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62화 (62/175)

제62화

【“예로부터 그 반지의 주인이 되면 이 세계의 유일한 ‘왕’이 된다는 말이 있었지. 그래서 반지의 주인이 된 자들은 죄다 목숨을 잃었어.”】

반지에 얽힌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사연이 다른 세계에 사는 평범한 헌터 뒤통수를 강타한다⋯⋯!

나는 내 앞길에 파멸 플래그를 꽂아 버린 탐욕왕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합의했다. ‘절대로 반지를 만지지 않는다. ‘이게 그 반지에 얽힌 첫 번째 약속이다.”】

사람을 유일한 왕이 되게 해 주는 반지라. 이게 무슨 절대 반지도 아니고.

절대 반지가 아니라 알라딘 램프인가. 뭐든 상관없긴 했다. 둘 다 가지기만 하면 절대자가 된다는 점이 저 반지 이야기랑 똑같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약속이라는 건 두 번째 약속도 있다는 소리지?”

나는 반지 겉면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래.”】

탐욕왕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첫 번째 약속으로부터 시간이 흐르고 반지는 점점 잊혀져 갔지. 어느 날 반지가 감쪽같이 사라졌지만, 아무도 그 반지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낡은 예언을 단순히 이야기라고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이야기가 아니었던 거고.”

【“맞아. 갑자기 나타난 반지의 주인은 당시 대륙의 지배자였던 옛 영주들을 모조리 봉인하고 대륙을 손에 넣었지. 하지만 그 사람은 대륙의 유일한 왕이 되는 대신, 대륙을 일곱으로 가르고 그곳에 자신의 사냥개들을 봉인했어. 그리고 선언했다.”】

탐욕왕이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행동이 누군가를 흉내 내는 듯했다.

【“‘나는 이 세계를 떠날 것이며, 더는 이 세계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그 약속의 증표로 이 반지를 두고 떠나겠다.’”】

약속의 증표라.

【“그게 그 반지에 얽힌 두 번째 약속이다.”】

생각도 못한 진실이 평범한 지구인의 멘탈을 파삭 깨부쉈다. 오⋯ 그런 대단한 반지가 왜 제 손가락에?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시련을?

한 번이 아니라 무려 두 번 생각해 봐도 헌터치곤 평범하게 살았던 것 같은데, 왜?

내가 길드를 만들어서 외부 차원 탐방을 했어, 아니면 헌터 협회에서 외계인이랑 소통을 했어, 그것도 아니면 회귀자 따까리로 들어가길 했어?

물론 마지막은 회귀자가 일방적으로 그라운드에 넣어 놓은 탓에 애매하긴 했다. 하지만 돌이켜 볼수록 억울한 건 사실이었다.

나는 집에서 엄마한테 아이스커피나 타 주고 지냈는데 왜 이런 시련을? 미치고 팔짝 뛰겠네.

【“나는 반지에 얽힌 약속에 크게 연연하지 않아. 네가 약속을 깨든 말든 상관없지. 결국 내게 있어 돌이켜 볼수록 가장 중요한 것은 황금뿐이니까.”】

갑작스러운 진실에 속이 부글부글 탔다. 탐욕왕은 이런 내 속도 모르고 이야기를 계속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네가 그 반지의 주인이라면, 너는 그 반지에 묶인 최초의 약속을 이행해야만 해.”】

“⋯⋯예?”

제가 왜요?

나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삼켰다. 이 반지의 정체도 지금 알았는데, 갑자기 약속을 이행하라니. 그 약속 내가 한 것도 아닌데 왜?

약속 안 지키기 일인자라는 소리를 한 게 불과 몇 분 전인데, 내가 한 것도 아닌 약속을 지키라니. 기가 막히다.

이거 그건가? 신개념 몰래카메라? 하하, 요즘 세상 좋아졌네. 외부 차원에서 모르는 왕이 몰래카메라도 해 주고.

나는 일그러지는 얼굴 근육을 조절하며 애써 웃었다. 허허허. 저 외계인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냐?

“내가 왜?”

인류가 위험하다. 그래서 이변을 막고 차원 간의 융합을 느리게 만들어야 한다.

이건 나도 인류라는 범주에 속하니 인간이라면 충분히 거들 만한 일이었다. 실제로 납득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반지 때문에 누가 한 건지도 모를 약속을 이행해야 하는 건 부당했다. 누가 반지 달라고 했어? 이건 교만왕이 멋대로 주고 간 거라고.

나는 문제가 된 반지를 빼기 위해 갖은 애를 쓰며 노력했다. 손가락 비틀기, 이로 물어뜯기, 관절 움직여 보기.

그러나 반지는 빠지지 않았다. 그 자리가 제 원래 자리였다는 듯이 굳건하게 버텼다. 나는 맞지도 않은 뒤통수가 얼얼한 감각에 시달렸다.

【“왜긴. 네가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모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그러지.”】

그리고 돌아온 답변은 내 뒤통수를 한 대 더 갈겼다.

알고 싶은 적도 없던 세계의 비밀을 듣게 된 모양인가 본데? 아, 이게 바람직한 21세기의 공정 사회? 그동안 너무 놀았다고 일거리를 투하하는 타이밍?

머릿속에서 수많은 소설 속 회귀자의 구멍 난 회귀 방법이 스쳐 지나간다. 회귀해서 만렙 헌터. 회귀해서 인기 아이돌. 회귀해서 스타 셰프. 회귀해서 100만 유튜버. 회귀해서 재벌 집 막내아들.

회귀하는 거 좋지. 원래 회귀하면 미래의 정보를 쥐고 남들보다 앞서 나갈 수 있잖아.

근데 회귀를 누가 시켜 줬는데? 인생 밑바닥인 거 너만 있는 거 아닌데 왜 너만 회귀를 했는데? 편지를 받고 회귀? 그 편지 누가 줬는데? 트럭에 치여서 회귀? 그 트럭하고 회귀하고 무슨 상관있는데? 죽었더니 회귀? 염라대왕이 참 자비롭구나? 시스템이 생기며 회귀? 저 동네 외계인들 착하구만.

요새는 이러한 의문을 해결해 주는 개연성 있는 소설이 많아졌지만, 아직도 적당히 넘어가는 게 주인공의 회귀 방법이다.

그래. 이런 조건을 고려해 본 결과, 아무래도 나는⋯⋯.

【“그 증거로 네 옆에는 ‘별을 건너는 자’가 붙어 있지.”】

이 동네 회귀자의 회귀 이유와 엮인 모양이다. 탐욕왕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빼박이었다.

내 손가락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빠지질 않는 이 반지가 극야의 회귀와 관련 있다니.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내 설정값을 상상했다. 이런 건 보통 메인 히로인이랑 관련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극야를 주인공으로 두고 날 히로인으로 생각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둘 중 누가 봐도 예쁜 건 당연히 극야 쪽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히로인은 미모가 눈부셔야 하는 거잖아. 거기에 소꿉친구나 츤데레 같은 속성이 붙어 있고.

내 속성은 백수에 고시생인데, 이거 말이 됨? 판타지 소설 메인 히로인으로 고시생 백수 마마걸 평범 속성 캐릭터를 넣다니. 돈 못 벌고 연중될 미래가 보였다.

차라리 내가 주인공이고 극야가 히로인이라고 하는 게 더 말이 되겠군. 보통 소설 주인공은 회귀 빙의 환생 중에 하나쯤은 갖추고 있잖아.

지극히 평범한 거로 모자라 세 요소 다 없는 나는 당연히 조연 정도의 위치일 게 분명했다. 속성만 보면 엑스트라인데 랭킹 1위인 거 감안해서 조연.

그래도 내 인생 주인공은 나지, 뭐. 나는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소설 주인공보다 내 인생 주인공이 더 편하다. 소설 주인공 그거 괜히 고생만 하고 말이야, 피곤한 직업이라고.

【“반지의 소유주가 아니었으면 더 재밌었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적당한 거리에 멈춰 선 탐욕왕이 시선을 내려 내 얼굴을 보았다. 분명 왕을 보고 있는 것인데도, 다른 왕과는 다르게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탐욕왕이 다른 왕과 달리 유독 약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 테지.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으니 저쪽에서 날 배려하고 있는 게 맞았다.

【“아까 숨바꼭질을 하자고 말했었지. 대상을 조금 바꾸자.”】

“숨바꼭질 안 할 건데.”

【“이걸 네게 줄게. 너희 차원에 달이 두 개 뜨는 날, 돌려받으러 가지.”】

“그건 숨바꼭질이 아니라 물건 대여야.”

【“네가 그때까지 내가 준 것을 가지고 있다면, 너의 승리고.”】

탐욕왕이 말을 한 번 끊으며 샐쭉 웃었다. 나는 치미는 불길함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가지고 있지 않다면,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가겠다.”】

바람이 불었다. 나는 몸이 뒤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게이트 입구에 처져 있던 마법진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약속했던 대로.”】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감각. 웃음소리 사이에 희미한 목소리가 섞여 들린다.

【“빼앗기기 싫다면 잘 지켜야 할 거야.”】

무엇을?

의문이 의식을 꾸역꾸역 집어삼킨다.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황금빛은 온데간데없고 온기 없는 흑백의 방이 시야에 가득 찼다.

“이야기는 잘 마치셨나요?”

으레 듣던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 * *

황금빛 노을이 기우는 장미 정원은 탐욕왕의 영토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이다. 탐욕왕이 이 땅을 손에 넣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

녹색 눈의 악마, 슈브는 가끔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곤 한다. 반지의 주인과 세계를 거닐던 추억을 떠올리곤 하는 것이다. 생물보다는 개념에 가깝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그들 종족에게는 결국 남는 것이 기억 하나뿐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정원이지.”

새로 생긴 눈에 금색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이 잡힌다. 머리와 몸통만 대충 복구된 상태의 슈브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 몸뚱이를 날려 버린 주제에 태연하게 말을 건네고 앉아 있네. 싸우자는 거야?”

“계약자가 있는 너면 모를까, 계약자가 없는 상태의 너는 우습지. 정 싸우고 싶으면 계약자를 만들어 와.”

정말 듣는 사람 화나게 옳은 말이다. 슈브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려다 아직 몸뚱이가 다 수복되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했다.

‘계약자만 있었으면 1초도 안 돼서 복구하는 건데.’

유감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슈브가 점찍은 계약자는 현재 그를 강력하게 거부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아무나 잡고 계약할 수도 없고.’

슈브는 정원 바닥에 뻗은 채로 녹색 눈을 데록 굴렸다. 언제나 아름다운 이 정원은 그의 옛 계약자가 유독 좋아했던 장소였다.

이곳의 풍경은 그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 했던 그의 고향과 비슷했으니 이곳에서 분명 향수를 느꼈으리라.

“지구는⋯⋯ 아름다운 곳이지.”

망가진 정원의 모습을 바라보던 탐욕왕이 슈브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손에 쥐고 있는 것은 흰 장미다. 정확히는, 그가 누군가의 뜻에 따라 개발하고 장미라 이름 붙인 식물종이었다.

“이 정원을 버리고 떠날 만큼?”

“그래. 너의 정원은 영원히 아름답겠지만, 때로는 영원하지 않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으니까.”

뼈가 생기고, 그 위를 근육이 덮는다. 피부와 감각까지 돌아온 팔을 확인한 슈브가 고개를 들었다.

“뭘 했길래 그런 얼굴이야? 사기 계약이라도 했어?”

“그럼 네가 멀쩡한 낯짝으로 말 걸고 있지 않았겠지. 그냥 물건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내기를 했을 뿐이야.”

“하이고, 그냥 사기 계약 했다고 말해라. 그렇게 말하면 더 구질구질해 보인다.”

상체가 완전하게 수복되자 하반신이 수복되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짓은 과거의 친분만 믿고 관계가 파토 난 녀석을 믿는 일이다.

‘자색 눈이었다면 미래를 알고 있으니 이런 상황은 가볍게 피했겠지만⋯⋯.’

슈브는 미래를 모르니 이런 걸 피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또, 자색 눈처럼 영원히 별을 건너고 싶지도 않고.

영원히 남을 위해 고통 받는 게 보통 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인가?

슈브는 눈가를 찡그리며 생각했다. 일단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그런 걸 할 생각도 안 할 거다. 이 세계나 저 세계나 보통 그런 놈을 미친놈이라고 부른다.

“조만간 세계가 합쳐진다.”

실패한 별에서 건너온 자색 눈이 무엇을 위해 별을 건너는지는 그도 몰랐다.

“알아. 그 세계에도 달이 두 개 뜨는 날이 오겠지.”

“그 때가 되면 모두가 귀환자의 존재를 알게 될 거야.”

그 반지에 걸 수 있는 약속은 단 세 개.

아주 오래 전, 자색 눈이 반지의 주인과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세계가 지금까지도 반복되고 있다면.

“그때가 오면 노란 눈을 풀어 줘.”

누군가는 이번에도 ‘실패한’ 상황을 위해 보험을 준비해 둘 필요가 있었다. 녹색 눈은 자색 눈이 자신을 가장 먼저 풀어 준 이유가 그것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쏴아아아-

바람이 분다. 슈아이브와 탐욕왕은 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장미들을 바라보았다.

“조만간 진짜 장미를 이 정원에 심을 수 있겠네.”

눈을 내리깐 탐욕왕이 흔들리는 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슈브는 그게 승낙의 의미라는 것을 알았다.

“해가 진다.”

붉은 해가 망가진 정원 끝을 기웃기웃 넘어가고 있었다. 해가 지면 언제나 달이 뜨는 법.

슈브는 완전히 수복된 몸을 일으켜 정원을 빠져나왔다. 계속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계약을 서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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