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우리는 이쯤에서 고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내 인생은 과연 어디부터 잘못되었는가? 과거든 미래든 어딘가의 나는 무슨 짓을 했길래 저 정신 나간 놈이랑 안면을 텄는가?
고찰이고 뭐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나는 정적으로 가득 찬 정원 안에서 극야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지금 이 정원 안에는 다섯 명이 있다. 나와 극야, 저기 나무 위에 앉아 있는 편애, 그림자처럼 대기하고 있는 러브리스와 공중에 머리만 떠 있는 네가정말좋아.
저 세 명도 아까 그 대사를 들었을 텐데. 그래도 되는 건가. 비밀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맨정신으로 그런 대사 들어도 되는 건가.
포브스 선정 한국인이 들으면 오징어가 되는 대사 1위. 나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회귀 몇 번 하면 사람이 저렇게 되는데?
아니지. 회귀를 한 순간부터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 나는 극야 외계인설에 한 표를 추가했다. 의외로 저런 소리를 듣고도 정신 상태가 무난했다. 다 장르 소설을 읽어 놔서 그렇다.
로판에서 저한테 왜 그러세요?! 를 외치는 여주인공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로판 여주인공의 심정이 되어 저한테 왜 그러세요? 를 외쳐 보고 싶었다.
물론 그런 대사가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런 대사를 함부로 입 밖으로 꺼냈다간 저 정신 나간 놈과 또 말을 섞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사람이 평소에 마음을 곱게 써야 하는 건데.
나는 주인공이 현실 부정을 시작하자마자 뒤로 가기를 눌렀던 과거의 행동들을 반성했다.
주인공도 다 사정이 있었겠지. 얘야, 사람은 언제 어디서 현실 부정을 하게 될지 모르는 거란다.
아무튼⋯⋯ 이번 대화에서 얻은 소득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적어도 저 인간이 왜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는 알게 되었으니까. 미래를 보고 대비하는 게 아니라 겪은 일을 대비하는 거였다.
“일단.”
나는 여전히 내 앞에 있는 극야를 보며 입을 뗐다. 여기서 소름 돋는다고 도망쳤다간 밥도 죽도 안 되겠지.
“자리에 가서 앉아 보세요.”
“네.”
극야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자리에 가서 앉는다. 말이라도 고분고분하게 잘 들어서 다행이었다. 하긴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고 싶으면 말이라도 잘 들어야지. 제정신이 아닌데.
“음.”
나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긁으며 할 말을 골랐다. 날 이렇게 만든 극야는 다소곳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수줍어 보이는 게 사람을 미치게 했다.
“그, 왜.”
“네.”
“왜 그런 표정을 짓고 계세요?”
나는 떨떠름한 감정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극야는 살짝 수줍은 듯이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이쯤에서 대화를 이어가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라서요. 기쁘네요.”
정말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아니, 당연히 그러겠지⋯⋯. 나도 지금 도망칠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어딘가의 또 다른 나는 도주라는 굉장히 훌륭한 선택을 한 모양이다.
“그렇군요.”
기쁘다는 인간한테 기분 나쁘니까 기뻐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이건 뭐.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꺼낼 말을 골랐다. 이 이상한 상황에 의문을 느끼고 있는 게 오직 나뿐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호랑이 굴에서 사지 멀쩡히 살아 돌아가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후퇴할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집에 소금이 있었나. 돌아가면 이쪽 방향으로 뿌려야지. 나는 나무 위에 앉은 편애를 흘끔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본 환영 속 ‘인간’은 누구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줄곧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던 편애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나무줄기처럼 어지럽게 얽혀 흔들거리던 장미가 돌연 물 빠진 흰색으로 변한다.
쿠구구궁-!!
한 폭의 그림 같던 정원이 거세게 흔들렸다. 정원의 저 끝자락부터 무거운 존재감이 느껴진다.
황금빛 광채가 눈꺼풀 위를 콕콕 찔렀다. 눈부신 휘광을 두른 존재가 끝없는 수의 시종들을 거느리고 정원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정원의 주인이 온다.”
고개를 뒤로 돌린 편애가 경고하듯 중얼거렸다. 몸을 완전히 꺼낸 네가정말좋아가 곁으로 다가와 선다.
쿵! 쿵! 쿵!
일련의 행동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정원 주인의 행차는 계속됐다. 행진하는 모든 자들이 일정한 박자에 맞춰 발을 구른다. 정원의 장미들이 밀려오는 황금빛에 속속히 물들었다.
나는 그 행렬을 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과한 빛 때문에 눈 안쪽이 시큰거린다. 어쩐지 교만왕의 본모습을 보았던 그때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 정원은 누구의 것일까요?”
한 걸음 다가온 극야가 넌지시 물었다. 나는 너울거리는 황금빛 아래에 서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끝내주는 미모였으나,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이 그 점을 반감시켰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신 적 없으신가요? 저희가 왜 낯선 정원에 있는지.”
극야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나는 뺨을 긁적거리며 정원 주인의 행차를 흘끔거렸다. 번개라도 치는 듯 눈앞이 번쩍거린다.
뭐, 이상하다고 생각이야 했지. 저번엔 분명 인간미 없는 방이었는데, 갑자기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미 정원이 되었으니.
그런데 네놈들이 이상한 짓을 한두 번 했어야지. 이제 이런 것 가지고는 태클 걸 기운도 없다. 어렴풋이 네정좋보고 정원 떼다가 옮기라고 했나? 하고 생각했다니까.
“곧 벌어질 일하고 이 정원 주인하고 관련이라도 있나요?”
무릇 회귀자란 미래의 일을 대비하는 법이다. 저 회귀자의 진정한 속셈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회귀 전에 나한테 굉장한 유감이 있었다는 건 알겠다. 그러니까 회귀하고 이 꼬라⋯ 아니, 헛소리를 하지.
지금까지 극야가 했던 짓을 보면 아주 수상하긴 해도 내가 손해 보는 일은 없었던 거로 기억한다. 게다가 미리 불러서 경고를 해 준다. 이번에도 비슷한 게 아닌가 싶은데.
나는 행차를 계속 지켜보며 물었다. 극야는 살짝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예. 자비로운 정원의 주인은 실수한 부하를 그냥 내치지 않는 법이거든요.”
거대한 황금빛 마차가 정원 중심으로 도르륵 굴러간다. 말이 아니라 각자 다른 모습의 몬스터들이 끄는 그 마차 안에는 줄곧 이야기해 온 이 정원의 주인이 앉아 있었다.
금빛 실타래처럼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온다. 금빛 속눈썹 아래 자리 잡은 것은 똑같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눈이다.
인간과 달리 뾰족한 귀에 황금으로 만든 장신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마찬가지로 상어 같이 뾰족한 이 사이에는 뼛조각 같은 것이 물려 있었는데, 와작 하고 씹자 그대로 박살 나 버렸다.
살짝 둥글게 굽은 황금빛 뿔이 머리에 솟아 있는 게 보인다. 지루한 듯 눈을 살짝 내리깔고 뼛조각을 씹어 대는 그 모습은 자비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요.”
아무리 봐도 자비보단 무자비가 더 어울리는 인상인데. 나는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며 그의 행차를 지켜보았다. 정원의 주인과 그 시종들의 행차는 정원의 주인이 정원 한가운데 자리한 옥좌에 앉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탕-! 탕탕-!
옥좌에 앉은 정원의 주인이 손을 들어 올리자 어디선가 총성이 울렸다. 동시에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멎었다. 상체를 약간 숙인 극야가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소곤거렸다.
“이어서 벌어지는 일들을 잘 지켜보세요.”
총성이 들리자 순식간에 고요해진 정원 안으로 누군가가 들어섰다. 일렁거리는 황금빛 게이트를 통해 등장한 건 쫑긋거리는 동물 귀와 꼬리를 가진 어르신이었다.
“검은 늑대 카사르가 위대한 존재를 뵙습니다.”
나이 지긋한 노인장이 정원의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시큰둥한 표정의 정원의 주인이 손을 까딱이며 입을 연다.
“노역장의 상황은?”
“할당량을 전부 채웠습니다. 218명의 노예가 죽었으나 3,002명의 노예를 추가로 끌고 왔으므로 현재 노역장에 존재하는 노예의 수는 19만 2,871명입니다.”
“좋아. 다음.”
거만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정원의 주인이 명한다. 검은 늑대 노인장이 물러가고 또 다른 몬스터가 정원 안으로 들어온다.
“총관 데이먼, 군주께 인사 올립니다. 총 여든아홉 구역의 담당관으로부터 징수가 완료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래, 다음.”
“수금 담당 기욘입니다. 이자를 갚지 못한 모든 빚쟁이에게 노예 딱지를 붙였습니다. 현재 채석장의 인력이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아 이들 모두를 채석장으로 보낼 예정입니다.”
“다음.”
“농장 관리인 필레가 자비로우신 주인님을 뵙습니다. 현재 백스물두 개의 농장에서⋯⋯.”
끝없는 행렬이 이어졌다. 모두 정원의 주인에게 그의 재산 목록과 현황을 고하는 보고였다.
각종 토지와 금은보화, 노역장이나 농장을 비롯한 생산지들, 화폐로 내는 세금은 물론이고 생명력이나 마나 따위의 기운까지.
정원의 주인은 수많은 재산을 가진 거부였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그 재산을 관리하는 관리인들이 주인에게 정기 보고하는 현장인 것 같았다.
“저번 정기 대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정기를 필요로 하는 몽마들에게 연 70%의 금리로 정기 대출을 해 주고 있으며⋯.”
중간중간 범상치 않은 이자가 불쑥불쑥 등장하고는 했지만, 이건 내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닌 것 같지. 몽마 다 굶어 죽으면 좋겠네. 연 70%면 빌린 애들 다 노예로 끌려갈 테고.
세금 징수나 노역장 등 비교적 평범한 것부터 시작된 보고는 뒤로 갈수록 기막히게 불법적이고 잔인한 내용으로 변했다. 개중 가장 귀에 들어왔던 건 일반 채무자가 아닌 관계자들에 관한 보고였다.
“서른네 번째 그림자가 위대하신 주인님께 보고 올립니다.”
너울거리는 황금빛 사이로 검은색 슬라임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정원의 주인 발밑에 멈춰 선 그것은 제가 말한 대로 보고를 시작했다.
“현재 빚을 져 낙인이 찍힌 관리자는 총 다섯 명입니다. 도망친 관리자는 세 명으로, 한 명은 반항이 심해 현장에서 즉시 사살하였습니다.”
“다른 둘은?”
“하나는 끌고 왔습니다만, 다른 하나는 현재 수색 중입니다. 다음 보고까지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슬라임이 꾸물거리며 몸을 불렸다. 도망 안 친 빚쟁이는 노역시키고 도망친 빚쟁이는 처리하는 건가. 부하 교육 하나 확실하네.
텐트만큼 몸집을 불린 슬라임이 입을 쩍 벌리더니 생물 하나를 토해 냈다. 인간의 상체에 말의 하체를 가진 그 생물은 정원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조아린 채 벌벌 떨었다.
“주, 주인님. 부디 자비를. 제발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다음번엔 확실하게 징수하겠습니다! 영지민을 다 죽이고 그것을 팔아서라도 정해진 금액을 마련하겠습니다!!”
정원의 주인이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켄타우로스를 바라본다. 황금으로 된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단 팔이 허공을 스쳤다. 세로로 긴 동공이 맹수처럼 사나웠다.
“돈을 잘 거둬서 그 자리에 앉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무능력한 관리자 같은 건 필요 없어.”
정원의 주인이 입술 끝을 끌어 올려 웃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이가 몹시 위협적이었다.
“그래도 난 자비로우니까 목숨은 살려 주지. 그림자.”
“예.”
“감옥에 가두고 쥐를 풀어. 한 100년 뜯어먹히고 나면 정신 차리겠지.”
손에 턱을 괸 정원의 주인이 그림자에게 명령했다. 그림자라고 불린 슬라임은 다시 입을 쩍 벌려 켄타우로스를 삼켰다.
“주인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주인님! 제발⋯⋯! 아악-!!”
처절한 비명이 정원 안을 가득 메웠다. 나는 그림자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자비를 논하기엔 지나치게 무자비했다.
“자비로운 정원의 주인.”
하얀 손이 눈 앞을 가렸다.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새로운 토지를 그 누구보다 눈여겨보고 있으나, 직접 나서지는 않는 군주.”
뒷덜미에 선득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려 내 눈을 가리고 있는 극야의 손을 내렸다. 속삭이는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인간들은 그를 탐욕왕이라고 부릅니다.”
비뚤게 틀어 올린 입꼬리가 보였다. 나는 그 황금빛 눈과 시선이 마주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