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언데드가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산 필드의 던전. 그 뒤로도 우리는 꾸준하게 몬스터를 맞닥뜨렸다.
“헌터님, 두 번째 나뭇가지 앞에서 우회전이요. 습격에 대비하세요.”
“헌터님, 우측으로 반걸음 가시면 흙이 꿈틀거리고 있거든요. 습격에 대비하세요.”
“헌터님, 절벽 아래 뼈다귀 딱딱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습격에 대비하세요.”
근데 난 힘없는 일반인이고, 물리치는 건 하람이라 아주 편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뭐라도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내비게이션을 자청하며 영상을 찍고 있었다.
하람은 여전히 날 보며 숨길 생각이 전혀 없냐고 물었지만, 솔직히 뭔 소린지 잘 모르겠다.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서 조회수로 돈 빨아먹을 생각을 숨기지 않는 거냐고 꼽주는 건가.
그런 의도로 말하는 거라면 참 나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 내가 영상 찍어서 올려 준다는데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론 하람은 내 정체를 모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나이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지만, 저는 사나이가 아니라 영상 촬영 기능 탑재 내비게이션이니 괜찮습니다.
“이러고 있으니까 정말로 게임하는 것 같아요.”
쿠르릉-!!
일소검이 일소검하는 광경이 보였다. 나는 곱게 잘린 절벽의 일부분을 보며 소리 없이 감탄했다. 당신이 바로 한국의 무림 고수인 것입니까?! 단면이 매끈한 게 누가 보면 두부 자른 줄 알겠다.
“게임도 이렇게 상세하게 안내해 드리지는 않거든요. 헌터 스킬 해설 전문 유튜버를 꿈꾸는 절 만난 게 천운입니다.”
“수식어가 조금 늘지 않았어요?”
“헌터 스킬 해설 및 던전 해석 전문 유튜버를 꿈꾸는 절 만난 게 천운이라고 재차 말씀드리고 싶네요.”
“역시 숨길 생각 전혀 없으시죠.”
“헌터 스킬 해설 및 던전 해석 및 몬스터 탐구 전문 유튜버를 꿈꾸는 절 만나시다니, 천지신명님도 울고 가시겠네요.”
하람이 말 받아치기를 포기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나는 한결 편해진 산행에 만족하며 계속 영상을 찍었다. 그의 프라이버시를 개나 준 상황이었으나, 하람은 굳이 터치를 하지 않았다. 왤까. 나는 궁금해졌지만 묻지 않았다.
후드득. 발아래로 돌 부스러기가 굴러떨어진다. 하람이 자기 세다는 걸 뽐내듯이 던전 지형을 마구 바꿔 댄 덕에 정상에 오르기 수월해졌다. 나는 절벽에서 떨어져 나간 돌덩이가 밑에 깔린 뼈다귀 녀석들을 강타하는 걸 보며 감탄했다. 이 자식, 은근 머리를 쓰잖아.
“그런데 저희는 왜 정상까지 오르나요?”
생각해 보니 정상에 가야 한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왜 가는지는 몰랐다. 단순하게 정상에 보스가 있을 것 같다는 논리인가? 하지만 절벽 아래 꼬락서니를 봐선 그리 생각하고 판단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까 제게 목소리가 들린다고 말씀드렸었죠.”
앞서가던 하람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역시 단순한 이유는 아닌가.
“네. 그렇죠.”
“던전에 진입했을 때 기억하세요? 제가 사과부터 드렸잖아요. 돌발 게이트가 열리는 건 우연의 일치인데, 제가 왜 사과드렸을 것 같아요?”
질문 타입인가. 신선하네. 아니지, 누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글쎄. 그동안 스토킹해서? 아니다. 들어오기 전에 PK가 말했었지. 하람이 게이트를 여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처리하지 못한다고. 이유는 하람이 알고 있을 거라고.
“잘 모르겠네요. 제가 천지신명님은 아니거든요.”
“그런가요. 몬스터가 뒤에 붙어 계시니까 그동안 저랑 비슷한 일이 생기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가 봐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하람이 고개를 기울였다. 반응 보니 PK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럼 그게 뭔데. 나는 심드렁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뭔데요? 정말 궁금하네요.”
“별로 궁금해 보이지 않으신걸요.”
“이 표정은 디폴트라서요. 아, 목소리가 문제인가. 이해하세요. 타고나길 이렇게 타고난 걸 어쩌겠어요.”
목소리에 다이내믹한 변화를 주려면 얼마나 힘 빠지는데. 어느 상황에서도 고저 없는 목소리는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
나는 착실하게 대답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궁금한 건 사실이니까. 하람도 그걸 아는지 괜히 더 꼬투리 잡지는 않았다.
“목소리는 게이트를 예고하거든요.”
대신 폭탄을 던졌다. 예?
“⋯⋯그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예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후부터 계속 돌발 게이트에 휘말렸어요. 아, 얼마 전 등급 외 게이트가 닫힌 이후로 더 심해지긴 했지만요.”
하람은 아주 큰 폭탄을 던져 놓고 웃었다. 지금 그거 웃으면서 할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댁은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목소리가 말해요. 이번 돌발 게이트로 자기들과 얼마나 더 가까워졌다고. 이번에는⋯⋯.”
고개를 위로 휙 들어 올린 하람이 산꼭대기를 바라봤다. 아직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산의 정상. 까마득한 절벽 위, 구름이 보일 듯한 높이.
“저기로 오라고 말하네요. 오면 드디어 닿을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말해요.”
하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으나, 그걸 듣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우리 집 근처에 돌발 게이트 X나 열린 게 댁 때문이라는 거 아닙니까. 아니, 재앙을 부르는 인간이 됐으면 저기 산꼭대기에 처박혀서 사회적 거리 두기나 할 것이지 이걸 도시로 기어들어 와?
PK가 우리 집 근처에 작업장 만들었다고 메시지 날렸을 때도 이렇게 기막히진 않았다. 역시 댁은 뭐가 문제입니까? 이래서 헌터랑 엮이기 싫댔잖아.
“진짜 양심 없으시네요.”
나는 진심을 담아 하람에게 말했다. 하람은 웃으며 답했다.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뭘 감사해. 저게 사람 복장 터지게 하네.
그동안 우리 엄마의 안전과 행복에 영향을 끼친 게 저 자식이었다니. 저걸 어떻게 족치지?
간만에 머리가 핑글핑글 돌아갔다. 빨리 라이프 베슬 주워서 던져 주고 저거 먼저 처리하라고 하자. PK보고 직접 처리하라고 하자. 왜 진작 처리를 안 했지?
하지만 뒤늦게 후회해 봤자 엎질러진 물.
10위랑 11위가 싸우면 파장이 클 테니까 뒤로 수를 쓰는 것도 좋겠는데. PK는 대외적으로 드러난 게 별로 없으니 11위가 10위 자리를 탐내서 싸움을 걸었다고 언플하는 거지. 블퀴벌레 친구들은 숫자가 많으니까 유리하다.
반듯한 헌터의 사회적 매장. 이거 좋지 않나? 나는 하람의 사회적 매장 루트를 차근차근 살펴보며 산을 탔다. 아까처럼 길이 뚝 끊긴 경우에는 하람에게 업혀야 했지만, 평범하게 길이 있을 땐 걸었다.
남의 등에 업혀서 운반되는 게 편하다는 건 당연히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저 등 뒤에 외계인이 둘이나 붙어 있다는 생각만 하면 온몸에 힘이 솟았다.
상식적으로 외계인을 등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찝찝하지 않을 리가 있겠냐는 말씀. 나는 고개를 돌려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방금 아래쪽에서 커다란 소리가 난 것 같은데.
콰과광-!
반대쪽 절벽이 장풍이라도 맞은 것처럼 거세게 박살 났다. 그 소리에 앞서가던 하람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내렸다. 반대쪽 절벽 끄트머리에 매달린 누군가가 절벽을 타고 오르며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내가! 산이! 싫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으아아아-!!”
쾅! 쾅! 콰광!!
마나를 두른 팔다리가 절벽을 찍을 때마다 절벽이 두부같이 파여 나간다. 나는 그녀의 파괴적인 절벽 타기에 놀라 어깨를 흠칫 떨었다. 저것이 바로⋯⋯ ‘그’ 사헌의 산악 동호회 회원?
“음주 산행 금지라고!! 고라니 잡아먹지 말라고!! 산 타겠다고 전세기 날리지 말라고오오오!!”
광기에 가까운 몸놀림이었다. 평생 절벽만 타고 살아온 것처럼 움직이는 인간. 저게 과연 인간인가, 아니면 무림 고수인가?
아니지. 무림 고수도 저렇게 절벽 타진 못하겠다. 무협 장르 천하제일검 보다는 저 사람이 절벽을 더 잘 탈 거였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는 분이세요?”
울분이 느껴지는 그녀의 외침에 넋을 놓은 하람이 내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아니요.”
그러고는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 거짓말하지 마십쇼. 님도 저 사람 알잖아요.
절벽 타기를 무슨 옆 동네 산책처럼 하고 있는 자. 무시무시한 속도로 우리와 비슷한 위치까지 온 자. 한 맺힌 목소리로 이 산을 지배하는 자.
“그래서 저분은 누구세요?”
나는 하람의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넘기며 질문했다. 하람은 노골적으로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냥 상종하기 싫은 것 같았다.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개인적으로 사이가 나쁜 건지. 알 수 없는 부분이라서 더 궁금하군.
“왜 고개를 돌리시죠. 저분이랑 아는 사이신가요.”
“모르는 사이예요. 티비로만 몇 번 봤어요.”
“그런 것치곤 노골적으로 회피하시고 계시지 않나요.”
나는 하람의 곤란한 얼굴을 보며 팝콘을 씹었다. 아, 달다. 어쩜 이렇게 달 수가. 이래서 반서준이 남들 갈구는 걸 멈추지 않나 보다.
“헌터 유튜버 지망생이라고 하셨죠?”
하람이 애써 표정을 수습하며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럼 모르실 리가 없을 텐데요. 저분은 저보다 훨씬 유명하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나는 하람의 말에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눈동자를 굴렸다. 절벽을 오르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질끈 묶은 검은 머리카락에 어디서 등산하다 온 것 같은 복장. 저 등산복이라면 사헌 등산 동호회 공식 복장으로 널리 알려진 옷이다.
그 동호회 출신임에도 파릇파릇해 보이는 얼굴. 아,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이런 말 하면 좀 뭐한가. 하지만 그 동호회 평균 나이가 48세니 저 사람은 유별나게 어리다.
“내가 이 던전 나가면 이번에야말로 길드장님한테 이르고 만다아아아아!!!”
사헌의 젊은이, 사헌의 유일한 30대, 사헌의 막내, 사헌의 급발진 브레이크, 사헌의 재롱잔치 마스터, 사헌의 영고 라인.
수많은 별명을 가진 레나가 울부짖었다. 크아앙. 오늘도 단단히 속 터지고 온 모양인지, 그 모습에 눈물이 절로 났다. 하지만 역시 아는 척하기는 좀. 일반인 척하고 있으니 당연히 아는 척 못 하지만 말이다.
“저희 조금 빨리 올라갈까요.”
레나의 눈에 띄지 않도록 나무 뒤에 숨은 하람이 말했다. 그렇게 레나랑 아는 척하기 싫은 거냐고. 하긴 저 상태의 레나랑은 대화 안 하는 게 좋긴 하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나는 하람의 의견에 칼같이 긍정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하람은 제가 말한 게 있으니 순순히 등을 내줬다.
나무와 풀 따위가 빠르게 이동하는 하람의 머리칼 사이로 슉슉 지나갔다. 위로 가면 갈수록 안개가 짙다. 이걸 안개라고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구름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고도가 엄청난 건 확실했다.
던전에는 크게 다섯 개의 봉우리가 있었다. 다섯 개 다 가파른 절벽을 지나 올라가야 하니 보통 난이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람은 자신을 부르는 왹져의 목소리가 있는 상황. 우리는 덕분에 다른 봉우리를 거치지 않을 수 있었다. 시간 낭비하지 않고 좋게 좋게 왔다.
그러니까.
“오.”
좋게 좋게 오기만 했다. 오긴 했는데, 사알짝 문제가 생겼다.
“이거, 일소검이잖아. 그리고 그 뒤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레나가 옷을 탈탈 털며 말했다. 고개를 쭉 뺀 그녀가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다, 당신은⋯⋯!!”
장갑을 낀 손이 앞으로 휙 튀어나오더니 대놓고 삿대질을 한다. 어허, 그 몹쓸 손 내리지 못할까. 나는 빙그레 웃는 얼굴로 다가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후에 그녀가 말하길, 마치 앞점멸 하는 것 같았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