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화
위대한 ■■■는 대륙 북서쪽 영지의 주인이었다. 그는 그의 쌍둥이 형제 ■■와 함께 일흔 두 체의 신 중 하나로 군림하고 있었으며, 날개 달린 족속들의 영지에서 추방당한 죄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일흔 두 개의 영지로 쪼개진 대륙은 각 영지 지배자의 성향에 따라 살기 좋고 아님이 갈렸다. 불행하게도 ■■■는 잔인하고 과격한 성향의 지배자였으며, 그보다 더 불행하게도 그의 영지 주민들은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차라리 그의 영지 주민들의 종족이 멍청한 오크나 트롤이었으면 상황이 좀 나았을까. 그러나 그의 주민들은 영민한 편에 속하는 종족이 다수였고, 자신들이 지배자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모두가 그의 영지에서 탈출하길 원했다. 실제로 대탈출은 이루어지고 있었다.
【“젠장!”】
■■■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권좌를 내려쳤다. 쉴 새 없이 땅따먹기가 일어나고 있는 동네였다. 인구의 감소는 자연스럽게 세력의 감소로 이어진다.
【“미개한 종족들 같으니! 고작 세금을 올린 것 가지고 이 땅을 떠나?!”】
■■■가 분노하자 성이 무너질 듯 떨렸다. 공포에 질린 노예들이 그의 외침에 몸을 사렸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가 웃음을 깔깔 터뜨리며 말한다.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젠가 배신하기 마련이지. 내가 좋은 방법을 알려 줄까?”】
【“좋은 방법?”】
【“그래.”】
■■의 엷은 보라색 눈이 불길하게 일렁였다. 그는 해맑게 웃으며 천천히 고했다.
【“다 죽이고 다시 일으키면 돼. 사령 마법을 두고 직접 무기를 들더니 머리까지 돌이 된 건가? 우리의 특기를 살려 보자고.”】
그 말을 들은 ■■■의 엷은 보랏빛 눈에 이채가 돌았다. 여덟 번째 영지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영주인 ■■■는 영지민을 미친 듯이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미 제 영지를 불사의 군단으로 만든 지 오래인 ■■가 형제를 도왔다.
수많은 영혼이 ■■■의 손아귀에 묶였다. ■■■와 ■■는 오래도록 불사의 영지에 군림했다.
【“이 동네는 말도 안 되게 역겹네.”】
세 명의 악마를 거느린 ‘인간’이 나타나기 전까지.
* * *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손끝에 걸렸다. 나는 곧장 토할 것만 같이 메스꺼운 속을 달래며 눈을 떴다. 눈앞에 현란하게 펼쳐지는 보랏빛 글씨가 시스템 창처럼 가지런한 형식을 갖췄다.
[정신 간섭 마법: 역사 개변]
[억울하게 봉인된 ■■■와 ■■….]
[억울하게 봉인된 바르바토스와 레라지에. 두 영주가 힘을 내건 환영이 펼쳐졌다.
간악하고 비열한 ‘인간’을 죽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라!
승리한 자에게 영광 있으니!
동료를 제물로 바쳐 값어치를 증명한 자는 영주의 신임을 얻을 것이다.]
[보상: 바르바토스 혹은 레라지에의 서클, 계약]
까악! 까악!
깃 끝이 피범벅인 까마귀가 정신 사납게 울었다. 코끝을 스치는 건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역겨운 피 냄새였다.
빼곡하게 쌓인 뼈의 탑이 평원에 자리한다. 단 두 걸음 만에 신발이 핏물로 절었다. 붉은 강이 흐르는 벌판에 거대한 백골 군단이 정렬해 있었다. 토악질이 나올 만큼 끔찍한 광경이다.
[당신은 지금 전쟁터에 있습니다.]
[한쪽 진영이 무너지거나 정신 간섭이 깨질 때까지 상태 이상이 지속됩니다.]
[현재 진영: 바르바토스(이하람), 레라지에(류예나) vs 인간(우연희)]
[상대의 정보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 레라지에]
[계열: 아브림 VII / 사령술사(8서클)]
[특성: 썩어들어가는 화살]
[대입자: 류예나]
[■■■ 바르바토스]
[계열: 아브림 VIII / 사령술사(8서클)]
[특성: 만의 언어]
[대입자: 이하람]
[우리는 절망, 잔혹, 무자비, 악의, 곤란, 손실을 관장하는 자.]
[우리는 ‘인간’의 생존을 원치 않는다.]
[동족 살해로 단말의 자격을 증명하라.]
뼈 무덤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솟구친다. 따각따각 소리를 내며 조립되는 건 해골 병사들이다. 이게 갑자기 무슨 상황이지. 나는 눈을 굴려 몸을 숨길 곳을 찾았다.
[당신은 ‘인간’입니다.]
[■■ ■■■ ■■]
[■■■■ ■■]
바닥에 우묵하게 고인 핏물을 밟자 철퍽철퍽 소리가 났다. 이딴 시스템 창 같은 거 안 띄워 줘도 괜찮다. 지금 내가 심히 X됐다는 건 위의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이 던전의 보스인 네놈들은 외계판 변 사또고, 외계판 이몽룡인 ‘인간’한테 뒈졌다는 말 아니야. 그걸 이제 와서 걸고넘어지겠다는 거고.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암행어사 출두란 말인가. 게다가 보상에 있는 계약과 단말의 자격을 증명하라는 말을 보니 하람을 시험하기 위한 컨텐츠군.
[‘녹색 눈의 악마’가 당신의 배후자(背後者)가 되길 원합니다.]
새삼스럽게도 아는 외계인이 떠오른다. 저열한 목소리로 속삭이던 녹색 눈의 악마.
계약을 바라는 건 외계인 종특인가. 목소리가 뭐였는지 이제야 알겠어. 목소리가 들리는 인간은 왹져 놈들이 점찍은 군침 싹 도는 계약자 후보라는 거지?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피 웅덩이 앞에 섰다. 작은 샘처럼 고인 붉은 액체 위로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에 무저갱처럼 시커먼 눈. 분명히 그때 교만왕의 환영에서 보았던 모습이다. ‘인간’이라. 나는 뺨 위를 더듬거리며 이전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들 모두가 인간이 이 사람 혼자인 것처럼 말했다. 인간은 지구에 한가득 있는데도.
쿠구구구-!!
혼자 고민하는 사이 수천수만의 해골 군단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땅이 뒤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거대한 뼈 탑 뒤로 숨었다. 아까 창이 이르기를, 이 환영의 주요 목표는 역사 개변. 이 환영을 만든 건 자격 있는 자가 아닌 두 영주이므로, 이 싸움에서 패배한 건 저 해골 군단을 지닌 영주들.
그래. 이 싸움에서 ‘인간’이 승리했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승리한 거지?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군단의 모습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적의 정보만 열람 가능하게 만들어 놓다니, 이 엿 같은 자식들. 지옥에 떨어져라!
나는 욕설을 삼키며 사방을 살폈다. 일단 능력이고 뭐고 내 상태를 점검할 시간이 필요했다.
* * *
[우리는 절망, 잔혹, 무자비, 악의, 곤란, 손실을 관장하는 자.]
[우리는 ‘인간’의 생존을 원치 않는다.]
[동족 살해로 단말의 자격을 증명하라.]
[당신은 열네 번째 영주 ‘레라지에’입니다.]
[사령 마법을 쓸 수 있습니다.]
[서른 개 불사 군단의 지휘권을 갖습니다.]
불길한 보라색 글씨가 한 글자씩 적혀 나간다. 형식은 똑같은 시스템 창이나 헌터 협회의 연푸른색과는 궤를 달리하는 불길함이 느껴진다.
영주 레라지에의 형상을 덮어쓴 레나는 그 창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곤란하네요. 시간이 모자란 데 이런 함정에 걸려들다니.”
사람을 환영에 빠뜨리더니 역사 개변을 원한다면서 ‘인간’ 살해를 요구한다.
동료를 제물로 바치라는 말이 불길하고, 또 보상에 적혀 있는 계약이 뭔지 모르는 상황. 누군지는 몰라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수를 썼다. 자신들이 짜 둔 판에 인간을 올려놓고 인형 놀이를 하려고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었던 거다.
‘역시 악덕 영주 놈들인가.’
사람들이 세금 높고 영주가 포악한 땅에서 살기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이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 우리 동네보다 옆 동네가 세금도 낮고 영주도 착하다는 데 당연히 도망가지! 주민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거다.
그런데 저놈들은 그걸 도망간다고 다 죽여 버렸다. 그리고 언데드로 만들어서 이 어마어마한 불사의 군단을 만들어 냈다.
‘아니, 이게 무슨 영지 타이쿤이야? 게임에서도 저러진 않겠다. 오히려 게임이면 업적 깨려고 더 열심히 가꾸겠지.’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들. 너희들 성격이 그렇게 더러우니까 다들 도망가는 거 아니야.
레나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저 녀석들은 충분히 추방당할 만하다. 추방이 쉬운 것도 아니고 저 인성 끝내주는 영주 놈들이 분명히 뭔가 했겠지. 능력도 봐라, 사령 마법이잖아. 네크로맨서는 원래 어느 동네에서건 불길함의 온상 아니던가.
그런 주제에 불행하게도 내 영지 주민이 트롤이나 오크가 아니여서~ 이러다니. 그 찌질함이 영지를 넘고 차원을 넘어 서울에 사는 헌터에게까지 닿았다.
‘자기들 복수를 남에게 하라는 소리를 할 때부터 알아봤어.’
레나는 죽어 나간 영지민에게 잔뜩 이입해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앞서 보여 줬던 스토리가 너무 실감 난 탓이었다. 거의 블록버스터 영화급이었다고 그녀는 속으로 변명했다.
“그러게요. 게다가 아까 같이 있던 그분이 ‘인간’에 들어간 게 걸리네요. 아무래도 빠르게 나가려면 저 영주들이 원하는 대로 ‘인간’을 죽여야 할 것 같아서요.”
어느 누군가가 영지민에 이입해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한쪽에는 그와 다른 부류의 인간도 있는 법.
레나가 감상에 젖어 있는 동안, 하람은 상대의 정보를 열람한 상태였다.
나를 알고 적을 아는 것은 어느 시대나 필승인 법이다. 이것저것 살펴본 결과 영주의 모습을 덮어쓰게 된 고로 능력치가 한껏 상승했다. 그러니 평소라면 어렵지 않게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제가 있었다.
‘적이 적이 아니라 동료라니.’
하람은 팔짱을 낀 채로 줄곧 띄워 놓았던 창을 보았다.
[■■■]
[계열: 인간 / ■■■■]
[특성: 신체 강화]
[대입자: 우연희]
그동안 따라다니며 얼굴은 많이 봤지만, 이름은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익숙한 느낌은 대체 뭔지. 분명 처음 보는 이름인데 낯익은 향기가 난다.
‘보나 마나 비눗방울이랑 길드장이겠지.’
모르는 이름인데 익숙한 것 같으면 십중팔구 둘 중 하나다. 아니면 방정맞은 제라늄 짓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지금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단 두 개.
[이매망량 출현까지, 04:45:11]
조만간 이 던전 게이트가 웨이브 게이트가 되어 밖으로 확산되는 것과,
[간악하고 비열한 ‘인간’을 죽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라!]
이 환영을 깨고 나가는 조건이 ‘인간’을 죽여야 한다는 것.
전자도 후자도 여러모로 문제다. 하람은 고개를 떨군 채로 곰곰이 고민했다. 빨리 던전을 클리어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지 않으면 길드에 발각된다. 그러면 분명 말도 없이 그의 담당 지역에서 벗어났다고 길드장의 갈굼이 시작될 것이다.
아무리 한 팀이라 한들 상사는 상사. 세상에는 비눗방울같이 이상한 인간도 있지만, 하람같이 지극히 정상인 인간도 있는 법이다. 그는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이 정상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전자는 뭐, 해결 못 해도 그렇다 치자.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 사람에게는 아직 용건이 남았다. 또 일반인 신분이니 함부로 죽였다간 매스컴 타기도 쉬웠고.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하람이 생각하는 게 맞다면 애초에 저 사람을 죽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색상만 보고 단숨에 RGB 값을 알아내는 게이머, 하람은 알았다.
‘눈이 갈색이 아니라 회색이었지.’
사실 모른 척하려고 했다. 그런데 너무 티가 났다. 일단 너무나도 선명한 (128, 128, 128) 컬러의 눈 색도 그랬고, 유튜버보다 기막힌 던전 상식도 그랬다.
‘저런 유튜버 있었으면 진작에 구독했다.’
지금이라도 ‘[우연희의 던전 상식 EP9] 언데드 몬스터를 상대할 때 필요한 것들 #하람 #레나 [LIVE]’ 이런 제목으로 방송하면 구독자가 어마어마하게 붙을 거다.
‘그리고 저번의 그 몸놀림.’
게이트에 삼켜지기 전, 창문으로 돌진하던 그 속도, 판단력, 태연한 얼굴까지.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아주 드물다.
이름을 보기 전까진 그래도 긴가민가했는데, 보니까 확신이 섰다. 하람은 미간을 짚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Q. 힘숨찐 랭킹 1위가 힘숨찐 하고 있는데 너무 티가 나요. 이럴 땐 어쩌죠?
A. 죽기 싫으면 필사적으로 모른 척해야죠. 제 일 아니니까 힘내요^^7
제라늄식 유튜브 리플이 머릿속을 종횡무진한다. 하람은 영혼 없이 웃으며 하늘을 보았다. 여러모로 절망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