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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57화 (57/175)

제57화

낯선 환경에서의 첫걸음은 관찰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구석에 숨어 유심히 본 결과, 저 해골 뼈다귀들은 명령받은 행동을 무한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처음엔 날 찾으라는 명령을 받은 건지 주변을 샅샅이 뒤지더니, 얼마 안 가서 똑같은 것들끼리 치고받고 싸운다. 우두머리는 결국 하람과 레나일 텐데. 설마 둘이 의견 합치가 안 된 나머지 내분이 일어났나?

나는 희망 회로를 돌리며 주변에 떨어진 나무 몽둥이를 주워 들었다. 저들끼리 서로 부수고 난리 난 저 뼈다귀 난장판을 헤치고 조금 더 멀리 갈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적의 마나가 50% 남았습니다.]

[적의 마나가 30% 남았습니다.]

[적의 마나가 10% 남았습니다.]

[불사 군단의 세력이 감소합니다.]

빠악! 콰직! 콰광!!

조금 전까진 나무 몽둥이가 아니라 칼로 후려쳐도 금세 복구되던 것들이 일어나지 않기 시작했다. 나는 그 이유가 갑자기 떠오른 창과 소란스러운 중심부에 있으리라고 봤다.

환영 안을 채운 공기가 달라졌다. 나는 무너지는 뼈 무덤을 밟고 뒤로 돌았다. 사악하고 범상치 않은 기운이 주변을 채운다. 일일이 떠서 상황을 알리던 보라색 창들 또한 모조리 사라졌다.

평소에 단말기로 보는 시스템 창이라고 해 봤자 결국 헌터의 편의를 위해 본부의 각성자들이 만들어 낸 것.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시스템 창과 다르게 인위적이라는 건 변함없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보게 된 보라색 창 또한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 보여 주고 있는 것. 사라졌다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영주의 이름을 넘보는 것인가!”】

그 너머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은 의외였다. 보라색 시스템 창을 만들어낸 게 저 악덕 영주들인 건 알고 있었지만, 모습까지 드러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게, 쟤들은 뒤에서 시스템 창으로 우릴 조종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굳이 제 모습을 드러낼 이유도, 저렇게 분노할 이유도 없었다.

“레나와 하람이 무슨 짓을 한 건가?”

빠각-!!

해골 뼈다귀 두개골 부수는 감각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나는 어느새 동네북 수준으로 약해진 뼈다귀를 부수며 전진했다. 두 사람이 있는 장소에서 두 보랏빛이 불길하게 일렁인다. 싸하게 내려앉은 공기가 어깨를 절로 움츠리게 했다.

“영주의 이름을 넘본다니. 언데드 군단 같은 건 가지고 싶은 생각도 없어.”

앞머리를 뒤로 휙 넘긴 하람이 두 보랏빛을 향해 말했다. 지금도 군단은 서로를 적대하며 싸우고 있었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희와의 교섭을 원했을 뿐이다. 계약은 그저 수단이야.”

[‘녹색 눈의 악마’가 멋있는 말을 하는 하람을 향해 휘파람을 붑니다.]

[‘붉은 눈의 악마’가 ‘녹색 눈의 악마’를 한심하게 여깁니다.]

[‘자색 눈의 악마’가 상황을 흥미롭게 관찰합니다.]

멋있는 말을 하는 하람은 손뼉을 쳐 주고 싶을 만큼 대단했지만, 감상에 취하기엔 불청객이 너무 많았다. 아까 인트로에서 세 명의 악마를 거느린 인간이라고 했지? 이게 바로 세 명의 악마인가?

[‘녹색 눈의 악마’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붉은 눈의 악마’가 악마라는 호칭에 불쾌감을 표합니다.]

[‘자색 눈의 악마’가 싱글벙글 웃습니다.]

뇌리에 콕콕 박히는 활자가 거북하고 불편했다. 왜 갑자기 장르가 성좌물로 급변하고 난리.

계약이라는 게 이걸 뜻하는 거였나. 나는 심각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하람을 계속 지켜보았다. 하람은 얼굴색도 바꾸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오히려 계약을 바라는 건 너희가 아니었나? 사람을 가둬 놓고 협박하는 존재가 남 좋은 일만 시켜 줄 리가 없지. 계약은 분명히 너희에게도 좋은 일일 거야. 어쩌면 너희에게만 좋은 일일 수도 있고.”

싸늘한 침묵이 핏빛 평원에 가라앉는다. 나는 하람과 레나의 표정을 살피며 소곤거렸다. 저거 맞는 말이야?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자색 눈의 악마’가 계약자의 말에 긍정합니다.]

영문을 모르는 레나의 표정이 알쏭달쏭하다. 하람은 침착하게 영주들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한참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레나의 의문은 이 던전을 나가고 나서야 해결될 듯했다.

【“건방지군.”】

저 동네 높으신 분들은 왜 다 말투가 저따위인 건지. 나는 저것과 비슷한 말투를 구사한 교만왕을 떠올리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영주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상황 파악이 빠른 단말은 나쁘지 않아. 단, 네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왼쪽의 빛 덩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온다. 하람이 덮어쓴 모습과 똑같은 모습의 형체가 빛 위로 덮어씌워 진다. 그렇군. 저쪽이 바르바토스인가.

【“선택은 네가 아니라 우리가 하는 거다. 주도권을 쥔 건 네가 아니라 우리다. 선택받고 싶으면 조금 더 고분고분하게 굴도록 해라.”】

거들먹거리는 목소리가 참 우스웠다. 얼마나 실력에 자신이 있으면 저런 대사를 부끄러움 없이 칠 수 있을까. 하긴 그들은 고대 신으로 추앙받는 옛 영주 중 하나이니 딱히 무서울 것도 없었다. 실력이 있으니 인트로에서 보았던 짓도 저지를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럼 계약 안 하도록 하지.”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우선 여긴 내부 차원이라 그들의 홈그라운드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은 싹 다 봉인당해서 본체를 끌고 나올 수 없는 상황. 봐라. 지금도 고작 환영 따위로 인간들을 괴롭히고 있잖아. 심지어 그때 봤던 교만왕이랑 클라스도 다르다. 정말 밑도 끝도 없이 약해진 상태인 듯했다.

【“뭐, 뭐라고?”】

“계약 안 한다고.”

싱글벙글 웃는 얼굴의 하람이 손을 털며 말했다. 당황한 듯한 바르바토스의 음성이 압권이었다. 그게 얼마나 웃긴지 악마 삼인방의 감상평이 주르륵 떴다.

[‘녹색 눈의 악마’가 배를 잡고 웃습니다.]

[‘붉은 눈의 악마’가 흥미로워합니다.]

[‘자색 눈의 악마’가 추하다고 즐거워합니다.].

【“네가 뭔데 계약하고 말고를-!”】

“영주님 말마따나 하찮은 존재라서 계약하긴 어렵겠네요. 다른 인간 찾아보세요.”

하람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도발적인 수를 던졌다. 저렇게까지 해도 되나. 저 둘이 하람 말고 다른 인간을 찾아가면 어쩌려고.

나는 흥미진진하게 흘러가는 상황을 손에 땀을 쥐어 가며 구경했다. 갑자기 딸린 세 명의 투머치 토커 중 하나가 걱정할 필요 없다며 속삭여 왔다.

【“이 환영 속에 영원히 갇혀 있고 싶은 것이냐!”】

“그거야 뭐 바깥에서 구조대가 오겠죠. 그리고 긴 시간 유지하기 힘들어 보이시는데, 안 그런가요?”

하람이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는 불사 군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저 두 군단이 서로 치고받고 싸운 이유는 군단의 세를 줄이기 위해서였구나.

[‘자색 눈의 악마’가 계약자를 향해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붉은 눈의 악마’가 계약자를 너무 오냐오냐하는 ‘자색 눈의 악마’를 비난합니다.]

[‘자색 눈의 악마가 계약자에게 도움 하나 안 되는 ‘붉은 눈의 악마를 조롱합니다.]

투머치 토커들이 싸우든 말든 하람과 바르바토스의 밀당은 착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긴 하람이 말하기를, 저 두 영주는 하람을 끈질기게 스토킹해 왔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현대 의학의 힘은 물론이고 신묘한 힘까지 접한 하람이 확신을 잃을 리가 없었다. 저 영주들이 무슨 의도로 하람을 고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둘 다 하람을 놓치고 싶진 않을 것이다.

【“크윽!”】

그리고 그 예상이 적중했는지, 바르바토스가 한 걸음 뒤로 물러갔다. 이 우습기 짝이 없는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는 건 아까부터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투머치 토커들이었다.

[‘자색 눈의 악마’가 봉인 상태의 영주들은 내부 차원에서 큰 힘을 쓸 수 없다고 말합니다.]

[‘녹색 눈의 악마’가 저것들이 멍청하게 힘을 뺐으니 계약자를 구하지 않으면 한동안 잠만 자야 할 거라고 비웃습니다.]

[‘붉은 눈의 악마’가 배후 계약에는 늘 신중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아하. 그러니까 저 두 영주는 봉인 상태에서 이 던전을 열고 환영을 구현하는 데 제법 큰 힘을 쏟았고, 이번에 하람과 계약하지 않으면 그 여파로 잠만 자게 될 거라는 소리구나.

외부 차원에 봉인된 영주는 무려 일흔이 넘는다. 저 둘이 생각한 것을 다른 이들도 생각하지 못할 리가 없으니 한숨 자고 오면 저 둘은 기회를 빼앗긴 것이 되겠지. 그새 노리고 있던 하람이 다른 영주와 계약할 수도 있고.

계약의 세계가 제법 흥미로웠다. 게이트가 우후죽순으로 열리기 시작한 건 외부 차원의 간섭이 심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계약자를 찾으려는 그들의 움직임일까. 어느 쪽이든 외부에서의 간섭이 심해진 것은 같다. 썩 좋지 않은 신호였다.

【“설마 지금의 네게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계약은 네게 더 큰 힘을 가져다줄 것이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어요. 힘을 주는 대신 다른 걸 요구할 것 같은데. 제 말이 틀린가요?”

【“그, 그건!”】

하람과 바르바토스가 이야기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바르바토스 쟤는 참 순박한 친구구나 싶다. 인트로에서도 레라지에한테 홀라당 넘어가더니. 약간 뇌 주름이 맑고 깨끗한 게 특징인 영주인가?

“그래도 계약에 흥미가 없는 건 아니라서요. 계약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죠? 설마 구두 계약은 아니겠죠? 서면 계약인가요?”

【“구두? 서면?”】

대화 꼬락서니를 보니까 홀라당 구워삶아서 어떻게든 잘 해결할 것 같다. 하람은 새벽 애들답지 않게 여우 같은 면이 있었다. 나는 하람과 바르바토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무너져 가는 지평을 바라봤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나는 세 악마를 향해 질문했다.

“이 환영 속 ‘인간’은 누구지?”

진득한 피 웅덩이에 심연같이 새카만 눈이 비친다. 교만왕의 환영에 나왔던 자와 같은 사람. ‘인간’이라는 종족명으로 불리는 개체.

무표정한 낯 위를 그보다 싸늘한 눈빛이 채웠다. 줄곧 입 무거운 줄 모르고 조잘조잘 떠들던 악마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문다. 나는 재촉하듯 속삭였다. 빨리 말 좀 해 봐.

[‘자색 눈의 악마가 아직은 너무 이른 것 같다고 말합니다.]

[‘붉은 눈의 악마’가 오랜만에 봐서 기뻤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악마가 대답을 회피하곤 말을 멈췄다. 그러나 녹색 눈의 악마는 말이 없었다. 나는 일부러 그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녹색 눈의 악마는 잠깐의 침묵 끝에 물었다.

[‘녹색 눈의 악마’가 진실을 알고 싶냐고 묻습니다.]

알고 싶은 게 당연했다. 잇따른 던전에서 나와 똑같은 얼굴의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궁금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하지. 나는 녹색 눈의 악마를 맹비난하는 두 악마의 토크쇼를 흘려 넘기며 고개를 돌렸다.

“좋아. 계약하자, 바르바토스.”

옛 영주를 앞에 둔 하람이 선언하듯 말했다. 빛 덩이에 닿은 그의 손끝으로 사슬이 나타나 두 존재를 묶었다. 얄팍한 환영이 유리잔처럼 깨져 나간다.

그날 내가 본 것은 지구 최초의 배후 계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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