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잘 생각해 봐. 엄청 심각한 일이거든.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목숨을 틀어쥔 일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일소검을 처리해 달라고 했지? 네가 돌발 게이트에 다녀온 다음에 업무에 착수하도록 할게. 그 전엔 불가능해. 이번 일에는 일소검이 필요하거든.’
하람은 또 어디다 갖다 쓰려고 그러는 건지.
나는 터무니 없는 일에 휘말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크레이터 밑에 진짜로 군단장급 몬스터가 있다면, 하람을 처리해선 안 될 텐데. 하람의 특성은 그 상황에서 가장 쓸모 있을 테니까.
“흐으음.”
나는 거실 소파 위에 드러누워 멍하니 티비 화면을 바라봤다. 대충 튼 채널에서는 요새 한창 인기 있는 퓨전 사극 드라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느 날 각성자가 된 여주인공이 남장을 하고 궁궐에 들어가 세자인 남주인공을 만난다는 기가 막히고 코도 막히는 스토리다.
-세자 저하! 피하셔야 하옵니다!
-이거 당장 놓지 못하겠느냐! 나는 몬스터 앞에서 도망치라고 배우지 않았다!
칼을 빼 든 세자 저하가 몬스터 앞에서 나대다가 실려 갔다. 나는 드라마를 시청하다 문득 의문에 빠졌다.
조선 시대에 몬스터라는 말을 쓰다니. 이게 무슨 창덕궁의 전봇대 같은 소린가. 조선 시대치곤 너무 빠른 단어 아닌가? 저 드라마 배경은 흥선 대원군 아빠가 태어나기도 전인데.
-제가 저 몬스터들을 물리치고 오겠습니다.
-호위무사들도 이기지 못한 것을 자네가 어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각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상투를 튼 여주인공이 비장한 얼굴로 검을 뽑았다.
나는 몬스터를 상대로 무쌍을 펼치는 여주인공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의 눈 색이 흔치 않은 레몬색이었다.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훤히 보이는 색깔이었다.
‘저기요!!’
간절하게 외치던 하람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저 드라마 여주인공과 똑같은 레몬색 눈을 가진 하람.
저번에 게이트 앞에서 두고 튄 하람.
자신이 속한 길드의 이름값처럼 끈질긴 하람.
PK가 처리를 보류한 하람.
하람의 꾸준한 자기 PR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밖에 나갈 때마다 귀신같이 따라붙는 하람을 떠올리며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저번 일 때문에 엄마 눈치 보느라 안 나갈 수도 없고. 집에 틀어박혀 있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놈 상사한테 찌르자니 저번에 도발하고 온 게 걸렸다.
나는 악귀처럼 일그러졌던 모 팬클럽 회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다음에 보면 무조건 도망가야지.
남의 트라우마를 건드린 건 잘못이 맞다. 나는 일말의 양심을 지키기로 했다.
-맙소사! 그 많은 몬스터를 어찌 혼자 다 잡았단 말인가! 자네 정체가 뭔가?!
티비에서는 여전히 조선 시대 기준에서 아직 이르지 않나 싶은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요즘 그렇게 인기라는데, 아무리 봐도 낙원의 레터나 볼법한 드라마다.
나는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돌린 채널에서는 사헌의 레나가 해맑은 얼굴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 저희 사헌 길드에서는 늘 최선을 다해 게이트를 막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게이트 출몰 시 대처 요령에 따라 주시고, 휘말렸을 시에는 그 자리에서 구조를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저희 헌터들은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레나의 얼굴 뒤로 우리 동네 모습이 보였다.
요새 사헌 길드가 이 근방에서 자주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사헌에서 우리 동네를 맡았구나.
왜? 서초구가 홈그라운드 아니었나?
물론 마포구는 노원구만큼 멀진 않았다. 하지만 근처에 강남구도 있고, 동작구도 있고, 관악구도 있고, 송파구도 있는데 왜 굳이 한강 너머로?
길드끼리 구역 두고 땅따먹기라도 했나. 알고자 하면 알 수 있겠지만, 굳이 알 필요 없는 일이었다.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러니 PK가 길드에 들어갈 생각이 없구나~ 같은 소리를 했겠지. 여전히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열흘 후, 이 근처 캐릭터 스토어에서 돌발 게이트가 열릴 거야.’
‘무슨 캐릭터 스토어? 노란색이야, 아니면 초록색이야?’
‘노란색. 역 앞에 있는 삼 층짜리 건물. 정확한 시간은 몰라. 들은 정보는 이것뿐이거든.’
PK가 경고한 돌발 게이트가 어느새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역 앞의 캐릭터 스토어를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번쩍이는 통유리 덕에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 삼 층짜리 건물은 늘 사람이 많았다.
한국인만 많은 것도 아니고 외국인도 많았다. 자칫하다간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게다가 언제 열릴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나. 가게 열기 전부터 그 앞에 가서 죽치고 있어야 하나. 나는 손톱 끝을 잘근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라이프 베슬 못 주워 가면 어쩌지.
휴대폰과 함께 리모컨 옆에서 뒹구는 단말기가 보였다. 손을 뻗어 단말기를 쥐고, 당장 메시지를 날린다면 뭐든 수확이 있겠지. 근데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저 사이비한테 길들여지는 거 아니고?
사람은 누구나 확실한 미래를 바란다. 사람들이 극야를 믿고 따르는 건 그가 미래를 아는 것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아는 것. 좋지.
남들이 모르는 걸 나 혼자 안다는 게 얼마나 달콤하고 매력적인 일이야.
회귀는 어느 매체에서나 자주 접할 수 있는 흔해 빠진 소재였다. 스토리 이끌어 나가기 쉽잖아.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선수 쳐서 이득 볼 수도 있고.
사람은 앞날을 모르기 때문에 망설인다. 미래에서 보았을 땐 별거 아닌 일도, 아무것도 모른 채로 맞닥뜨리게 되면 지레 겁먹기 마련이다.
나는 PK로 인해 벌어진 이번 사건이 우리 차원에 어느 정도의 파장을 가져올지 몰랐다. 할 수 있는 건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손을 써 보는 것뿐이지.
-예, 지금까지 사헌 길드와의 인터뷰였습니다. 지금 사헌 길드 말고도 많은 길드들이 정해진 구역에서 돌발 게이트를 닫고 있으며, 낙원 길드가 담당하는 구역에서는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아 많은 주목을⋯⋯
껄끄럽지만, 쓸 만하다.
기본적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뒤통수를 맞아도 상관없다. 인재 풀이 다양하고 작전에 있어 편리하다.
그 길드에 관한 평가는 이 정도가 다였다. 만일의 사태에 하람이 있다면 좋겠지만, 하람은 보기 껄끄러우니까 보험을 든다면 그쪽이 좋겠지.
나는 단말기로 손을 뻗었다. 티비 화면은 마침 멀끔한 차림새의 편애를 비추고 있었다.
* * *
편의점 유리문에 수상한 차림새의 인간이 비친다. 나는 검은색 캡모자에 검은 마스크, 검은 선글라스와 검은 옷으로 범인 패션의 정점을 찍었다.
“어서 오⋯⋯?”
다른 사람 입장에서 진짜 끝내주게 수상한 복장이었단 소리다.
마침 편의점 알바가 인사하다가 말을 흐렸다. 나는 조용히 카프리 썬만 사서 편의점을 나왔다.
번화가에 있는 캐릭터 스토어 개점 시간은 오전 10시 30분. 언제 돌발 게이트가 생길지 모르니까 개점 시간에 맞춰 후다닥 가야 한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이 많을까 싶긴 한데, 여기 놀러 올 사람들이라면 죄다 휴가를 냈겠지. 관광객 같은 경우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까 빨리 가서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게이트가 열리면 활동하는 게 정답이라는 말씀. 나는 겉옷 주머니에 차가운 카프리 썬 팩을 쑤셔 넣으며 발을 옮겼다.
지속된 스토킹으로 예민해진 감각이 적색 신호를 울린다. 저기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블랙리스트 발견! 검은색 벙거지 모자 아래에 자리 잡은 눈이 샛노란 색이다.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정말 귀신같기 짝이 없군.
나는 혀를 쯧 차며 걷는 속도를 올렸다. 본래 실력을 발휘하면 따돌리는 거야 어렵지 않았지만, 여긴 사람이 가득한 오전의 번화가였다. 행동이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 틈에 섞이면 덜 보일까. 나는 목과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곤 사람이 많은 곳으로 걸었다. 캐릭터 스토어는 눈에 띄는 곳에 있어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시간은 마침 10시 35분이었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쾌적한 공기가 느껴졌다. 햇볕을 그대로 받은 모자 위가 따끈따끈하다. 나는 모자를 벗어 손가락에 걸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막 문을 연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푹신푹신한 인형이 가득 쌓인 매대 뒤로 거리가 한눈에 보이는 포토존이 있었다. 나는 통유리에 한 손을 올린 채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하람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았다.
벙거지 모자 끝을 엄지와 검지로 잡은 그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어쩐지 레몬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침착하게 주머니에서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돌발 게이트 출몰 시간까지는 감지 못 해? 저번엔 했었잖아! ◀ [손가락테크닉]
지금 내 스토커랑 얼굴 마주할 위기에 처했거든? ◀ [손가락테크닉]
초조하게 단말기 화면을 두드리니 딱딱 소리가 연이어 났다. PK는 크레이터 안에 있는 사람답지 않게 금방 답장했다.
[PK] ▶ 스토커면 하람이지? 그러면 돌발 게이트가 곧 열리겠네?
[PK] ▶ 조금만 기다려 봐. 하람이 중요하거든.
이게 무슨 개항하는 흥선 대원군 같은 소리야. 나는 미간을 좁힌 채로 자판을 다시 두드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손가락테크닉]
하람이 왜 중요해? 하람 처리 지금은 못 한다는 이유가 여기 있어?◀ [손가락테크닉]
터벅터벅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단말기 화면 위로 뜨는 PK의 메시지가 사람 속을 불태웠다.
[PK] ▶ 연관이 있긴 하지.
[PK] ▶만났어? 직접 물어봐. 아마 대답해 줄걸? 자기도 알거든.
2층으로 막 올라온 사람의 실루엣이 참 익숙했다.
나는 이를 까득 물며 단말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하람은 기막히게 내가 있는 포토존으로 왔다.
“안녕하세요.”
모자를 벗은 하람이 앞머리를 정돈하며 인사를 건넸다. 나는 떫은 얼굴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예, 안녕하세요.”
“저번에 잠깐 사고가 있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댁에는 잘 들어가셨나요? 얼굴 보기 힘드네요.”
그럼 모르는 사람 얼굴 보기가 힘들어야지, 쉬우면 어떡하냐. 스토킹하는 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지만, 대화 길게 섞어서 좋을 거 하나 없었다. 나는 대충 대꾸해 주고 넘기기 위해 말을 골랐다. 그러나 선수 친 건 하람이었다.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또 저 소리.
“머리를 울리는 듯한 불길한 목소리.”
그가 구축한 이미지답지 않게 이상한 소리.
“그동안 줄곧 여쭤보고 싶었거든요. 왜냐하면 당신은⋯⋯.”
하람이 말을 잠깐 멈추고 숨을 골랐다. 나는 그새 위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작고 검은 파편 비슷한 게 공중에서 떠다닌다. 이변을 감지하자 피부 위의 솜털이 바짝 솟았다.
세상이 어쩐지 안개처럼 흐리게 보였다. 동시에 하람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서둘러 내 손을 붙잡은 그가 제법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저번에 게이트를 피할 수 있었던 건 목소리 때문인가요?”
“그런 거 모르겠고, 손 좀 놓으세요.”
“그건 곤란해요. 왜냐하면-!”
하람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유리를 긁는 듯한 소리가 난다. 공간이 조각나고 세계가 뒤틀린다.
[돌발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거센 폭풍과 같은 감각이 지난 후, 세계가 뒤집혔다. 나는 낯선 공간에 발을 딛고 선 채로 내 손을 잡은 하람을 바라보았다.
돌발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