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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59화 (59/175)

제59화

헌터로 살다 보면 이상한 걸 참 많이 보게 된다. 시뻘겋고 불길한 바닷물과 시커먼 모래사장, 불타는 머리카락을 가진 아인종과 집채만 한 절지동물 같은 것.

외부 차원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기이하다. 물론 내부 차원과 비슷한 환경인 곳도 있긴 있다. 보통은 나사 하나씩 빠져 있긴 하지만.

나는 분명 건물 안에 있었을 텐데, 이 방만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햇빛이 비쳤다. 바닥을 메운 검은색과 하얀색의 격자무늬 타일이 눈에 들어온다. 안구 친화적인 녹색 정원에는 희고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꽃향기의 정체는 이것이었나. 나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가운 햇빛이 눈을 깜빡이게 만든다. 완연한 정오의 장미 정원이었다.

“차는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앞서가는 네정좋의 뒤를 따라가자 흰 테이블을 앞에 둔 극야의 모습이 보였다. 아앗, 어째서 빛이?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가리며 보호 모드를 발동했다. 제가 방금 뭘 본 거죠? 신?

차분하게 가라앉은 하얀 머리카락 밑으로 자수정처럼 고운 빛깔의 눈이 보였다. 머리색과 같이 하얀 속눈썹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팔랑인다.

붓으로 그린 것처럼 섬세한 눈매 끝이 어쩐지 발그레하다. 햇빛 아래에서 유독 창백한 낯빛이 살짝 붉은 눈꼬리와 합쳐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곧게 올라가는 입술이 흐린 분홍빛이다.

세상에. 얼굴이 어떻게 이리 파격적일 수가. 늘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파괴력 큰 얼굴이다. 저 얼굴이 조금만 못생겼어도 지금은 존재할 수 없었겠지. 분명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테니까.

나라를 망하게 할 미모는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장미 정원이라는 배경이 생기자 세계를 망하게 할 미모로 발전했다.

저번에 큰소리 땅땅 칠 수 있었던 건 배경의 힘이 없어서였나. 나는 입 밖으로 내뱉으려고 준비한 모든 말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극야 뒤에 서 있던 러브리스가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와 카프리 썬을 건네주었다. 아, 감사.

“차는 필요 없으신가요?”

“어, 네.”

오늘따라 더 기막힌 미모를 뽐내는 극야가 웃는 얼굴로 내 시신경을 공격했다. 당장 로판 남주 하셔도 되겠어요. 지금 장르를 잘못 찾아오신 것 같거든요. 마침 장소도 끝내주게 로판 같은데 이참에 장르를 바꿔 보심이?

입 밖으로 나가지 못할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아⋯⋯ 이게 바로 카프리 썬 먹다가 체할 것 같은 느낌인가?

미각이 고장 난 것처럼 이상 반응을 일으켰다. 설탕이 듬뿍 들어간 음료수보다 저 미소가 더 달다. 이 정도면 충분히 주접떨지 않았나. 시신경 자극은 이젠 그만⋯⋯!

나는 결국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 불편하신가요?”

그 와중에 극야는 자기 얼굴의 파급력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걱정이 듬뿍 담긴 그 목소리 때문에 더 체할 것 같았다.

원초적 불길함이 연이은 공격으로 무참히 썰려 나갔다. 저, 저 요망한 얼굴을 가리라고 하지 않으면 조만간 말도 못 하게 되겠는데.

나는 침착하게 심호흡하고 두 눈을 번쩍 떴다. 극야는 묘한 미소를 지은 채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웃음기 어린 자색 눈이 곱게 휘어졌다. 나는 단번에 깨달았다. 너 지금 즐기고 있지.

“얼굴.”

“예.”

“그 얼굴 좀 가려 봐요.”

PK랑 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도 이렇게 진지하지는 않았는데. 나는 착 내리깐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곤란하네요.”

극야가 살며시 웃으며 내 말을 받았다. 아, 됐어요. 어차피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내 꼴이 볼썽사나웠던 건 인정한다. 이렇게 재밌는데 왜 물러나 주겠어. 그럼 바보지.

나는 구겨지려는 미간을 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저 새끼 지금 이 상황 100% 즐기고 있다.

속에서 화가 울컥울컥 올라왔지만 참아야 했다. 여기서 화냈을 때 손해인 건 나이기 때문이다.

저 예쁜 얼굴 한 번 더 보고 정신적 안정을 되찾는 편이 훨씬 나았다. 물론 거기에도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저 범상치 않은 얼굴을 볼 때마다 육감이 경고를 때렸다. 뒤가 구리다고. 그러니 경계하라고.

쪼롭. 다 마신 주스 팩에서 공기 마시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이번에도 러브리스가 척척 다가와 카프리 썬 팩 하나를 쥐여 주고 갔다. 오렌지 망고 맛이었다.

“듣고 싶은 게 있어서 왔는데요.”

나는 러브리스가 건네준 팩에서 빨대를 뜯어내고 그것을 감싼 비닐을 잘근잘근 씹었다. 여전히 웃는 얼굴의 극야가 눈가를 지그시 누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씀하세요. 제가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대답해 드릴 테니까요.”

여기서 저자세로 나와야 하는 건 난데 늘 저쪽이 저자세로 나온다. 나는 입에서 비닐을 퉤 뱉어 내며 질문을 골랐다. 질문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고르기 어려웠다.

교만왕의 게이트 안에서 편애가 줄줄 늘어놓았던 의미 모를 말들. 하람과 휩쓸렸던 게이트에서 하람이 말해 준 일곱 개의 형상. 내 손가락에 붙어 있는 반지와 교만왕이 보여 주었던 환영.

앞으로 일어날 일과 다른 세계의 정보를 아는 사람은 과연 미래를 보는 사람일까?

사람들은 극야를 보며 미래를 예언한다고 떠들어 댔지만, 나는 그가 미래를 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미래를 보는 것만으로는 모든 상황을 손안에 넣고 굴리는 듯이 행동할 수 없다. 어떠한 일이든 반드시 변수가 생기기 때문이다.

남의 취향을 박살 내고 자기 얼굴이 즉 취향이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을 보고 있으니 상념이 절로 사라졌다. 제비꽃처럼 예쁜 보라색 눈은 바르바토스와 달리 유독 짙고 선명한 빛깔이었다.

“아.”

저 자색 눈을 보면 왠지 모르게 편애의 녹색 눈이 떠오른다. 얼핏 보면 형광 녹색으로 보일 그 눈. 나는 문득 바르바토스의 던전에서 보았던 세 명의 악마를 떠올려 냈다.

붉은 눈의 악마, 녹색 눈의 악마, 그리고⋯⋯ 자색 눈의 악마.

“당신.”

나는 눈을 감았다 떠 보았다.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는 극야의 얼굴이 보였다. 눈은 여전히 보랏빛이다.

“⋯⋯정체가 뭐야?”

묻고 싶은 말들이 혀 안쪽에서 굴러다녔다. 중요한 질문이야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가장 궁금한 건 이쪽이었다. 네가 뭔데 내 질문에 답할 수 있다고 말해? 네가 뭔데 미래를 논하지?

전쟁 종결 이후 한없이 평온했던 내 인생은 새벽 3공대와 마주친 후 끝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최근만큼 혼란했던 적이 또 없다니까.

갑작스레 열린 게이트를 닫는 일의 반복. 그 과정에서 차원의 융합은 가속화되었고, 세상은 이런저런 일로 발칵 뒤집혔다.

연쇄적으로 일어난 상황의 홍수에 휩쓸리니 끝이 없었다. 지금도 봐라. PK가 헛짓거리해서 조만간 일 터지게 생기지 않았나.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반복되면 정신 못 차리는 게 보통의 사람이지. 나는 정신 못 차린 나날을 회상하며 주스 팩 끝부분을 구겼다.

“그게 궁금하신가요?”

여유롭게 웃는 얼굴이 한없이 불길하게만 느껴진다. 다섯 시간 걸려서 밥상 받았는데 허겁지겁 먹다가 목에 생선 가시 걸린 기분이다.

“저는 조금 더 직관적인 질문을 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엄지에 끼신 검은 반지에 대한 질문이나 지난 돌발 게이트에서 보신 환영에 관한 질문은 어떠신가요? 이쪽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런 걸 대답이라고 하냐. 목에 생선 가시가 걸려서 밥을 먹었더니 생선 가시가 더 깊이 박힌 기분으로 정정하는 게 낫겠는데.

“아뇨. 저는 그런 것보다 당신 정체가 더 궁금하거든요.”

그니까 네가 이 검은 반지에 대해서 왜 아냐고. 지난 돌발 게이트에서 본 환영에 관해서는 대체 왜 알고 있는 거냐고.

천 리를 본다는 사헌 길드 친위대 아줌마도 모를 사실들이었다. 특히 환영 같은 건 같이 걸리지 않는 이상 못 보는 건데, 대체 왜 아는 거냐고.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저런 건 독심술사여도 모르겠다.

솔직히 이런 건 뭐, 회귀라도 하지 않으면 모를 것들 아닌가.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극야를 보았다. 극야는 한없이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슬프네요.”

“예?”

“저보다 당신을 위해 헌신할 이는 없으니, 조금이라도 저를 믿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처연하게 내리깐 속눈썹 끝에 약간의 물기가 어렸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굳은 어깨를 더듬거렸다.

“저는 당신의 처음이자 마지막 배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아직 심장 뛰는 소리가 났다.

“수억 번의 실패를 거듭하여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수없는 반복 끝에 맞이할 최선의 결말을 위해.”

정체를 알 수 없는 환희로 범벅된 얼굴이 희게 웃는다. 풀린 동공이 확장과 수축을 반복했다. 미지의 공포가 목덜미를 스쳤다. 혀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의 첫 번째 신하가 새로운 세계에서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나의 왕.”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정해진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 울렸다.

사고가 멈추는 건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이다. 찰나의 순간에 빼앗긴 주도권은 그가 고개를 들 때까지 되찾을 수 없었다.

“아.”

나는 멍청한 얼굴로 의미 모를 감탄사를 뱉었다. 솔직히 나한테 왜 이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억 개의 별과 수억 번의 실패. 수없는 반복. 그리고 새로운 세계라는 말.

모든 것이 내 추측에 힘을 싣는다. 나는 굳은 혀를 애써 움직여 말을 짜냈다.

“제가, 뭘⋯⋯.”

아. 그는 회귀자였다. 그것도 몇 번이나 같은 시간을 반복해 온.

그 반복 속에서 제가 대체 뭘 했길래, 당신이 이러는 건데요.

뭘 했길래 신하를 자처하고, 뭘 했길래 뒷일을 꾸미고, 뭘 했길래 그런 시선으로 날 보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요.”

그의 보랏빛 눈이 온기를 품었다.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가 온화하고 다정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이대로만 있으면 되니까.”

그가 시선을 떼지 않고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내 앞에 선 그는 내 눈높이에 맞추어 고개를 내렸다.

“대신에 전부 보여 주세요. 당신의 감정, 생각, 행동, 모두.”

“⋯⋯.”

“제가 지킬 거예요. 가장 처음에 약속했던 대로.”

하얀 손이 굳은 어깨를 살짝 스쳤다. 나는 반지를 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응시했다.

“그러니 이대로만 있으면 돼요.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제가 처리할 테니, 안심하세요.”

하얀 낯에 걸쳐진 해사한 웃음이 끔찍하게 이질적이다. 시선 끝에 닿는 것이 온통 하얀색이었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모두 스스로 되뇌는 것만 같다.

벽을 보고 대화한다는 게 이런 말일까. 어쩐지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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