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화
노란 눈의 세로 동공이 수축하고 확장되기를 반복한다. 하람의 레몬 사탕 색과는 다른 노란색. 땅에서 나는 광물과 닮은 노란색.
오싹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옥좌에 앉은 탐욕왕은 우리가 있는 방향을 정확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 좀 곤란한 상황에 처했어.”
가장 앞에 서 있던 편애가 전혀 곤란해 보이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환영을 덧씌워서 우리가 안 보이도록 해 놨는데, 아무래도 간파당한 것 같아.”
오늘 밥을 먹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정말 대수롭지 않은 투였다.
“돌아가는 게 좋겠어.”
그게 네 멋대로 되는 일이냐. 영문도 모르고 탐욕왕의 정원에 초대된 사람은 그저 기가 막혔다.
“처음에 할 때 잘했어야지. 너 안전 불감증이야? 무슨 깡으로 그런 짓을 했어?”
“다 네가 계약 안 해 줘서 그래. 우리 종족은 계약자가 없으면 고작 인간 헌터 정도의 힘밖에 못 쓰거든. 그러게 진작 계약했으면 얼마나 좋아?”
“이거 진짜 뻔뻔한 외계인이네.”
내가 뭐가 아쉬워서 불공정 계약을 해? 나는 이때다 싶어 불만을 토해 내는 편애를 향해 중지를 사뿐히 들어 올렸다. 편애의 얼굴이 와락 구겨지는 걸 보니 옳은 대처다 싶다.
“남은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는 게 좋겠네요.”
편애와 내 기 싸움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지은 극야가 정원과 이어진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정원과 이어진 문은 마치 게이트의 입구나 출구처럼 빛나고 있었다.
게이트는 저쪽에서 이쪽으로 통하는 건 줄 알았는데, 반대도 가능한 건가?
물론 게이트 자체는 통로이니만큼 당연히 가능할 거다. 저번에도 이런 의문을 가진 적 있었지. 그때 편애가 뭐라고 했더라?
아, 그래. 인간은 못 한다고 했었지.
기이잉-
그럼 인간이 아니라면 가능한 건가?
콰과과광-!!
눈앞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레이저 빔 같은 것이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뽐낸 그것은 내가 아니라 편애를 목표로 했는지, 방금까지만 해도 편애가 서 있던 자리를 모조리 박살 내놓은 상태였다.
【“내 정원에 이상한 게 들어왔네?”】
한쪽 이를 드러내며 웃은 탐욕왕이 오른쪽 검지를 들어 올렸다. 그 위에는 복잡한 문양의 황금빛 마법진 수십 개가 둥둥 떠 있었다.
“⋯⋯야.”
“⋯⋯.”
“⋯⋯살아 있어?”
어그로 끌어 준 건 고마운데 죽은 건 아니지? 방금 널 이용해서 외부 차원을 탐색해 보겠다는 기막힌 계획을 세웠거든. 근데 네가 죽으면 다 말짱 꽝이잖아.
저번에 주먹 맞고도 멀쩡했던 거 보면 내구도가 바 선생 수준인 것 같은데, 설마 죽었나? 나는 먼지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현장을 바라보며 재빠르게 백 스텝을 밟았다. 뒤를 살짝 살펴보니 생존에 민감한 네정좋은 물론이고 러브리스와 극야까지 이 자리를 뜬 것 같았다.
“우웩.”
먼지가 조금 걷히자 그 안에서 인간의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나는 그 레이저 빔을 맞고도 죽지 않은 편애의 내구도에 감탄했다. 저 정도면 특성이 신체강화 아니냐. 아닌데? 저건 내가 맞아도 구멍 하나 크게 뚫릴 파워였는데?
“더럽게 아프네. 이거 한 번 더 맞으면⋯⋯.”
콰앙-!!
고개를 턴 편애가 팔을 휘휘 저으며 입을 달싹거렸다. 정말 대단하다. 나는 편애가 어그로를 끌어 주는 동안 착실하게 도망쳤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다시 폭격해 대는 걸 보니 내 선택이 옳은 모양이다.
먼지구름이 훅 피어오르며 박살 난 정원을 가렸다. 나는 아직 열려 있는 게이트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쾅!! 노란 레이저가 방금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자리를 스친다. 살 떨리게 무서운 속도였다.
【“좀 뛰네? 네가 저 녹색의 이번 계약자?”】
쾅-!! 콰과광-!!
노란 레이저가 동시다발적으로 날아왔다. 나는 레이저를 피하기 위해 힘껏 굴렀다. 누가 인간은 머리빨이라고 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하냐. 내 몸뚱이가 중요하지.
몇 번 구르는 거로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으면 그게 낫지. 그런데 왜 여기 오게 됐더라?
나는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편애가 있던 자리를 확인했다. 레이저 때문에 망가진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체도, 옷가지도, 흔적도, 모두.
“⋯⋯죽었나?”
머리로만 생각하려던 말이 무심코 입 밖으로 새어 나갔다. 노란 레이저가 키이잉 소리를 내며 돌진하는 것을 멈췄다. 황금빛 마법진을 오른팔에 잔뜩 두른 탐욕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몰라?”】
“뭘?”
【“아, 계약자가 아닌가? 그럼 모를 수도 있겠군.”】
마구 일어난 흙먼지가 마스크를 쓰고픈 충동을 느끼게 했다. 나는 하찮은 미물을 아직도 죽이지 않은, ‘자비로우신’ 탐욕왕을 보았다. 그는 퍽 유쾌한 목소리로 답을 내놓았다.
【“‘저것’은 죽지 않아. 애초에 그런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지. 생명이 아닌 개념에 더 가까운 종족이다.”】
“개념?”
【“그래. 저건 녹색이니까 자아와 무의식을 상징하는⋯⋯ 뭐, 말해도 모르려나. 너희 종족은 아직 마법은커녕 마나를 쌓는 법조차도 모르니까.”】
알려진 대로 정말 ‘자비로우신’ 탐욕왕은 무지몽매한 미물을 위해 공격을 멈추고 설명하는 시간을 내주셨다. 이것 참 영광이네요. 나는 얼굴을 와락 찌푸린 채로 발을 뒤로 물렸다.
무슨 생각으로 공격을 멈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겠다. 늘 이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는 안 좋은 일이더라고.
망가진 정원의 모습이 눈에 띄게 어지럽다. 정원의 주인은 자기 정원을 부순 주제에 뭐가 그리 재밌는지 쭉 웃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그 사람과 확실히 닮았네.”】
“⋯⋯.”
【“마음에 들어. 나는 줄곧 애완 인간을 가지고 싶었거든.”】
한쪽 입꼬리를 길게 찢어 웃은 탐욕왕이 마법진을 두른 오른손을 펼쳤다. 온다.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땅을 박찼다. 노란 레이저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웅-!
정원에 장식된 석상들이 쏟아지는 레이저에 속수무책으로 파괴되었다. 하늘에서 레이저가 빗발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X발. 자비는 무슨 자비. 댁들 한국어 할 줄 모르죠? 외계인 외계인하고 불렀다고 진짜 한국어 모르면 곤란하거든요.
저런 게 자비면 나는 부처다. 너희 동네에서는 고출력 레이저 빔으로 사람 하나 꼬치구이 만드는 걸 자비라고 부르냐.
【“재밌어?”】
인간의 마음을 모르는 외계인이 유하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내 앞으로 뚝 떨어져 내린 돌덩이를 피하며 이를 악물었다.
“네 눈에는 이게 재밌어 보이냐?”
【“그럼. 내가 놀아 주는 건 드문 일이니까, 당연히 재미있어야지.”】
다른 차원으로 가는 게이트를 연 쪽은 반드시 무언가를 걸어야 한다. 지금 이 상황은 안에서 밖으로 침입한 거니 나 또한 무언가를 걸고 이 정원에 들어왔겠지.
하지만 나는 내가 무엇을 걸고 이곳에 도착했는지 모른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죽었다가는 아주 큰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함부로 목숨을 내던질 수 없는 이유였다.
【“술래잡기가 끝나면 다른 놀이를 하자. 너랑 닮은 그 사람은 그 놀이를 좋아했거든. 이름이 뭐였지?”】
탐욕왕이 고민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레이저가 쏟아지는 속도는 여전했다. 나는 눈대중으로 나와 탐욕왕의 거리를 쟀다. 일단 직접적인 타격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아, 숨바꼭질.”】
그럼 원거리에서 펀치를 날려야 하는데, 시도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역시 번개로 허를 찌르는 게 좋겠지?
검지와 엄지를 맞붙이고 가볍게 문지르자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노란빛으로 가득 찬 정원의 유일한 푸른색이었다.
【“그래, 기한은 너희 차원에 달이 두 개 뜨는 날까지.”】
레이저를 피하며 다른 꿍꿍이를 꾸미는 동안에도 탐욕왕의 뜬금없는 소리는 계속되고 있었다. 달이 두 개라니. 무슨 외부 차원도 아니고.
【“그 시간동안 잡히지 않으면, 이 놀이는 너의 승리다.”】
대체 왜 상의도 없이 혼자 결정하는 거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미간을 팍 찌푸렸다. 애초에 처음 보는 사람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요즘 애들은 이렇게 다 예의가 없나?
손끝에서 튀는 스파크가 파지직 소리를 내며 존재감을 뽐냈다. 나는 쇄도하는 레이저와 혼자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 탐욕왕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친구 없는 애들이 혼잣말 잘한다던데. 어쩐지 조금 짠하기도 하고.
왕이나 되는 주제에 친구도 없다니. 아, 왕이니까 친구가 없는 건가. 원래 예솔이가 군주는 고독한 자리라고 했다. 근데 난 군주가 아니라서 그런 거 몰라.
【“진작 죽였어야 하는데, 네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 봐주는 거야. 나는 너랑 똑같이 생긴 인간을 알거든. 그 사람은⋯⋯.”】
콰지지직-!!
탐욕왕은 별것도 아닌 말을 으쓱거리며 말했다. 나는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낙뢰를 내리꽂았다.
쏟아지던 노란 레이저가 단숨에 행동을 멈춘다. 낙뢰를 정통으로 맞은 탐욕왕의 몸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만든 낙뢰치고 반응이 영 미적지근한데. 게이트 넘어오면서 많이 약화된 건가.
【“너.”】
정원의 주인이 황금빛 눈을 부릅떴다. 하얀 뺨 위로 금색 비늘이 오소소 돋아나고, 세로로 긴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 반지.”】
숨이 턱 막힐 만큼 육중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내려 검은 반지를 쳐다보았다. 온갖 애를 써도 빠지지 않는 반지였다.
【“어디서 났어?”】
그간 옥좌 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탐욕왕이 몸을 일으켰다. 선득한 눈빛이 뺨 위로 와 닿는다. 나는 그 눈빛을 똑바로 직시하며 답했다.
“내 건 아니고, 받은 건데.”
【“눈 빨간 놈이 줬나?”】
“잘 아네.”
【“하.”】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숨을 토해 낸 탐욕왕이 미치광이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혼잣말 잘하는 애들은 친구가 없다던데. 아, 아까도 이 생각 했었지.
【“■■ ■■■■ ■■■.”】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난무한다. 나는 침착하게 뒤로 물러나는 길을 택했다. 뿔 잡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마치 현실 부정하는 인간 같다.
정원과 이어진 문이 일렁거린다. 아직 게이트가 닫히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편애의 생사는 모르겠지만, 쟤가 안 죽는다고 했으니 속는 셈치고 믿어 보기로 했다. 어차피 박살 난 상황이니 죽었다고 생각하기보단 살았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편하기 때문이었다.
콰앙-!
머리 위로 노란 레이저가 스쳐 지나갔다. 나는 잽싸게 몸을 굽혀 레이저를 피하고 봤다. 레이저는 문의 모습을 한 게이트의 입구를 정확히 맞추고 사라졌다. 게이트 입구가 불안정해졌는지 깜빡깜빡 점멸한다.
【“생각이 바뀌었어.”】
장신구를 치렁치렁하게 걸친 탐욕왕이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게이트에 몸을 던졌다. 쾅!! 분명히 게이트에 몸을 던졌는데 뭔 게이트가 아니라 방문에 머리 박은 소리가 난다.
【“네가 그 반지의 주인이라면 그냥 보낼 수 없지.”】
“이 반지가 뭔데?”
나는 다가오는 탐욕왕을 바라보며 물었다. 게이트 앞에는 아까 보았던 황금빛 마법진이 잔뜩 떠 있었다. 아마 저기다 머리를 박은 게 아닌가 싶었다.
【“그건 ‘약속’이다.”】
“약속?”
약속. 약속이라. 나는 입 안에서 약속이라는 단어를 슬쩍 굴려 보았다. 어감이 영 좋지 않았다. 세상 살다 보면 약속 지키는 일이 참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야 일인자는 바로 나지.
정원 안에 사뭇 비장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하지만 살기로 가득하던 방금 전 분위기하고는 정반대였다. 탐욕왕은 제법 애틋한 표정으로 내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