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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54화 (54/175)

제54화

똑, 똑. 천장에서 물 새는 소리가 난다. 나는 물 새는 소리를 배경음으로 깔고 레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 뭐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네”

“우연 님이 왜 여기 계세요? 그것도 일소검이랑.”

날 배려해 고개를 살짝 내린 레나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기서 앞서 나가는 하람은 못 들을 만큼 작은 소리다.

“사실 저도 여기 있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슬프게도 사정이 있어서요.”

나는 슬픈 척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이야기했다. 그러자 레나가 호들갑을 떨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희 아가씨를⋯⋯ 헉. 이모님이 아가씨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입이 또.”

“아주머니를 말씀하시는 거죠? 알아들었어요.”

“네, 네. 저희 작은 이모님의 은인에게 사정이라니요. 말씀해 주시면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와드릴게요.”

두 주먹을 꽉 쥔 레나가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레나를 보며 얼마 전에 방문했던 사헌 길드를 떠올렸다.

나름대로 괜찮은 곳이었다. 길드원 어르신들도 친절하셨고, 저번에 봤던 아주머니도 만났다. 아주머니랑 같이 걷고 있으니 마주치는 모든 길드원이 아주머니를 아가씨라고 부르면서 인사하더라고. 어디서나 착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사랑받고 있다는 게 보여서 좋았다.

‘와! 우연 님이시죠?! 정말 뵙고 싶었어요!’

레나는 사헌 길드 탐방 때 화룡 아줌마가 붙여 준 길잡이였다. 내 나이가 어리다 보니 그들 중 가장 어린 레나를 붙여 준 거다. 본인도 희망하니까 선정은 일사천리. 나도 그녀는 나쁘지 않았다. 성격이랑 붙임성이 좋은 데다가 일 처리가 깔끔한 사람이었다. 어디 흠잡을 만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조금 곤란했던 건,

‘저희 길드 좋죠? 정말 최고죠? 어떠세요, 우연 님? 저희 길드에서 막내로 예쁨 받아 보시는 건?’

‘저희 아가씨⋯⋯ 아니, 작은 이모님 좋으시죠? 저희 길드 들어오시면 맨날 보실 수 있답니다!’

‘이건 비밀인데⋯⋯ 저희 길드에 들어오시면 길드장님 무기 창고 위치를 알려 드릴게요. 작은 이모님한테 부탁드려 보면 슬쩍 들어가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너무 노골적으로 영업하더라고. 그렇게 막내 하기가 싫었나.

하긴 레나의 눈물겨운 길드 막내 스토리는 이 바닥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다 아는 이야기였다. 오죽하면 레또막 같은 밈이 있겠어. 결국 레나는 또 막내다 이거지.

아무튼 지나간 일이니까 됐다. 막내가 싫은 건 아니지만, 저런 모습을 보고도 막내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나는 괜히 활짝 웃으며 레나의 호의에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엷은 산호색 눈의 레나가 더 적극적으로 부딪혀 왔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묻는 말에 신의가 담겨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하람의 뒤통수를 가리키며 속삭였다.

“사실 저분이 절 꾸준하게 스토킹하셨거든요.”

“네?! 간악한 새벽 놈들! 이번에도 우리 막내를 뺏어 가려고!”

“그런 건 아니고요.”

어허, 벌써 제가 사헌 막내 된 것처럼 말씀하신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특성 관련해서 볼일이 있으셨다네요. 얼마 전부터 이 근처에 돌발 게이트가 많이 생겼죠?”

“맞아요. 마포구 일대도 저희가 맡고 있거든요. 얼마나 많이 생기던지, 밥 먹다가 출동했다니까요.”

레나가 한숨을 짧게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고단한 한숨인지, 그녀의 얼굴 위로 과로사 직전의 S1팀이 겹쳐졌다. 그쪽은 예전에도 과로사 직전이었는데, 이젠 더하겠네. 나는 짧게 애도를 표했다.

“직접 뛰셨다면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제가 들은 바에 따르면, 이 근방에서 게이트가 생긴 이유가 저분 때문이래요.”

“⋯⋯네?”

레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긴 했다. 저 외계인들 사정을 그나마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일소검 님 말로는 자기 특성이 발전해서 외부차원의 왹져와 소통하는 샤먼이 되셨답니다. 그래서 외계인이 게이트 경보를 띠링띠링 울리셨다는뎁쇼?

입이 근질거렸다. 나는 하람의 샤먼 발전 스토리를 냅다 불어 버릴까 하다가 관뒀다. 솔직히 게이트를 부르는 남자도 어이없는데, 샤먼이 되어 외계인의 목소리를 듣는 건 더 어이없었다.

그래도 둘 중 뭐가 더 낫냐고 하면 당연히 전자지. 후자는 뭐, 사이비 종교 창설할 일 있나. 저 분야 탑이 버젓이 살아 있는 마당에 경쟁업체를 허락할까 몰라.

“자세한 이야기는 제가 말씀드리기 곤란하네요. 하지만 이 게이트가 자기 때문에 생긴 건 맞다고 하셨어요.”

“그게 정말이에요? 사람이 게이트를⋯⋯ 아니지. 게이트가 사람 때문에 생기는 게 가능한 일이에요?”

“어차피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침공하는 거니까요. 저분이 군침이 싹 도나 보죠. 저도 거기까진 몰라요.”

믿기 힘들 만큼 어이없는 소리다. 나는 벙찐 상태로 눈만 깜빡이는 레나를 끌고 가며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길 기다렸다.

산세가 험한 이 던전의 까마득한 절벽 위 지어진 수상한 동굴. 나와 하람은 레나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 올라왔지만, 놀랍게도 레나가 우리보다 빨랐다.

사람이 무슨 삶을 살면 저렇게 암벽을 잘 타는 건지. 우리는 벽을 기는 모 벌레를 연상케 하는 속도의 암벽 타기를 보며 감탄했다.

저건⋯⋯ 프로였다! 진정한 고수! 인간 바 선생으로 생활의 달인 나와도 되겠다! 조만간 변신하는 게 아닐까! 그녀의 인생 장르는 고전 문학이었단 말인가!

놀라운 암벽 타기 솜씨로 나와 하람의 정신을 쏙 빼놓은 그녀는 나와 하람을 보자마자 울분을 토해 냈다. 현재 이 던전에 진입한 사헌 길드원은 네 명. 레나와 다른 길드원 셋.

‘저 아래에 큰 구덩이가 있어서요. 일단 저만 정찰로 빠지고 세 분은 아래에 계세요.’

‘위에 보스몹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혼자 오셨다고요? 그것도 레나 님이? 공격 특성이 있는 분이 오시는 게 좋지 않나요?’

‘아, 그건 제가 등산 동호회 소속이라서요.’

레나는 쓸쓸한 눈길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와 하람은 그녀의 제스처 하나에 모든 것을 이해했다. 아⋯⋯ 제일 절벽을 잘 타신다 이거군요. 아까 그것만 봐도 알죠. 오케이, 이해했습니다.

‘슬프게도 다른 분들은 바다에 특화되어 계시거든요. 마포니까 물이랑 관련된 게이트가 열릴 줄 알았지.’

지명 가지고 물길 소리 하기엔 포구가 닫힌 지 너무 오래되지 않았나요. 이 사람 연배가 대체 몇이야.

왜 서초구에 안 있고 마포구에 있나 했더니, 그런 사연이. 하지만 놀랄 만큼 어이없는 이유였다. 그런 거라도 믿고 싶을 만큼 일하기 싫은 거냐고. 그래 봤자 레또막인데.

‘일단 같이 들어가는 게 좋겠네요.’

불행한 레나를 앞에 두고 곰곰이 생각하던 하람이 말을 꺼냈다. 이 산꼭대기에 있는 동굴에 뭐가 있을진 모르지만, 레나의 특성을 고려하면 데려가는 게 좋은 판단이긴 했다. 일단 나는 던전 클리어에 쓸모없는 쪽이니까.

“그런 말은 처음 들어요. 그럼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표정이 제법 진지해진 레나가 슬쩍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요. 그래도 하람 님이 어떻게든 나가게 해 준다고 하셔서요. 그래서 쭉 일반인인 척하고 있었어요. 각성자인 거 알면 말 바꾸실 수도 있잖아요.”

말 바꾸면 큰일 나지. 지금 가진 단서는 하람이 정체 모를 외계인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뿐인데.

그리고 이제 와서 놓기에도 조금 애매했다. 차라리 대놓고 수상한 낙원 놈들한테 외계인이 등 뒤에 붙어 있단 소릴 들었으면 덜 당황했을 거다.

하지만 하람은 그쪽과는 일절 관련 없는 인물. 낙원 놈들이 하람한테 일부러 외계인 얘기를 흘렸을 리도 없고. 거짓말하는 건 아닐 텐데.

나는 고개를 들어 하람의 뒤통수를 빤히 바라봤다. 거대한 석조 문 앞에 선 그가 돌연 고개를 돌린다. 내 키에 맞춰 고개를 살짝 내려 주었던 레나가 다시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다.

“여기 문이 있는데 어떡할까요? 일단 열어 볼까요?”

돌로 된 문 위에 알 수 없는 그림이 새겨져 있다. 나는 하람의 옆으로 다가가 문에 그려진 그림을 살펴보았다.

대검을 든 적과 대적하는 두 인물의 그림. 총을 든 남자와 활을 든 남자. 그들의 뒤에 빼곡하게 쌓인 뼈와 살점의 산. 악의 가득한 그림이었다.

“심상치 않네요.”

그림을 본 레나가 코멘트를 남겼다. 나는 레나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섣불리 들어갔다간 화가 될 것 같이 생겼다.

“그렇지만 들어가지 않으면 다시 나가야 해요.”

그렇지만 하람의 말도 일리가 있다. 대놓고 ‘나 보스 방이요’ 하고 말하는 것처럼 생겼다. 이 안에 리치가 있으려나.

“일단 돌아가죠. 밑에 저희 길드원들이 있거든요. 다 같이 오면 좀 나을 거예요.”

“이 안에 있는 게 아직 뭔지 모르잖아요. 의외로 더 길이 있을 수도 있어요. 다른 사람들까지 불러오면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될 거예요.”

“그래서 셋이서 들어가자고요? 이거 등급 외 게이트인 거 뻔히 아시면서요? 저희가 손가락테크닉 님도 아닌데 그런 모험을 하는 게 말이 되나요?”

“웨이브 확산까지 고작 5시간 남았어요. 이 일대가 몽땅 산으로 변하면 어떻게 책임지시게요?”

“반대로 셋이서 다섯 시간 안에 공략을 끝내는 게 가능한지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웨이브로 확산될 거라면 안정성을 갖추는 게 낫다고 봐요.”

레나와 하람이 옥신각신 다투기 시작했다. 둘이 한 팀이 아닌 데다가 팀에 리더가 없어서 벌어진 일이었다. 뭐, 헌터 여럿 있으면 흔한 일이지.

“레나 님 같은 분이 세 명이면 모를까 그게 아니면 절벽 타는 데 시간이 엄청 걸릴 텐데요. 게다가 레나 님이 보스 탐색을 맡으셨다면 세 분은 게이트에 휘말린 일반인을 구하고 계시겠죠. 이미 구한 걸 버릴 수도 없으니 데리고 와야 할 텐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생각해 보셨어요?”

“그러는 하람 님은 저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들어가자고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안에 군단장급 몬스터가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저희가 먼저 들어가서 죽으나 지원을 기다리나 웨이브로 확산되는 건 마찬가지예요. 몬스터나 던전 등급이 정해진 게이트면 모를까 등급 외 게이트잖아요.”

둘 다 논리왕이네. 나는 퇴계 이황처럼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다식 사고를 펼쳤다. 하지만 진짜 둘 다 그럴싸했다.

이 안에는 두 사람이 감당 가능할 만한 수준의 몬스터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거의 슈뢰딩거의 몬스터였다.

감당 가능한 몬스터라면 하람의 말대로 하는 게 맞고, 불가능한 몬스터라면 레나의 말대로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등급 외 판정이 난 고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확률은 반반. 랜덤 박스 까듯이 결정 나는 운명.

나는 두 사람에게서 멀어져 석조 문을 바라보았다. 대검을 든 적 뒤로 세 쌍의 눈이 그려져 있다. 총을 든 남자와 활을 든 남자의 표정이 처절하다. 두 사람이 한 사람에게 대적하는 것임에도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뒤에 그려진 해골 군단이 무색하게도.

문짝에 괜히 이런 그림을 그려 놨을 리가 없는데. 뭔가 뜻하는 게 있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다툴 시간에 그림 해석이나 해 보라고 할 셈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열심히 레나를 설득하고 있던 하람이 말다툼에 종지부를 찍었다.

“둘이 아니라 셋이라면 어떻게 하실래요?”

레나의 산호색 눈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나는 갑작스러운 주목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죠.”

뭘 그러죠야. 사람이 알아듣게 인간의 언어로 말해.

두 사람은 자기들끼리 쑥덕대더니 잽싸게 문 앞으로 다가왔다. 하람의 손이 자연스럽게 문 위에 닿는다. 이윽고 환한 빛이 우리 앞으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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