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그래서요?”
“그래서 뭘?”
“그 뒤엔 어떻게 됐어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네정좋이 물었다.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던전 탈출했지.
긴 시간 하람을 괴롭혔던 외계인의 속삭임은 하람이 바르바토스와 배후 계약을 맺으며 멈추게 되었다.
이는 지구에 상주 외계인이 하나 더 늘었다는 뜻과 같았다. 안 그래도 외계인 침공으로 정신없는 와중에 난리 났네, 난리 났어. 아무리 말을 순화해도 좋은 말이 안 나왔다.
야, 나 때는 외계인 하나 쫓아내겠다고 별짓을 다 했는데, 힘 좀 얻겠답시고 외계인한테 영주권 주는 게 말이 되냐. 이 자식이나 저 자식이나 생각이 없어, 생각이.
지구 멸망은 다 저런 놈들 때문에 오는 거라고. 나중에 외계인한테 뒤통수 맞고 징징대 봐라. 내가 도와주나.
‘우연 님, 방금 무슨 일이⋯⋯.’
‘하람 님이 계약하셔서 마법 소녀가 되셨어요.’
‘네? 정말요?’
‘아니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네요.’
외계인에 대한 일은 극비다. 차원 학회에 소속된 몇 명이나 낙원 길드의 간부 등 일부만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따라서 환영에서 깬 레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바르바토스와 계약한 하람이나 미리 들은 게 있는 나는 상황을 얼추 이해했다 쳐도, 이 일에 우연히 말려든 레나는 아는 것 하나 없을 만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던 레나가 하람에게 다가가 이 어이없는 상황에 관해 물었다. 나는 구석에 쪼그려 앉아 지구가 언제 멸망하나 셈하고 있었다. 애들 하는 꼬락서니 보니까 조만간 망할 것 같긴 하다. 그렇지?
PK가 라이프 베슬 구해 오라고 했는데, 리치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세상 살기 힘드네. 나는 고개를 돌려 레나와 하람 쪽을 보았다. 하람은 순진하게 웃으며 어물쩍 말을 돌렸다.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요. 나중에 따로 연락 드릴게요.’
저거 설명하기 싫으니까 쏙 빠져나가는 것 봐라. 이래서 평판 같은 건 함부로 믿을 게 못 된다니까. 그나저나 하람이랑 레나랑 아는 사이였나. 하긴 처음에 하람이 레나를 아는 눈치긴 했다. 아는 척하기 싫어했었지. 대체 무슨 사인지 추측도 안 간다.
‘일단 나가는 게 먼저니까요.’
입을 연 하람의 손 위에서 그의 새로운 오른눈 색깔과 같은 연보라색 영혼석이 빛났다.
영혼석을 이용해 게이트를 열자 던전 내부가 드드드 진동한다. 나는 던전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무릎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허리를 뒤로 젖히자 우드득 소리가 난다.
‘우⋯⋯.’
우드득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레나가 날 부르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나는 레나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발목을 돌렸다. 우리 세계와 이세계가 뒤섞이는 광경은 언제 봐도 경이롭다.
콰앙-!
출구를 연 하람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레나와 하람의 말을 듣지 않고 땅을 박찼다. 이 게이트 밖의 모습이 굳이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쏜살같이 던전에서 탈출하는 게 내 신상에 좋았다.
갈라진 공간의 틈을 타고 현실로 발을 내딛자 주변을 막은 바리케이드가 보였다. 출동한 경찰과 공무원 헌터들이 하나같이 열린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잡지 못할 속도로 뛰쳐나갔다.
여기서 느긋하면 손가락테크닉이 아니라 네가정말좋아 아니겠어. 나는 도망을 택했다. 아직 네정좋만큼 대단한 낯짝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락 간 평판은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니라고.
“왜 그렇게 보세요?”
말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더니 그걸 또 귀신같이 눈치채고 말을 붙여 온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저어 주었다. 네정좋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더니, 살짝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제 욕 하셨죠.”
“아니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전하는 연기를 끔찍하게 못 하셔서 다 티가 난다고요.”
허, 거참 누가 연기를 못 한다고 그래?! 내가 얼마나 연기를 잘하는 줄 알아?!
나는 네정좋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할 말이 없다는 걸 깨닫곤 도로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연기해서 좋게 넘어갔던 일이 딱히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하람 쪽이 괜찮게 넘어간 거 아닌가? 물론 마지막에 일반인답지 않은 속도로 도주하는 바람에 사실 각성자였다는 걸 그쪽도 대충 눈치 깠겠지만.
내가 연기를 못 한다니. 이건 우씨 가문의 수치다.
나는 내 뒤통수를 팍팍 때리며 현실을 부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모습을 보며 감탄한 네정좋이 차력 쇼 하시는 거냐며 개소리를 지껄였다가 한 대 얻어맞았다.
“아파요.”
네정좋이 얻어맞은 뒤통수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불만스럽게 뜬 눈꼬리가 새침하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저 얼굴로 새침함을 표현할 수가 있지. 저 얼굴 나 주면 정말 알뜰하게 써먹을 텐데. 세상의 부조리를 이렇게 또 느끼고 갑니다.
네정좋의 불만을 무시하고 앞서 나가니 그가 옆에 찰싹 달라붙어 쫑알거렸다.
“그래서 그 일 때문에 여기 오신 거예요? 슈브랑 계약하려고?”
“슈브가 누군데요?”
“⋯⋯탈모 외계인이요.”
“편애랑 싸우셨구나.”
“네.”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이 돈가스 접시 받은 어린이 같았다. 네정좋 안의 탈모는 대체 뭐길래 저런 말을. 나는 저번에 봤던 게시 글에서 네정좋이 러브리스를 탈모 냉동 참치라고 칭했던 걸 떠올려 냈다. 참 신기한 언어 사용법이다. 탈모 참치가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조합이었던가.
“계약 안 해요.”
“왜요?”
“지구 망할까 봐.”
나는 심드렁히 대꾸하며 복도를 걸었다. 외계인과 계약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요즘 트렌드는 다르지만.
늘 열리는 던전과 별다를 바 없던 그 던전은 하람이 새로운 특성으로 매스컴을 타면서 크게 주목받았다.
하람은 사람들에게 배후좌(背後座)의 존재와 계약을 통한 새 능력에 대해 밝혔다.
하람의 배후좌는 왕들과 같은 군주급 몬스터, 바르바토스. 현재의 지배자들에게 패배하고 시간이 흘러 퇴물이 되었지만, 그 강력함은 여전하다. 작고 약한 인간 하나의 후견인 역할을 하기엔 아주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눈 색은 한 개체의 본질이다. 하람은 바르바토스의 특성을 얻은 후 레몬색과 연보라색의 오드 아이를 갖게 되었다. 듣기로는 새로 얻은 특성뿐만 아니라 기존 특성도 발전했다던데, 자세히는 모르겠다. 하람하고 따로 만나서 들은 것도 아니고.
아무튼 사람들은 초월적 존재와 그 존재가 주는 능력에 대해 불티나게 떠들어 댔다.
벽에 막혀 더는 발전할 수 없게 된 헌터들은 모두 다 새로운 특성에 목을 맨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특성이 필수적이다.
계약으로 새로운 특성을 얻고 기존 특성까지 발전시킨 하람은 한순간에 슈퍼스타가 되었다. 나는 하람의 랭킹이 순식간에 솟아오른 걸 봤다.
우리나라 11위였던 일소검은 그 계약 하나로 5위가 되었다. 5위면 네가정말좋아 바로 밑이니까, 엄청난 거였다.
“신기하네요.”
네정좋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기할 게 뭐가 있어. 너희가 하는 게 지구 느리게 망하게 하는 일 아니었어? 새삼스러운 반응이었다.
“전하는 더 강해지고 싶지 않으신가요?”
“음. 그거야 뭐.”
강해지고 싶은 마음이야 있지. 나태왕과 교만왕만 봐도 나보다 훨씬 강했다. 이 지구에서 가장 강한 건 나일 텐데, 나는 그들의 앞에서 개미만도 못한 존재였다.
게이트를 통해 우리 차원으로 넘어오는 외부의 존재들은 모두 약화된 상태다. 그 상태에서도 이렇게 차이가 난다면 차원이 합쳐졌을 때 날 차이는 그야말로 압도적.
나는 강해져야만 했다. 반서준처럼 알량한 정의가 있는 것도, 극야처럼 이유 모를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지금보다 강해져야만 하는 건 확실했다.
결국 끝에 가서 날 지탱하는 것은 나뿐이다. 무엇이든 힘이 있어야 가질 수 있고, 지킬 수 있었다. 여기에서 안주하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있죠. 강해지고 싶은 생각.”
“그런데 왜 슈브의 제의를 거절하셨어요? 배후좌와 계약해서 얻는 것들을 알고 계시잖아요.”
네정좋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나는 시간을 들여 고민하지 않고 즉답했다.
“그게 사기 계약인지 어떻게 알고? 뉴스 안 보셨어요? 사기 계약으로 인간 등쳐 먹는 배후좌 얘기가 얼마나 많은데요.”
“아, 맞아요. 질 나쁜 배후좌들이 F급을 엄청 뽑아내고 있다고 했죠.”
네정좋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배후좌 문제는 지금 뜨거운 감자였다.
배후좌와의 배후 계약은 우리 세계에 하나의 신드롬으로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각성자만 계약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계약을 이행하고 특성을 얻은 비각성자가 나오며 전체적으로 떠들썩해졌다.
비각성자도 선택만 받으면 특성을 얻고 헌터로 활동할 수 있는 거니까.
“F급이라도 좋으니까 특성 좀 얻어 봤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수두룩하죠. 그런 소원 저도 많이 들었어요.”
“어디에서요?”
“낙원교에서⋯⋯ 아, 못 들은 체해 주세요.”
다소곳하게 눈을 내리깐 네정좋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모른 체하기에는 내용이 심상치 않은데.
나는 미간을 팍 구겼다.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어딜 봐도 귀여운 구석 전혀 없는 시커먼 인간이 애교 부리는 게 좋은 광경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소원을 빈 사람들에겐 꿈 깨라고 말씀하시는 게 좋겠네요. 강한 배후좌는 보통 기존 각성자한테 가잖아요. 사람들이 꿈에 그리는 상황은 로또 당첨보다 어려울 텐데.”
“그건 그래요.”
네정좋은 별다른 대꾸 없이 수긍했다. 기존 각성자들도 얻기 힘든 게 거물급 배후좌와의 계약 기회다. 아무래도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컨택하는 방식이니까.
바르바토스 같은 군주급은 없어도, 군단장급은 종종 나왔다고 하던가. 나는 얼마 전에 16위가 된 모 군단장의 계약자를 떠올렸다. 각성자와 비각성자를 통틀어 가장 성공한 케이스였다.
공짜만큼 달콤한 게 없지만, 공짜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받은 것이 있으면 주어야 하는 것도 있다.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은 평등한 계약 관계가 아니다. 주종 관계쯤 되겠지. 제공이 아니라 조공일 테고.
지금 내게 전하 전하거리는 네정좋도 극야한테 받은 게 있으니까 이렇게 고분고분한 것 아닌가. 극야가 내 앞에서만 뭐 잘못 먹은 사람처럼 구니까 그 따까리들도 따라 하는 거지.
오늘도 그렇다. 무상으로 가진 정보를 제공하겠다니. 나중에 대체 뭘 뜯어 가려고. 나는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자꾸 받은 게 쌓이기만 하고 있었다. 슬슬 적당히 끊어 내든가, 아니면 먹튀 하든가 해야지. 안 좋은 미래에 대한 상상이 차곡차곡 쌓인다.
복도에 뚜벅뚜벅 울리던 발소리가 멎었다. 나는 각종 몬스터들이 새겨진 괴상한 취향의 복도 끝에 서 있었다.
이 문만 열고 들어가면 극야가 있겠지. 나는 문을 빤히 노려보다가 이번에도 노크 없이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변함없이 고운 목소리가 귀를 사로잡는다. 나는 전쟁터에 나가는 장수처럼 비장한 각오로 문 너머를 보았다. 희미하게 꽃향기가 난다. 정신 차리고 들어가자. 저 요망한 얼굴에 홀렸다간 큰일 난다. 네정좋 꼴이 된다고.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오후의 햇살처럼 따스한 온기가 뺨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파격적으로 변신한 방 안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아니, 리디광공 방은 어디 가고 정원이. 아니, 여기 남극이라면서 왜 정원이.
네정좋이 굳어 있는 날 흘끗 보더니 슬그머니 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무빙이었다.
지금 나만 이게 이상해? 나만 지금 이게 이상한 거야?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