서 통 나오지를 않아서, 길드장이랑 하람 씨가 기숙사를 뻔질나게 드나들어요. 참고로 1공대의 저 세 분은 사람을 몹시 화나게 하는 재능이 있답니다.”

부산우유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줬다. 아무래도 힘내라는 제스처인 것 같았다.

“이건 덤인데, 편안한 길드 생활 하고 싶으시면 1공대 인간들이랑 상종도 하지 마세요. 마주치면 그냥 도망가세요.”

“그렇게 도망가도 되는 건가요? 그래도 다 저보다 직급이 높으실 텐데.”

“저희 길드는 길드장 빼고 상하 관계가 없으니까 도망가셔도 괜찮아요. 나중에 뭐라고 하면 저희 공대장이 도망가라고 했다고 변명하시면 돼요.”

공대장이면 초코우유인가. 그렇게 남의 핑계 대고 도망가도 되나.

사근사근한 목소리의 부산우유는 정말로 날 걱정해서 이런 말을 해 주는 것 같았지만, 내용이 보통 내용이 아닌지라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손가락테크닉으로 봤을 땐 이런 사람 아니었는데, 위치가 달라지니까 또 다르게 보이는구나.

나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부산우유는 정말 열성적으로 길드 생활 팁을 알려 주고 있었다.

“2공대에는 괜찮은 사람도 꽤 있는 편인데⋯⋯ 혹시라도 머리 빨간 사람이 말 걸면 도망치세요.”

“네.”

“가끔 다른 길드 사람들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을 텐데, 허공에서 사람이 나타나면 즉시 도망가시는 게 좋아요.”

“어⋯⋯ 왜요?”

“네정좋한테 찍히면 답도 없거든요.”

열성적으로 알려 주는 건 좋은데, 왜 다 도망치라는 말밖에 없을까. 나는 대체 무슨 퀘스트를 수락한 걸까.

이게 무슨 나폴리탄 괴담도 아니고. 나는 ‘보면 도망쳐야 할 인간 리스트’를 만들어 주고 있는 부산우유를 보며 과거의 그릇된 선택을 절절이 후회했다.

인간 주제에 마법은 무슨 마법. 그냥 집에서 다리 뻗고 잠이나 잘걸.

“자. 여기 1002호를 쓰시면 돼요. 푹 쉬시고, 내일 다시 뵐게요.”

그래도 부산우유가 나름 멀쩡한 사람인 것 같아서 다행이다. 이상한 사람 피하라고 경고도 해 주고.

“아, 맞다.”

내 짐을 내게 건네주고 몸을 돌리던 부산우유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야잠 받으셨죠?”

“네. 받았어요.”

나는 내 트렁크 안에 있을 그 구린 야잠을 떠올리며 말했다. 무슨 대학생도 아니고 단체로 야잠을 맞춰 입어. 밖에서 입고 다니기 너무 쪽팔리지 않나.

“그거 출근할 때마다 꼭 입으셔야 해요.”

“⋯⋯예?”

부산우유의 까만 눈에 동공 지진이 온 내 모습이 비쳤다. 부산우유는 그런 내게 안쓰러운 시선을 보냈다.

“저희 공대의 주 임무가 길드 홍보라서요.”

“⋯⋯.”

“퇴근하실 때까지 계속 입고 계셔야 해요.”

“⋯⋯.”

“너무 싫어하진 마세요. 나름⋯ 장점도 있어요. 온도 조절도 되고, 사람들이 새벽 길드 3공대 소속이라는 거 바로 알아봐 주고⋯⋯.”

장점보다 단점이 더 큰 것 같았다. 부산우유는 그렇게 폭탄을 던지고 떠났다.

마법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으로 돌아갈까. 나는 기숙사 1002호 앞에 우두커니 선 채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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