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불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단 해골 군단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하람은 제 휘하의 해골 군단을 움직이며 일시적으로 얻게 된 권한을 파악했다.
‘쪽수는 많지만, 지능이 딸려. 망가져도 쉽게 복구할 수 있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지. 이런 건 머리를 치러 오면 그만이다.’
약한 적 다수를 상대할 때는 압도적으로 유리하나, 강한 적을 상대할 땐 맞지 않다. 손가락테크닉쯤 되는 위인이 오면 이 해골 군단 따위는 발차기 한 방에 날아갈 테니까.
또 지능이 낮은 탓에 돌격용으로밖에 못 쓴다는 단점이 너무 컸다. ‘움직여’와 ‘멈춰’ 밖에 모르는 이 멍청한 해골들에게 정찰 따위를 시켰다가는 속 터지는 결과나 불러오고 말 터다.
순식간에 현실을 깨달은 하람은 한숨을 내쉬며 군단을 점검했다. 유지비 안 들고 관리 쉽다는 것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아, 쪽수로 압박하거나 간지 따위를 고려해 보면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네크로맨서는 판타지에 로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꿈꿔 보는 직업이니까. 게임에서도 각광 받는 직업에 속하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게임이 아니고, 지금은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레나를 바라본 하람이 생각했다.
‘차라리 저 인간이 된 게 레나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처리하기 편했을 테고.’
레나가 알았다면 화끈하게 멱살부터 잡았을 소리다. 그러나 하람은 분란의 소지가 있는 말을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특히 저렇게 시끄럽고 말 많은 사람 앞에서는.
하람이 곰곰이 생각해서 정리한, 이 환영에서 깨는 방법은 총 세 가지.
첫 번째는 환영의 주인이 원하는 대로 ‘인간’을 죽이는 것.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한 방법이지만, 하람은 이 방법이 아주 위험하고 현실성 없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이 영양가 없는 해골 군단과 기존의 역사가 걸린다. 이 환영은 복수하려고 이를 아득바득 간 두 영주의 집념이 만들어 낸 산물. 그러나 두 영주는 둘이 힘을 합치고도 인간 하나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니 레나와 하람이 힘을 합쳐도 ‘인간’을 이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두 번째니 패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다. 그런 거라면 첫 번째에 승리를 거머쥐었을 테니까.
게다가 이 해골 군단, 정말로 쓸모없다.
“차라리 원래 특성을 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람은 뒷말을 삼키며 미간을 좁혔다. 손가락테크닉을 ‘악’으로 구분해 상대하고 옆에서 레나가 능력을 강화하는 식으로 보조한다면, 부딪혀 보기라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지금 하람에게 주어진 건 잘 알지 못하는 영주의 능력. 이길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다. 이건 ‘그’ 손가락테크닉이기에 더했다.
손가락테크닉은 영웅. 헌터 협회가 대놓고 내건 인류의 희망. 그 강함은 인류의 희망이라는 칭호가 무색하지 않다. 실제로 지금까지 손가락테크닉보다 강한 각성자가 나온 적 없었다. 또 손가락테크닉이 없애지 못할 던전이 나온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인류에게 손가락테크닉이란 이름은 희망이자 잣대였다. 특급 게이트라고 해 봤자 결국 손가락테크닉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수준. 어찌 됐든 인류는 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손가락테크닉이 죽는다면? 등급 외 게이트에서 손가락테크닉이 죽었다간 세계가 발칵 뒤집힐 거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게 될 테고, 각성자들은 생각하게 되겠지. ‘그’ 손가락테크닉도 죽은 게이트에 저들이 들어가서 어쩌겠냐고.
그렇게 되면 인류는 한발 후퇴해야 한다. 각성자들이 지켜 온 그럴듯한 평화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 터다.
‘손가락테크닉을 죽일 수는 없어.’
하람은 주먹을 그러쥐며 고개를 돌렸다. 이 환영에서 깨는 방법 두 번째는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게이트의 웨이브 확산을 유도하는 것이다.
원래 안에서 가두는 류의 환영은 바깥의 충격에 약하다. 이대로 시간을 끌어 게이트가 웨이브로 확산되면 밖에서 지원군이 올 터. 그렇게 된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이 환영의 주인이 원하는 건 저 ‘인간’의 형체를 뒤집어쓴 손가락테크닉을 죽이는 것. 그건 그들에게 있어 최악의 결과다. 이 게이트의 웨이브 확산을 유도해서라도 이 환영의 주인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해가 되는 것. 하람은 이와 비슷한 술수를 짜는 자를 알았다.
선도 악도 아닌 자. 끝없는 수레바퀴에 걸려 선악조차 잴 수 없는 자. 더 큰 선을 위해 악의 길을 걷는 자. 손가락테크닉 뒤통수에 붙어 있는 보라색 눈.
“레나 님. 제가 잠깐 생각해 봤는데요.”
“네?”
“덧씌워져 얻은 힘이 뭔지 저희도 잘 모르잖아요?”
“그렇죠. 아무래도 원래 가진 특성이 아니니까요.”
하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레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웃는 얼굴의 하람 뒤로 그의 군단이 삐걱거리며 정렬했다.
“그럼 잠깐 시험해 볼까요? 다른 특성을 가지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요.”
고개를 든 레나가 가지런히 정렬한 해골 군단을 보았다. 지금은 사라진 은인을 찾을 때였지만, 사실 그녀의 마음속엔 작은 불씨가 일렁이고 있었다.
‘느낌을 보니 해골 대 해골 전을 제안할 모양인가? 구미가 당기긴 하네.’
직접적인 전투 특성을 가진 우연이나 하람과는 다르게 레나의 특성은 증폭. 누군가의 보조나 아이템 사용에 특화된 특성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골 군단을 움직여 볼 기회는 평생 가도 없을 기회였다. 해골을 생성하고 부릴 수 있는 아이템이라도 나오면 모를까.
“제가 명령을 내려 본 결과 이 군단은 집단 명령은 몰라도 개별 명령은 잘 듣지 않아요. 이 상태라면 아까 그분을 찾으라고 명령해도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을걸요. 차라리 저희끼리 연습해서 개별 명령을 내리는 노하우를 쌓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람은 유혹에 넘어가기 직전인 레나를 살살 구슬렸다. 레나는 눈을 질끈 감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런 거라면 한번 해 보죠.”
레나가 뒤집어쓴 육신의 엷은 보랏빛 눈이 반짝 빛났다. 드드드드-! 지반이 울리며 레나가 가진 군단이 일제히 움직인다.
하람은 레나의 군단에 맞서 자신의 군단을 움직이며 웃었다. 상대가 너무 강대해 마주할 수 없다면, 일단 깎아 낸다.
‘조만간 큰일이 있을 거야. 세계를 뒤흔들 정도의 큰일이.’
‘큰일이요?’
‘그래. 조언하건대, 큰일이 생기면 일단 깎아 내. 큰 물고기를 낚으려면 체력을 깎아 내며 버텨야 하잖아? 비슷한 거야.’
하람이 만난 무속인의 눈은 이 영주들보다 훨씬 짙은 보라색이었다. 그는 무속인이 각성자이며, 훗날을 예견하는 종류의 특성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깎아 내고 난 후에는 제대로 보도록 해. 그 삿된 것들은 봉인된 상태니까 주도권을 쥐기 쉬울 거야.’
‘그리고요?’
‘계약을 요구해. 계약의 기본은 이명이 아니라 본명을 나누는 거다. 선택의 기회가 오면 쓸모없는 궁수보단 통역사 쪽을 선택해. 틀림없이 도움이 될 테니까.’
그 뒤에 그자를 한 번 더 찾았을 땐, 그자의 눈 색이 바뀌어 있었다. 비각성자와 다를 바 없는 칙칙한 갈색. 하람을 딱 붙잡고 말을 늘어놓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말투.
무속인이 되려면 신내림을 받는다더니. 그자는 정말로 신에 씌었던 걸까. 하람은 그 후에도 무당이 한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언젠가는 알 수 있겠지. 똑같은 인간을 찾아가라는 말을 한 건 큰일이 그 근처에서 생기기 때문인가?
의미 없는 나날이었다. 하람은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예견된 말에 따라 발전했고, 저와 똑같은 사람을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발견했다. 뒤에 눈 일곱 쌍을 붙이고 다니는 이를.
‘도 안 믿어요.’
너무 들이댄 탓에 조금 오해를 받긴 했지만.
‘대출도 필요 없어요. 보험도 필요 없고요, 각성 물약도 필요 없거든요. 사이비 종교는 더욱 사절이고요.’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제 오붓하고 평화로운 식사 시간을 방해하실 생각이라면 얼굴이라도 공개하시는 게 어떨까요? 잘생겼으면 그대로 앉아 계셔도 봐드릴 의향이 있거든요.’
사실 많이 황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얼굴이라면 자신 있었다. 얼굴 팔리는 것 또한 상관없었다. 지금 세계가 뒤흔들릴 큰일이 생긴다는데 얼굴 팔리는 게 대수인가. 하람은 뭐가 우선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얼굴쯤은 기꺼이 팔 의향이 있었다.
부우우웅-
때마침 진동벨이 울리면서 망했지만. 하람은 갑자기 골이 울리는 것 같은 기분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거쳐 도달한 장소였다.
「“인간을 죽여라!”」
「“단말의 자격을 증명하라!”」
「“우리는 가장 지고한 자리에 앉은 자. 좌(座)에 앉은 신을 알현할 기회가 왔다.”」
「“우리의 원수를 살해해 너의 가치를 보여라!”」
두 영주가 하람의 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시야 안쪽에서 엷은 보랏빛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콰과과광-!!
레나의 군단과 부딪힌 하람의 군단이 망가지고 수복되기를 반복한다. 해골 군단이 수복이 쉽다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페널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저 군단을 포함해 이 영주의 휘하에 있는 모든 것들은 수복되며 마나를 소모한다.
해골 병사 하나는 아주 적은 양의 마나를 소모하지만, 그 단위가 군단이 된다면? 무려 30여 개의 군단이 된다면?
마나 소모량은 차원이 달라진다. 하람은 쭉쭉 빠져나가는 마나를 느끼며 씩 웃었다. 목소리들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쓸모없는 짓은 그만둬라. 빨리 인간을 죽여!”」
「“마나를 다 써 버리면 인간을 죽일 수 없다. 역사를 반복하고 싶은 거냐? 너는 그러면 밖으로 나갈 수 없어!”」
「“그만!! 그만!!!”」
머리가 띵하도록 울리는 비명이 우아한 곡조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같았다. 하람은 폭풍처럼 흔들리는 엷은 보랏빛이 속수무책으로 사그라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람의 특성을 가리키는 지표는 눈 색이다. 하람은 손가락테크닉의 뒤통수에 붙어 있는 보라색 눈이 제가 본 무속인의 눈 색과 똑같다는 것을 알았다. 염색이 주 컨텐츠인 게임으로 수련한 RGB 값 구분 덕분이었다.
세계를 뒤흔들 큰일은 손가락테크닉의 죽음. 보라색 눈은 영웅의 죽음을 막고자 그를 보냈다. 어디까지 바랐을지는 알 수 없지만, 계약까지 논한 거로 봐서는 저 목소리와 계약하는 상황까지 바란 거겠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주어진 기회를 걷어찰 셈이냐?!”」
거칠게 파도친 엷은 보랏빛이 이제는 겨우 꿈틀거렸다. 하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아니. 나는 너희에게 요구하고 싶은 게 있다.”
이 환영에서 깨는 세 번째 방법.
“나와 계약하자.”
그건 바로 이 환영을 만든 존재와 계약하는 것이었다.
「“⋯⋯.”」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두 목소리가 침묵했다. 하람은 지금도 끝없이 부서지고 수복되는 군단을 바라보며 웃었다.
* * *
하람이 한창 ‘깎아 내기’를 시도하고 있을 시간. 한편, 보라색 눈이 붙은 그 손가락테크닉은.
[‘붉은 눈의 악마’가 멍청한 계약자에게 불만을 표합니다.]
[‘녹색 눈의 악마’가 바보 같은 계약자를 비웃습니다.]
[‘자색 눈의 악마’가 두 악마를 나무랍니다.]
“미친, 이게 뭐야.”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들판 한구석에서 혼자만의 싸움을 이어 나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