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나는⋯⋯.”
흩어지는 목소리가 아득하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밤바다가 창을 쓱 닦은 것처럼 사라진다.
나는 사라지는 것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잡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나는 여전히 꿈을 꾸는 중이었다.
차르륵. 비디오 빨리 감기를 하듯 바닷가의 모습이 마구 넘어간다. 장면이 멈춘 건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던 밤바다에 한 사람의 실루엣만이 보인다.
별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두 개의 달이 뜬 밤이었다.
그때와 조금도 변함없는 얼굴의 남자가 검은 반지를 쥔 채로 수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무표정한 낯이 얼핏 보면 시체 같을 정도로 창백했다.
“약속할게. 네 소원을 이룰 때까지 멈추지 않기로.”
은은하게 풍겨 오는 수선화 향이 과거를 연상케 했다. 한 송이의 수선화를 손에 쥔 극야가 반지에 입을 맞추며 웃었다.
“함께 거닐자. 반복되는 겨울 속에서.”
이는 바람에 꽃잎이 흩어진다. 극야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바닷가에서 홀로 걸었다.
“다시 봄이 올 때까지.”
멀어지는 뒷모습이 사무치게 공허하다. 나는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이켜 보니 완전 개꿈이다.
* * *
인생 살면서 로판식 빅 이벤트가 터질 확률이 몇 %라고 생각하시는지.
“너 대체 왜 그래?”
나는 엄마가 참다못해 물어볼 정도로 뚝딱거렸다. 아니 그, 엄마, 그, 그런 게 있어. 알면 다쳐.
밥을 먹고는 있는데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빌어먹을 주인공 자식. 그런 뒷사정을 자기만 알고 있으면 다야? 당사자한테 알려 주지 못할망정.
물론 나는 그런 애틋한 과거사가 있었다고 홀라당 넘어갈 사람은 아니다.
⋯⋯아마도.
근데 솔직히 얼굴이 너무 엄청나긴 했다. 그 꿈에 나오던 나도 얼굴에 넘어간 게 분명하다.
그 얼굴로 멜로 눈깔을 장착하는데 그걸 누가 버티겠냐고. 나는 내 삶과 운명에 대한 심오한 고찰을 시작했다.
엄마가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라고 했는데. 게다가 극야는 포지션상 이 동네 주인공인데.
잡생각이 많아지니 입장이 애매해졌다.
조금 친절하게 대해 주는 거야, 별일 아니지만, 인생 nnn⋯⋯ 차 앞에서 긴장의 끈을 놨다간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하. 먹고 사는 게 이렇게 힘들었던가. 나는 짜장밥을 퍼먹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맞은편에서 짬뽕 국물을 마시던 외계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사람 불러 놓고 한숨을 쉬어?”
“넌 몰라. 내가 얼마나 복잡한 심정인지.”
“웃기고 있네.”
싸가지를 짬뽕 국물에 밥 말아먹은 편애가 홍합 껍데기를 빼며 빈정거렸다.
야, 이게 다 너희 길드장 때문이거든? 나는 불만을 씹어 삼키며 전투적인 식사를 했다. 이 집 크림새우 예술이네.
“그래서 나만 부른 이유가 뭐야? 계약할 거야?”
마지막 하나 남은 크림새우를 홀라당 집어먹은 편애가 모자를 눌러쓰며 물었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짜장 소스를 박박 긁으며 대답했다.
“그냥 궁금한 거 있어서. 너랑 계약하면 외부 차원에서 게이트 여는 것처럼 우리 쪽에서 게이트 열고 나갈 수 있어?”
“가능하긴 하지. 저번에 탐욕왕 정원에도 다녀왔잖아.”
“맞다. 그때 죽었는데, 상태는 좀 괜찮고?”
“빨리도 물어본다.”
다시 한번 빈정거린 편애가 그릇을 들고 국물을 들이켰다. 저 새끼 말하는 뽄새 보소. PK가 따로 없구만?
사실 밥 사 준다고 해 놓고 중국집에 데려온 게 무리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사무치게 짜장 밥이 먹고 싶은 날이었다.
비싼 건 비싼 거 나름의 맛이 있지만, 싼 건 또 싼 거 나름의 맛이 있는 법이지. 이걸 저 외계인이 알긴 할까요? 한국인이 아닌 관계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건 무리수였을지도 모른다.
“복구에 다섯 시간쯤 걸렸나? 계약자가 있었으면 몇 초 만에 복구했을 텐데.”
“다섯 시간도 빠른 거 아닌가? 신기하네.”
“새삼스럽게.”
국물까지 말끔하게 비운 편애가 젓가락으로 빈 그릇을 휘적거렸다. 나는 단무지를 우물거리며 물었다.
“계약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뭐야?”
“기준?”
“굳이 나한테 매달리는 이유가 있나 싶어서. 강한 각성자는 나 말고도 있잖아.”
저기 새벽에 반서준도 있고, 같은 낙원에 네가정말좋아도 있고, 외국에도 각성자는 많다.
세상 천지에 계약할 사람이 널렸는데 왜 굳이 나인가 싶다. 난 랭킹을 올리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고, 각성을 애타게 바라는 비각성자도 아닌데.
댠순히 가장 강한 각성자를 바란 건가? 그렇게 따지면 회귀자 쪽이 더 훌륭하지 않나? 물론 극야가 인간이라는 전제 하에 말이다.
“그건⋯⋯.”
젓가락을 꽉 쥔 편애가 뜸을 들였다. 나는 편애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나는 선택지가 너밖에 없어서.”
“엥?”
나온 말은 조금 의아한 말이었다.
“계약자를 고를 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우선 주도권은 더 강한 쪽이 가져. 그러니까 나와 비슷하거나 조금 아래 수준의 계약자를 고르면 큰일 나지. 내 특성을 나눠 받고 나보다 더 강해질 수도 있으니까.”
“주도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말이구나.”
“그래. 그러면 손해거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편애가 이어 말했다.
“그렇다고 너무 약한 계약자를 골라도 곤란하지. 격이 너무 차이나면 그 차이를 메꾸기 위해 계약자가 생명력을 끌어 쓰게 되거든. 그런 경우는 계약자가 아니라 소모품이 되는 거야.”
“그럼 강할수록 강한 계약자를 찾아야 하겠네.”
“그렇지. 근데 마나 파장이 잘 맞다면 격의 차이 같은 건 문제없어. 정말 카피 수준으로 잘 맞다면 말이야.”
그렇군. 종종 비각성자가 로또 당첨되는 상황은 그런 경우인가 보다. 그렇다면 편애는 그 정도로 잘 맞는 인간이 없다는 뜻인가.
“넌 그런 인간이 없고?”
“나랑 마나 파장이 맞는 생물 같은 건 없어. 우리 종족은 생물보단 개념에 가깝거든. 나랑 마나 파장이 맞으려면 인공 생명체여야 할 걸. 근데 그런 건 계약해도 오래 살기 힘들지.”
생 양파를 와작와작 씹은 편애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저 종족은 대체 뭐길래 저런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가. 외부 차원은 한없이 판타지 세계 같다가도 간혹 이상할 때가 있다.
“그럼 나는?”
나는 식초 뿌린 단무지를 집으며 물었다.
“나는 위 조건에 딱 맞아떨어지는 계약자고?”
“그렇게 물으면 정확히 답하기 애매한데. 그래도 우리랑 문제없이 계약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왜?”
“넌 그 반지의 주인이잖아.”
어김없이 나오는 반지 타령. 슬슬 이 반지를 절대 반지로 명명해도 되지 않을까.
“반지에 특수 효과라도 붙어 있어?”
“아니. 인과가 잔뜩 묶여 있지. 별을 건넌 만큼.”
누가 별을 건넜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극야가 회귀한 만큼 반지에 인과가 묶여 있다는 소리였다.
“새삼 대단하네.”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예전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이 근래에 나태왕, 교만왕, 탐욕왕을 줄줄이 만났더랬지.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왕은 나태왕이었다.
지옥의 구멍같이 시커먼 눈동자. 시체처럼 창백한 낯빛과 푸른 손톱.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내가 말해 주지.’
가장 처음의 내가 벌레만도 못했다고 이야기한 왕.
‘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웃는 이를 경계해라. 가장 저열하고 죄 많은 괴물을 피해 도망쳐라. 이번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째로 씹어 먹히기 싫다면.’
그리고 그가 남긴 의미 모를 경고.
탐욕왕도 이 세계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이런 건 대부분 알고 있겠지.
생각해야 할 게 많았다. 선택은 내 몫이었지만, 그 선택을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외부 차원과 관련된, 더 많은 정보.
“게이트는 얼마 간격으로 열 수 있어?”
나는 젓가락으로 빈 그릇을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동시에 편애의 미간이 팍 찌그러졌다.
“게이트는 막 열 수 있는 게 아니야. 내우주에서 열든 외우주에서 열든 똑같이 서클 하나를 요구한다고.”
“서클이 뭔지부터 설명해 봐.”
어디 한번 들어 보자. 나는 태연하게 설명을 요구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편애는 기분이 나쁜지 여전히 얼굴을 팍 구긴 채였다.
“심장에 축적된 마나의 단위. 마나를 많이 받아들이고 쌓을수록 심장에 고리가 생기거든. 그게 많으면 많을수록 강한 개체야.”
“그럼 서클 하나를 요구한다는 건 서클 하나 분량의 마나를 소모한다는 뜻인가?”
“그래. 너희가 영혼석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마나가 집약된 결정체거든. 차원을 비집고 여는 데 쓰이지.”
“그럼 한 번 열고나면 소모한 마나가 다시 쌓일 때까지 열기 힘들겠네.”
“열 때 한 번, 닫을 때 한 번 해서 서클 두 개 분량을 소모해. 닫으려면 무조건 게이트를 연 사람의 마나가 필요하니까.”
“흠.”
왔다 갔다 자주 해야 정보를 얻기 좋은 법인데, 이러면 메리트가 없는 거 아닌가?
나는 종이컵에 냉수를 따라 놓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막 그렇게 쓸모 있진 않은 것 같았다.
“아, 맞다. 궁금한 거 하나 더 있는데.”
그렇지만 이걸 면전에서 말하면 또 계약 왜 안 하냐고 칭얼거리겠지. 말을 돌리는 게 좋겠다.
나는 괜히 진지한 척하며 말 돌릴 거리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약간 의아한 단어가 있긴 했다.
“너 왜 외부 차원과 내부 차원을 외우주랑 내우주로 불러? 우주랑 차원은 다른 거 아닌가?”
자잘하게 궁금했던 건데 큰 이유는 없을 것 같아 대충 넘겼던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지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쓰는 말이야. 짜장면이 짜장면이고 짬뽕이 짬뽕인 거랑 비슷한 거지.”
“그렇구나.”
그냥 고유 명사라 이거지. 나는 기억을 더듬어 저 말을 들었을 때를 떠올려보았다. 아, 다 별거 아닌 느낌으로⋯⋯.
‘용언(龍言)이군요. 외우주의 가장 강력한 종족 특성 중 하나죠.’
으로?
“⋯⋯.”
별거 아닌 외계인 용어를 지구인이?
젓가락 끝이 그릇 표면에 미끄러지며 끽 소리를 냈다. 내가 알기로 극야는 한국인이었다. 이름도 있었고, 신분도 있었고, 가족도 있었고, 일이 터지기 전부터 지구에 존재했다는 물증도 있었다.
“있잖아, 혹시.”
수상하다고 생각했던 기억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그래. 확실히 극야를 외계인이라고 정의하면 모든 게 맞아떨어지긴 했다. 근데, 그러면….
“너희 길드장도 외계인이야?”
외부의 침략자들은 언제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거지?
어떤 방법으로 아직 이어지지 않은 차원에 침입한 거지?
나는 소름이 오소소 돋은 팔뚝을 문질렀다. 오싹한 감각이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그거야.”
종이컵을 집은 편애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불안한 예감은 늘 틀린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