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외계인을 재판에 해부하는 건 과연 가능한 일인가? ■급 돌발 게이트 안, 어느 산기슭에 몸을 숨긴 나는 오랜만에 심오한 고민에 빠졌다.
인간 스토커는 PK한테 처리해 달라고 의뢰라도 할 수 있지만, 외계인은 대체 어떻게 떼어 낸단 말인가? 이곳은 왹져 따위가 발을 들일 차원이 아니다. 그만 돌아가라.
하지만 말이 통할 외계인 놈들이었다면 애초에 다른 차원 침략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모르고 계신 것 같아서요.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걱정되어서 따라다닌 거예요.”
이제 헤실헤실 웃는 헌터 따위는 방해물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외계인이지, 무해한 헌터 따위가 아니란 말이야.
나는 그동안 외계인이 내 뒤를 따라다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언제부터 따라다닌 거지? 일소검과 마주친 건 우연 단말기를 받기 전이니까, 그 전부터?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한다. 그럴 수 있다. 외계인이 계약하자고 조른다. 그럴 수 있지. 외계인이 남의 등에 붙어 다닌다. 어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근데 내 등 뒤에 붙어 다닌다. 그동안 나랑 내 삶을 함께했다. 외계인이랑 신나는 일상생활을 보냈다. 외계인이 나로 심즈했다.
이건 말이 안 될 일이다. 중요한 건 ‘나’가 들어가는 점이다. 다른 건 다 되는데 나랑 관련된 건 절대 안 돼.
옆집에 불나면 ‘워우~ 후끈한데?’ 해도 우리 집에 불나면 죽어라 119를 외치는 법이라고.
“제 뒤에 붙어 있는 외계인은 어떻게 생겼나요?”
속으로 온갖 난리 부르스를 떨고 있었지만, 그걸 밖으로 내어놓을 수는 없는 법.
나는 차분하게 외계인을 보는 자와의 교섭을 시도했다. 본의 아니게 내 멘탈을 흔든 장본인인 하람은 순순히 내 질문에 답했다.
“우선 일곱 모두 특정한 형체가 없어요. 특징적으로 보이는 건 눈 색뿐이에요.”
“눈 색이요?”
“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
눈은 특성을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지표다. 몬스터 대 각성자일 땐 별로 중요치 않지만, 각성자 대 각성자일 땐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 바로 눈 색상을 통해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특성이 있다. 마법처럼 불을 뿜고 물을 다루거나, 공간이나 시간 따위를 넘나들기도 하고, 죽은 자를 보거나 영혼에 간섭하기도 했다. 특이한 건 분석이나 빅데이터 정도.
눈은 영혼을 보는 창이다. 특성을 나타내는 것도 눈 색깔, 각자 가진 마나의 고유색도 눈 색깔.
몬스터들은 생긴 게 워낙 다양해서 이게 그들에게도 통용되는 건지는 몰랐는데, 근본적으로는 같다 이건가. 나는 갑자기 등판한 빨주노초파남보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차원 학회는 이런 것도 연구 안 하고 뭘 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다들 굉장히 선명한 색깔이에요. 특히 초록색이 굉장하네요. 한 0, 128, 0정도.”
“왜 RGB 값을 외우고 계세요?”
“아, 제가 염색이 주 컨텐츠인 게임을 해서요.”
하람이 머쓱한 듯 뺨을 긁었다. 그러면서 다른 눈들의 RGB 값도 줄줄 말했다. 255, 0, 0에 255, 165, 0. 아, 진짜. 알았으니까 그만 좀 말하십쇼. 갑자기 분위기 모 게임 됐잖아. 당신도 마난민이었냐고.
하람의 인간 색상표 능력은 정말 끝내주는 재능이다. 내가 관련 업계 종사자였다면 감탄을 금치 못하며 스카웃 제의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관련 업계 종사자도 아니고, 지금 이 상황에서 저 능력은 중요한 게 아니지. 늘 그렇듯이 우리에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란 소리였다. 그럼 결국 중요한 게 뭐냐?
바스락바스락. 풀잎을 스치는 소리가 난다. 방향은 동남쪽. 들리는 것에 짐작하여 추측해 보았을 때, 소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바스락대는 소리 사이로 덜그럭거리며 뼈 부딪히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소리가 묵직한 게 리치는 아니고 갑옷 입은 해골 병사 정도 되겠네.
“헌터님, 저희 있잖아요.”
나는 아직 적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한 하람을 보며 운을 띄웠다. 하람이 레몬 사탕 같은 눈으로 날 바라본다.
“여기 언제까지 있나요? 여긴 으슥하고, 사람도 없고, 아 그렇지. 밑에 사람이 있었잖아요. 그 사람들도 던전에 같이 들어왔겠죠?”
“네. 그렇죠. 던전부터 나가는 게 좋겠어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하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뒤따라 일어나며 남몰래 한숨을 돌렸다. 결국 중요한 건 이거지. 정신 차려서 라이프 베슬 줍고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것. 던전 나가서 면식 있는 외계인 멱살 잡으러 가는 것.
팔목에 낀 팔찌를 흔든 그가 아공간에서 검을 꺼냈다. 스르릉 뽑혀 나온 검이 예리하게 빛난다. 연이어 하람의 눈처럼 노란색의 마나가 하람이 꺼낸 검 위로 춤춘다.
콰광-!!
검으로 구현한 마나의 폭풍이 거센 돌풍을 일으키며 앞길을 죄다 쓸어버렸다. 그가 검을 휘두른 곳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과연 일소검(一掃劍). 하는 짓은 모자라도 닉값은 제대로 하잖아.
“여전히 소리가 들리네요.”
검을 검집에 도로 집어넣은 그가 절벽을 보며 말했다. 무슨 소리. 몬스터가 말 거는 소리?
“산 정상으로 가는 게 좋겠어요.”
해맑게 말한 그가 업히라는 듯이 몸을 숙였다. 빨리 업히라고 눈치 주는 거 보니까 업히란 소리가 맞긴 한 것 같은데.
“산 정상에 저를 업고 오르시게요?”
“직접 오르실 거예요? 제가 업고 오르는 쪽이 빠르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겠죠. 근데 제가 직접 오르는 것보다 헌터님이 절 업고 오르는 게 더 빠르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 정상에 있지는 않을 거란 소리잖아요.”
사람들 구하러 간다면서 정상은 무슨 정상. 나는 간만에 사려 깊은 인간 흉내를 내며 그의 오류를 정정했다. 그러나.
“아,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마세요.”
일소검은 여기서 뒤통수를 또 쳤다. 댁은 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지금 구하나 나중에 구하나 죽을 사람은 죽고 살 사람은 살 거예요. 게다가 던전의 넓이가 상당하니 하나하나 찾으러 다니면 시간이 꽤 소모되겠죠. 아마 다 찾기 전에 밖에서 헌터가 올 거예요.”
제법 깊이 있게 생각한 티가 나는 말이었다. 근데 또 해석해 보면 무척이나 비정한 말이라서, 나는 모호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저 말은 ‘너희들 하나하나 구하러 다니는 것보다 던전 닫는 게 시간 면에서 더 나을 것 같으니까 난 보스를 잡고 던전을 닫으러 갈게!’ 이거잖아.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누구 죽기라도 하면 그냥 운 없어서 죽은 거라고 퉁치는 거고.
“위에서 자꾸 누가 부르네요.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하람이 몸을 숙인 채로 재차 재촉했다. 하긴 헌터 놈들이 다 그렇지. 나라도 두 가지 선택지 있으면 하람과 같은 선택지를 골랐을 거다. 정의롭게 살 거였으면 지금도 일반인인 척하고 있을 리 없잖아.
“지금 안 업히시면 저 절벽을 기어 올라가셔야 할걸요. 그게 좋으세요?”
“절벽을 안 오른다는 선택지는 없나요?”
“그러면 여기에 두고 가야 하는데, 그동안 몬스터를 만나면 곤란하시지 않을까요? 기적적으로 각성하시지 않으면⋯⋯ 아, 아닌가.”
하람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 눈을 빤히 응시했다. 나는 괜히 앞머리를 만지는 척 손을 들어 올려 눈을 가렸다. 생각해 보니 저 자식 색상코드표까지 외운 생활의 달인이었다.
“그래서 싫어요?”
무릎을 감싸 안고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그가 물었다. 나는 앞머리를 마구 헝클인 뒤 그에게 다가가며 답했다.
“아뇨. 완전 좋아요. 제가 일소검 등에 업히다니. 이거 완전 가문의 영광 아닙니까.”
에라, 모르겠다. 잘생긴 남자가 업어 준다는데 땡잡았다 하고 업히지 뭐. 살면서 이런 경험 얼마나 해 본다고.
나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가문의 영광 따위의 헛소리를 지껄였다. 아무리 들어도 가문의 영광은 무슨, 개인의 영광으로도 여기지 않는 자의 목소리다.
그리고 하람도 그걸 느꼈는지, 내 대답에 푸시시 웃으며 고개를 바로 세웠다. 나는 조만간 하람 팬 카페에 ‘일소검 등에 업혀본 ssul.’ 따위의 게시 글을 작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난리 나다 못해 신상까지 털릴 듯.
날 등에 업은 하람이 자세를 고쳐 잡고 발에 마나를 싣는다. 시야가 높아지니 좋구만. 게시글 작성할 때 개인적인 감상으로 네정좋 배보단 하람 등이 낫다고 써야지.
그렇게 네정좋은 자기도 모르게 1패를 적립했다. 아주 비극적이고 슬픈 일이었다. 그것도 네정좋이 알면 자기 등 맛 좀 보라고 분개할 일.
* * *
검신을 타고 흐르는 금빛 기운이 몬스터를 양단한다. 나는 우르르 무너지는 뼈다귀들을 보며 감탄을 흘렸다. 악한 것을 물리친다더니, 저런 거였나.
언데드는 기본적으로 죽은 것들이다. 이미 죽은 시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싸우게 하는 거지.
판타지 소설 많이 읽었으면 다들 알 법한 내용이다. 그리고 이건 현실에서도 통용됐다.
“헌터님, 방금 발로 걷어차신 뼈다귀가 다시 일어났는데요.”
“이런. 잠시만요.”
하람이 발에 힘을 주어 앞으로 튀어 나갔다. 허공에 벚꽃도 아닌 뼈가 아름답게 흩날린다. 하람이 가진 레몬 사탕 색의 마나가 그의 움직임과 함께 춤췄다.
언데드는 술자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 아무리 망가지고 무너져도 재구성되어 일어난다. 그 소리지. 죽여도 죽지 않는 쫄로 상대한다! 그야말로 물량 승부! 티라노 대 치킨 같은 거였다.
“헌터님, 좌측 방면 좀비 출몰이요. 습격에 대비하세요.”
그러므로 언데드는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 중 하나였다. 개미 떼 같이 몰려드는 것들을 피해 보스몹을 잡으러 가야 하는데, 그때까지 피해가 전무할 리가 없잖아.
상대는 안 죽는데 피해는 입을 대로 입는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도 아니고, 말로 받고 말로 받는 것이다.
그러나 선악을 구분하는 기묘한 특성의 저 헌터는.
“그나저나 던전에 처음 들어오신 것치고 태연하시네요.”
“그러는 헌터님도 실시간으로 뼈다귀랑 좀비를 때려잡으시면서 웃으시고 말이에요. 정말 태연하시네요.”
“저야 이게 직업이잖아요. 곧 끝나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언데드를 완벽하게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저 노란 마나를 실은 검에 베이거나 맞으면 다시 부활하지 못하고 그대로 눕는다. 오, 굉장하잖아. 저 특성 진짜 탐난다.
언데드도 몬스터의 한 종류니 악으로 정의한 건 맞는 것 같은데, 선악의 구분이 어떻게 되는 거지? 여러모로 궁금한 점이 많은 특성이다.
“헌터님, 우측 사거리 앞 고스트 출몰이요. 습격에 대비하세요.”
기회 되면 새벽 측을 한번 파 봐야겠다. 나는 새로운 목표를 일정 안에 끼워 넣으며 외쳤다. 그러자 살짝 어색한 표정의 하람이 검신을 살피며 말했다.
“음, 혹시 숨길 생각이 전혀 없으시다든가.”
“뭘요?”
“아니에요. 고스트라고 하셨죠? 살짝 빨리 갈게요.”
사람 무안하게 말을 하다 마네. 나는 심드렁히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휴대폰을 꺼냈다. 던전 안에서는 전파가 안 터지므로 전화나 카톡 따위를 할 수 없었지만, 반대로 다른 기능은 당연히 사용 가능했다.
삑, 띠링.
동영상 촬영 모드로 전환된 카메라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화려한 검무를 펼치는 하람의 모습을 카메라 돌려 가며 착실하게 촬영했다.
순식간에 고스트를 찢어 버린 하람이 끝내주게 멋있는 포즈로 검을 납도했다. 나는 그 모습까지 꼼꼼히 렌즈 안에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는 이제부터 백만 유튜버를 꿈꾸며 던전 공부를 한 일반인 컨셉이다.
하람이 고스트라고 되물었을 때 깨달았다. 어지간한 일반인들은 몬스터의 정확한 명칭까지는 모른다. 그러나 유튜버가 등판한다면?!
그것도 헌터들 영상을 분석하는 유튜버가 등판한다면?!
그럼 오케이 되겠지. 헌터보다 헌터를 잘 아는 게 헌터 유튜버라잖아.
나는 무사히 저장된 영상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근처에서 모래를 한 움큼 집어 고스트 잔해 위에다 촥촥 뿌렸다.
아무리 하람 특성이 특성이라지만, 재결합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잔해에 이물질 들어가면 재결합이 느려지거든.
나는 그대로 쪼그려 앉아 고스트 잔해가 뭉치는지 안 뭉치는지 확인했다. 위에서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하람은 말로 설명하기 참 복잡한 표정을 지은 채로 물었다.
“역시 숨길 생각이 전혀 없으시다든가⋯⋯?”
“그러니까 뭘요. 혹시나 팬 같은 거로 생각하시는 거 아니죠? 알고 보면 제 꿈이 백만 유튜버입니다. 지망생이거든요.”
“논점이 어긋난 걸까요, 아니면 제가 이상한 걸까요.”
뭐냐, 그 볼드모트 보는 표정은. 뒤처리하는 사람 처음 봅니까?
나는 기왕 컨셉질하는 김에 흙을 모아서 고스트 잔해 위에 무덤까지 만들어 줬다. 그냥 고스트 무덤 만들어 주려고 했다고 하면 변명거리가 되겠지. 그러나 하람은 여전히 볼드모트 보듯 날 쳐다보고 있었다. 좀 무례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