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63화 (63/175)

제63화

시야에 채 흩어지지 못한 금빛 잔상이 아른거렸다. 탐욕왕은 사라졌지만, 아직 눈앞에 탐욕왕이 있는 것만 같았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에서 허우적대고 나니 지금이다. 누가 불쑥 나타나서 ‘형님, 이 새끼 웃는데요? ‘하고 대사 한 번 쳐 줬으면 좋겠다.

그럼 다 꿈으로 치부할 거 아니야. 하지만 소설은 소설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나는 왼쪽 손목 안쪽에 생긴 노란 문양을 쓸었다. 뿔 달린 도마뱀. 드래곤 모양의 문양이었다.

“용언(龍言)이군요. 외우주의 가장 강력한 종족 특성 중 하나죠.”

옆으로 다가온 극야가 약장수가 떠넘긴 물건의 정체를 알렸다. 용언이라고? 그럼 내가 아까 보고 온 게 진짜 드래곤이었단 말인가.

저 동네에 별 이상한 종족이 다 있는 거야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런 메이저한 종족은 몽마나 엘프 이후로 처음인데.

생각해 볼 것이 많이 남은 대화다. 나는 내가 나만 모르는 폭풍에 휩쓸렸다는 것을 절절히 깨닫는 중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굴러다닌다. 이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나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 물었다.

“별을 건넌다는 것은 회귀한다는 뜻이죠?”

짐작이라면 충분히 했다. 확신을 가지고 싶었다.

“네.”

그리고 극야는 내 말에 긍정했다. 수많은 실타래 중 가장 큰 실타래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하하. 짧은 웃음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허망함이 듬뿍 담긴 그 웃음은 지금 내 심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게이트 이후로 내가 사는 세상이 양산형 헌터물 같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회귀자가 내 눈 앞에 버젓이 살아 숨 쉬는 게 리얼 트루? 이게 맞아?

“그럼⋯ 저와 닮은 그 인간은 뭐죠?”

나는 내가 가진 의문 중 두 번째로 궁금한 것을 골라 질문했다. 극야는 예쁘게 웃으며 충격적인 진실을 속삭였다.

“당신이에요.”

“예?”

“당신의 과거이자 미래입니다.”

누가 뒤통수를 후려갈긴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아, 그러니까, 제가⋯ 저 동네에 가서 깽판을 치고 돌아왔다는⋯ 그런 소린가요. 이해가 좀 안 가네.

현재 시점에서 과거로 인식되는 사건인데, 나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 내게 있어 미래가 맞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과거였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왜 편애를 비롯한 악마들과 계약하고, 옛 영주들을 봉인했을까?

왜 반지에 걸고 약속했으며, 미래를 대비해 이 반지를 교만왕에게 남겼을까?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분명히 그런 선택을 한 이유가 있긴 하겠지.

하지만 보통 사람이 미래의 자신이 한 선택을 이해하는 게 쉬운 일이겠는가.

나는 과거의 내가 닉네임을 왜 손가락테크닉 따위로 지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이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런가요.”

속이 울렁거렸다. 반지의 주인이 나라면 극야가 회귀한 이유 또한 나와 관련 있는 건가? 이번엔 또 무슨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오늘만 해도 세 번은 깨진 머리가 더 이상의 정보를 거부했다. 그렇지만 이 인간을 만나러 오는 게 보통 쉬운 일이던가.

물론 오려고 하면 언제든지 와도 저쪽은 환영하겠지만, 이건 내 멘탈의 문제였다. 그냥 보기가 싫다고!

그러니까 미래의 나를 위한다면 오늘 모든 것을 해결하고 가야 했다.

저 회귀자 연대기에 내가 왜 끌려 들어갔는지, 저 인간은 왜 계속 회귀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반지에 얽힌 최초의 약속이 뭔지.

나는 알아야겠다. 반드시.

번개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극야와 눈을 마주했다.

여전히 지독하게 예쁜 얼굴이었다. 누가 나만을 위해 맞춤 커스텀한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내 취향이기도 했다.

물론 저 얼굴 앞에서 취향이 의미가 있겠냐마는.

“회귀한 이유가 뭔가요?”

극야의 하얀 낯 위로 고운 미소가 걸렸다. 나는 그 입술이 열리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쏘아붙였다.

“저와 관련이 있죠? 그래서 지금 제가 이런 일에 휘말리고 있는 거죠?”

내 평화로운 인생은 어디로 가는가. 게이트가 열린 순간 세계의 평화는 저승으로 갔다지만, 나름 괜찮게 유지되고 있던 내 삶의 평화는 어디로 가는가.

좀비 아포칼립스 세계에서의 최초의 감염자와 최후의 생존자 대결은 팥붕과 슈붕, 찍먹과 부먹만큼의 파워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최초의 감염자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 최후의 생존자라는 건 나를 제외한 모두가 죽는다는 건데, 나는 소중한 사람을 잃으면서까지 꾸역꾸역 살아남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주인공은 대개 후자에 속하지. 극야는 회귀자였다. 이 양판소 재질 헌터물에서 주인공일 확률이 가장 높은 개체.

힘이 없으면 살아남기 위해 붙어야 했으나, 힘이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극야와 멀어지다 못해 모르는 척하는 꿈을 꿨다.

제발 이전 세계에서의 나랑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해. 제발.

오늘 올린 기도만 다 합쳐도 신실함 칭호를 얻겠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극야가 입을 열길 기다렸다.

고요한 침묵이 흑백의 공간을 삼켰다.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극야는 웃는 얼굴로 폭탄을 던졌다.

“네.”

내 바람을 무시하다 못해 폭파시키는 무시무시한 폭탄이었다.

“가장 처음의 당신과 약속했어요.”

그 폭탄의 위력이 얼마나 파괴적이었냐면,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로.”

나름 멀쩡하게 유지하고 있던 내 멘탈까지 통째로 날려 버렸다.

“그 순간을 위해 반복하고 있을 뿐이에요. 다른 뜻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나는 내가 그동안 강철 멘탈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유리 멘탈이었을지도 모른다.

강철도 미친 듯이 내리치면 모양이 바뀔 텐데, 유리 멘탈은 오죽하겠는가. 나는 내 멘탈이 와장창 박살 나서 흩어지는 환상을 봤다. 어디서 소리 안 들립니까? 내 인생 구렁텅이로 빠지는 소리.

주인공의 회귀 이유가 되다니. 이게 무슨⋯⋯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나는 충격을 금치 못하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극야의 예쁜 눈이 멍청한 표정을 한 날 비추고 있었다.

“그,”

“네. 말씀하세요.”

“그 약속이 뭔데요?”

그 약속이 대체 뭐길래. 가장 처음 세계의 나는 저 인간이랑 대체 무슨 약속을 했길래 지금 내가 이런 고통을.

아,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연좌제? 물론 내가 나 자신에게 책임을 물린 거라 연좌제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래서 더 미쳐 버릴 것 같다.

한동안 멀쩡하던 극야가 질문을 듣고 멜로 눈깔을 장착했다. 아련함이 가득 묻어나는 눈이 저기 아득히 먼 곳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건⋯⋯.”

“⋯⋯.”

“이 세계에 달이 두 개 뜨는 날, 알게 되실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극야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소득 없이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 * *

사실 오늘 들은 걸 몽땅 합치면 소득이 없다기보단 과다한 쪽에 가까웠다.

나는 야광별을 붙여 둔 방 천장을 멀뚱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달이 두 개 뜨는 날. 우리 차원에는 달이 오직 한 개뿐이다.

외계인들이 흔히 내뱉는 달이 두 개 뜨는 날이라는 건 두 차원이 합쳐지는 날이라는 뜻이다.

오늘 얻은 정보는 총 세 개. 극야는 회귀자며, 극야의 회귀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는 이 알 수 없는 반지의 주인이다.

빛을 흡수하는 검은 반지는 캄캄한 밤에도 유독 까맸다. 나는 반지와 대조되게 은은한 금빛으로 빛나는 드래곤 문양을 보았다. 용언이라는 건 알았지만 어디에 어떻게 쓰는 특성인지는 몰랐다.

그럼 여기서 문제. 외계인인 편애와 아는 사이고, 다른 차원의 정보를 잔뜩 알고 있는 극야는 인간일까요, 아니면 외계인일까요?

물론 헌터물 주인공이면 당연히 인간이겠지만, 헌터물도 결국 판타지의 일종이니까. 판타지라면 슬라임 주인공도 있는데 다른 종족이 무슨 문제겠어. 과거에는 드래곤 주인공이 유희하는 내용이 인기기도 했고, 정령왕이나 마족 같은 것도 있잖아.

살짝 떨어진 야광별 끄트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괜한 의심일지도 모르지. 편애와 다르게 극야는 전쟁이 터지기 전에도 지구에 있었으니, 당연히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게 옳다.

하지만 그 보라색 눈이 너무 마음에 걸린다.

‘저는 당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배후.’

그 입이 내뱉었던 말이 마음에 걸린다.

인간과 계약한 외부 차원의 존재들은 스스로를 배후좌라고 불렀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과의 계약을 배후 계약이라고 불렀다.

극야가 말한 배후는 저 배후와 같은 뜻일까. 나는 품은 의문을 입 안에서 굴렸다. 결국 직접 물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었다.

본의 아니게 우연이 된 그때부터 지금까지. 세상은 아직 고요했지만, 저 멀리서 몰려오는 것은 폭풍이었다.

나는 아직 극야가 말한 녹색 눈의 왕을 보지 못했다. PK가 벌인 일은 잠정적인 폭탄으로 남아 있고, 차원 학회와 교류하는 외계인에 관한 일도 있었다.

해결하고자 하면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있겠지. 아니, 지구를 위해서라면 뭐든 해결하는 게 좋겠지.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숨만 쉬고 있는 모습을 봐. 예전이랑 달라진 것 하나 없다.

결국 인간이란 일이 닥쳐야만 뭔가 하는 생물이란 말인가. 나는 은은하게 반짝이는 드래곤 문양을 쓸어 보며 중얼거렸다.

“그 소원이라는 게 뭔지만 알아도 좋을 것 같은데.”

그것만 알면 저 회귀자가 미션 석세스 하는 걸 도와주고 내 삶을 찾아 떠나도 좋지 않을까.

나는 손톱 끝으로 드래곤의 뿔 부분을 꾹 눌렀다. 문양이 새겨진 부분이 어쩐지 화끈했다.

갑자기 눈앞이 흐릿하다. 졸린가? 나는 감기는 눈꺼풀을 애써 밀어 올리며 본능을 거부했다.

물론 본능을 거스르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 * *

검은 바닷물이 발목까지 밀려왔다. 별이 꽃송이처럼 흐드러진 밤이었다.

발목을 바닷물에 담근 나는 아주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머리가 아직 긴 걸 보니 스물 둘을 넘기지 않은 듯했다.

종아리까지 걷어 올린 체육복 바지가 눈에 띄게 익숙하다. 수능 끝난 후 한창 입고 다니던 학교 체육복 바지였다.

“이제 진짜로 얼마 남지 않았어.”

핏기 없는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어린 나는 내 옆에 선 남자를 올려다봤다. 비현실적이게 아름다운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극야였다.

존대가 아닌 반말을 하는 극야.

“음⋯⋯ 글쎄.”

고개를 내린 내가 바닷물을 참방참방 밟으며 중얼거렸다. 극야는 그런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물었다.

“꽃비라도 내려 줄까? 그런 거 좋아하잖아.”

“꽃? 아냐, 됐어. 그런 건 우리 엄마가 더 좋아하지. 나는 꽃보다 한강 뷰 아파트가 더 좋아.”

“가지고 싶으면 그것도 줄게.”

“아니야. 이 시국에 한강 뷰 아파트를 가져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런 거 안 줘도 돼.”

웃음을 터뜨린 내가 손을 내저으며 앞서 나갔다. 그 뒤를 극야가 조용히 따랐다.

기이할 정도로 이상한 꿈이다. 나는 흩어지는 바다 냄새와 수선화 향을 맡으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극야의 시선이 닿은 곳마다 수선화가 핀다.

달이 뜨지 않은 밤이었지만, 꿈결같이 밝았다.

“아!”

한참을 첨벙거리며 나아가던 내가 몸을 빙글 돌렸다. 극야가 피워 낸 수선화 꽃이 바닷가를 가득 채웠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활짝 웃었다.

“가지고 싶은 건 없지만, 하고 싶은 건 있어.”

“네가 바란다면, 내가 이루어 줄 거야.”

“뭐, 꼭 그럴 필요는 없고.”

“정말이야. 네 반지에 걸고 약속할게.”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사랑에 빠진 목소리는 이다지도 아름다웠던가.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넋 놓은 채로 바라보았다. 웃는 얼굴의 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