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사람 하나가, 아니. 건물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바닥에 깔끔하게 착지한 채로 눈앞에서 일렁이는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호루라기 불면서 달려오는 경찰들 모습이 눈에 선했다.
“저, 저게 뭐야?!”
“게이트!! 여기 게이트가 열렸어요!”
“거기 다가가면 안 돼요! 누가 경찰서에 신고부터 해 봐!”
사람들의 이목이 한순간에 쏠린다. 나는 유리 조각을 탈탈 털며 그 자리를 슬금슬금 떴다.
고개를 살짝 드니 건너편 식당 안의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게이트에 눈을 휘둥그레 뜬 게 보인다. 당황스러우시죠? 저도요.
본래 목적대로 하람은 처리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체할 것 같다. 이번 사건은 아홉 시 뉴스에 나오겠군.
아닌가? 요새 돌발 게이트는 뉴스감도 못 될 정도로 평범한 일인가?
그래도 손에 꼽히는 번화가니까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단말기 화면을 켜고 PK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PK] ▶ 거기서 나왔어?
[PK] ▶ 안 나왔으면 유감이고.
말할 거면 빨리 말할 것이지, 고작 15초 전에 말해? 나는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며 자판을 꾹꾹 눌렀다.
나왔는데 너 돌발 게이트는 어떻게 알았어? ◀ [손가락테크닉]
공무원들도 모르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손가락테크닉]
사이렌 소리가 요란한 차들이 도로를 슝슝 달린다. 나는 터덜터덜 걸어 근처 편의점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역 앞에 자리한 규모 큰 편의점이라 그런지, 안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PK] ▶ 잊었어?
[PK] ▶ 크레이터 안에서는 뭐든 할 수 있어.
크레이터. 크레이터가 왜? 나는 PK의 메시지를 빤히 들여다보며 고민했다.
[PK] ▶ 새 협력자가 알려 줬어. 우리 쪽 새 협력자의 특성이 감지거든.
[PK] ▶ 어지간한 인간보다 더 뛰어나지.
메시지만 봐도 웃고 있을 PK의 모습이 선했다. 나는 미쳐 돌아가는 상황에 순간적으로 욕을 내뱉고 말았다. 미친 새끼.
[PK] ▶ 욕하지 말고, 고개 돌려 봐.
나는 단말기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제가 각성자라는 것을 자랑하듯이 하얀 머리카락을 고스란히 드러낸 PK가 방긋 웃었다.
“대화가 필요할 것 같지?”
대화는 언제나 좋은 수단이지. 하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몸으로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뻗어나간 손이 PK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너 무슨 일을 꾸미는 중이야, 이 정신 나간 새끼야.”
“별거 아니야. 어차피 치외법권인데 크레이터 안에서 뭘 하든 무슨 상관이야?”
“왜 상관이 없어. 네가 지금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거든?”
“무슨 소리야. 어제 만화 보다 잤어?”
아무것도 모르는 PK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걸 말해, 아님 말아?
나는 내 이마를 팍팍 치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 몬스터 고기도 처먹고 몬스터 피부로 갑옷도 만들어 입는데 몬스터랑 교류한다고 뭐가 문제겠어. 중요한 건 급의 문제지.
“그래서, 그 협력 상대가 누군데?”
나는 주먹을 꽉 쥔 채로 눈매를 뾰족하게 세웠다. PK는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며 유유히 말했다.
“군단장.”
뻐억-!!
휘두른 주먹에 뺨을 맞은 PK가 그대로 냉장고에 처박혔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낙원 놈들이 노력하든 말든 이런 새끼들 때문에 조만간 세상이 망하겠구나.
* * *
“굳이 따지자면 현 군단장은 아니고, 전 군단장이야.”
“넌 입 다물고 있어.”
“대체 뭐가 문제야? 어차피 크레이터는 협회 본부도 손 놓은 곳인데.”
PK가 투덜거리듯 말을 이었다.
나는 버석버석한 비스킷을 씹어 삼키며 자료를 뒤적거렸다.
크레이터에 대한 자료는 헌터 등록을 마친 자라면 누구나 열람할 수 있었다.
크레이터. 지구의 남은 외계의 잔재.
던전이 웨이브가 되면 우리 차원에 던전의 모습이 덧씌워진다.
웨이브를 해결하지 못하면 던전은 우리 차원에 그대로 남아 있고, 끝내 우리 차원과 동화된다.
세계 곳곳에 남은 크레이터는 그 동화의 흔적이었다.
외부 차원도 내부 차원도 아닌 크레이터 안은 정부는 물론 협회의 손길도 닿지 않는 아수라장이다.
외부 차원과 내부 차원 그 중간의 어딘가. 내부 차원으로 본체를 끌고 오지 못하는 몬스터들도 크레이터에는 본체를 끌고 올 수 있었다.
과거에는 이걸 몰라서 왜 크레이터 안의 몬스터만 시체가 남지?
하고 의아해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게 당연한 거구만.
전리품 같은 걸 떨구고 가는 던전이나 웨이브 쪽이 이상한 거였다.
아무튼. 각 차원의 존재들은 크레이터 안으로 진입할 수는 있어도, 크레이터를 통해 다른 차원으로 나가진 못했다.
관리만 잘하면 위험하진 않지만, 내버려 두자니 찜찜한 곳.
이미 동화된 장소라 없앨 방법도 없으니 그저 골칫거리.
각국 정부와 협회는 크레이터 처리에 대해 손을 놨다.
그래서 크레이터는 공식적으로 일반인 접근은 물론 진입 금지였다. 아, 헌터로 등록한 각성자는 조금 다르고.
지금은 던전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어 일손이 부족할 지경이지만, 과거에는 던전을 길드에서 선점해서 갔다.
돈을 벌려면 던전을 가야 하는데, 길드에 가입하지 못하면 던전을 가지 못하는 상황.
등록 안 한 각성자나 뒷골목 으슥한 곳에서 대부업 하는 각성자 친구들이면 모를까, 일반 헌터들은 돈 벌려면 던전에 가야 했다.
근데 길드에 가입 안 하면 던전 못 간다니까.
던전 못 가면 돈은 어떻게 벌 건데?
인간은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든 방법을 도출해 낸다. 각종 이유로 길드에 들어가지 못하는 헌터들 중 일부는 크레이터로 눈을 돌렸다.
사실 이 동네가 노다지긴 하다. 한 번 들어갈 때마다 목숨이 위험해서 그렇지.
몬스터를 죽이면 몬스터 시체를 그대로 가져갈 수 있다.
자잘하게 떨어지는 걸 가져다 파는 게 아니라, 그냥 통째로 가져다 팔 수 있다.
돈이 얼마나 잘 벌리겠는가.
와우, 아주 그냥 끝내주죠. 물론 걔들도 약화된 게 아니라 본체로 온 거기 때문에, 던전이랑 다르게 완전 세다. 그래도 몬스터 시체는 그걸 감수할 만한 값을 받았다.
“그 짭군단장은 어디 크레이터에서 만났는데?”
“서울역 크레이터.”
던전이나 웨이브 처리는 인명 구조나 지구 평화 따위의 큰 의미가 있는 관계로, 사회적 인식이 아주 좋았다.
길드 있는 랭킹권 헌터들은 개인 팬클럽도 있잖아. 다들 영웅 취급도 해 주고.
반면, 크레이터에 드나드는 헌터들은 사회적 인식이 매우 나빴다.
돈에 눈 돌아간 놈들. 지구의 평화나 인명 구조에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놈들.
내가 보기엔 다 거기서 거기인데.
애초에 대형 길드 목적 자체가 강한 놈만 모아서 편하게 돈 벌겠다 아님?
요즘 애들은 인명 구조고 뭐고 그런 큰 뜻 없다. 좋은 길드 들어가서 유명세 얻고 편하게 돈 벌 생각만 하지.
자본주의 앞에 선 인간은 다 똑같은 법이다.
생각해 보면 돈 앞에서 둘 다 다를 건 없었다.
던전과 웨이브는 난이도 낮고 안전한 편이고, 크레이터는 들어갈 때마다 목숨 걱정을 해야 하는 동네인 거 빼면.
어떻게 보면 길드 가입 못 해서 던전 못 들어가는 애들이나 가는 곳인데, 저런 이미지인 건 언플 아닌가.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크레이터 말고 용병 뛰는 방법도 있으니까 집중 사격하기 좋긴 하네.
나는 언플의 귀재, 백천 길드장을 생각하며 손가락을 옮겼다. 서울역 크레이터라면 거리가 제법 가까운 곳이었다.
[크레이터 정보 일람]
[서울역 - 3층/지하/지상/안개/독기/식물]
[특이사항: 엘프 조우/전기O]
[종합 랭크: A]
“여기 엘프 조우랑 전기는 뭐야?”
“안에 있는 전기 스위치 작동된다고. 엘프는 드물긴 한데, 목격담이 있어.”
“너희 집 앞마당인데 잘 모르나 봐?”
“아무래도 안은 넓으니까. 그리고 엘프는 몬스터랑 다르게 귀 가리면 모르잖아.”
PK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답했다. 나는 내 몫의 음료수 잔 위를 톡톡 두드리며 고민했다. 저 크레이터에 들러 봐야 하나?
“너, 우연으로 길드 가입할 생각은 있어?”
“사헌 길드 견학 가기로 했어. 한 이틀 뒤에.”
“그래 봤자 견학이지. 내가 보기엔 너는 절대로 길드 못 들어가. 손가락테크닉과는 별개로, 네 성격 자체가 독립적이고 비협조적이거든.”
“왜 면전에서 욕을 해?”
나는 비스킷을 그 뻔뻔한 낯짝에 집어던졌다. 날아오는 비스킷을 특성으로 띄운 PK가 아주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욕은 아니야. 네가 그런 성격이었으면 예전에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았겠지. 정체도 진작 밝히지 않았을까? 네가 지금껏 정체를 밝히지 않는 데엔 이유가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내가 봤을 때 그건 그저 핑계일 뿐이야. 너는 결국 책임져야 하는 걸 늘리고 싶지 않은 거잖아. 내가 틀렸어?”
입 안을 굴러다니는 아몬드 조각이 혀끝에 걸렸다.
나는 비스킷을 하나 더 집어던지는 것으로 그의 말에 대꾸했다.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책임 못 질 거면 시작도 하지 말랬어.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지. 네가 헌터 활동을 하게 된다면, 아마 크레이터에 진입할 거라고. 그럼 크레이터를 잘 아는 나한테 문의하지 않겠어? 너도 알다시피, 크레이터는 우리 구역이잖아.”
PK가 싱글벙글 웃으며 오렌지 주스를 들이켰다.
PK의 말이 맞았다.
크레이터 안은 우리 차원의 상식과 법이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크레이터 안에는 범죄자가 득실거렸다.
그 안에서는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 사람을 죽여도 되고, 몬스터와 협력해도 된다. 그저 힘이 다인 곳이다.
크레이터 안에 진입한 범죄자는 대부분 죽는다. 하지만 그 안에 둥지를 튼 무리의 일원이 되면 목숨을 보장받을 수 있다.
“너라면 얌전히 몬스터만 잡고 갈 거 아는데, 그래도 문제가 생길 수 있잖아. 네가 원한다면 내가 관리하는 크레이터 하나를 비워 줄게. 어때?”
그가 한쪽 입술을 틀며 웃었다.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크레이터는 죄다 저놈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
그 말은 크레이터 안의 수두룩한 불법 헌터들은 물론이고, 법망을 빠져나가기 위해 크레이터로 피신한 범죄자들이 죄다 저놈 밑에 있다는 뜻이다.
물론 각성자가 아니면 쓸모가 없으니 일반 범죄자는 일회용 소모품이겠지만, 어쨌든.
“왜?”
“왜냐니, 새삼스럽게. 우린 협력 관계잖아.”
“제발 구역질 나게 웃지만 말고 말로 좀 해 봐. 난 짜증 나게 웃고만 있는 인간보다 인상 팍 찌푸리고 바락바락 대드는 쪽이 좋더라.”
“아하. 그거 네 팬클럽 회장이랑 교주님 얘기지?”
“다 알면서 묻지 마라.”
나는 썩은 표정으로 음료수를 원샷했다. 내 편의를 봐주겠다는 제의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저놈이 굳이 그렇게 해 줄 이유가 없다는 게 중요했다.
남의 등골 빼먹다 못해 목숨까지 빼먹는 장사꾼이 수지타산 안 맞는 일을 할 리가 없지 않는가.
아까 하람을 처리해 달란 말에 돌발 게이트행을 요구했다. 편의를 봐주는 일을 걸고 다른 무언가를 요구할 게 틀림없었다.
“부탁하고 싶은 게 더 있어?”
나는 머리를 굴리는 걸 멈추지 않은 채로 물었다. PK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번에 개고생한 것까지 쳐서 부탁하려고.”
“말도 안 되는 걸 얘기했다간 경찰서로 갈 거야. 법정에 설 준비나 하라고.”
“그게 되겠어? 아직 손 놓기엔 내가 너무 쓸모 있는데?”
태연자약하게 대답한 그가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이내 볼륨을 한껏 낮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 얻은 협력자는 인간이 아니야. 내가 아무리 돈 앞에 장사 없다지만, 내 목숨까지 내걸면서 일하진 않아. 그렇지만 그 협력자가 내건 게 너무 탐나서 손을 잡았어.”
“그 정도면 그냥 목숨을 내건 거 아니야?”
“쉿. 대충 방비는 해 뒀어. 그래도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거든. 그리고 그쪽이 바라는 게 우리 쪽이 생각할 때도 과해서 말이야. 지금은 할당량을 채우고 있는데, 곧 그러지 못하게 될 거야. 그러면 저쪽에서는 분노해 날뛰겠지.”
듣기만 해도 눈앞이 아찔한 이야기였다. 전군단장이라고 해도 군단장은 군단장. 죄다 박살 난 미래가 눈에 선했다.
“일단 곧 열릴 돌발 게이트에서 리치의 라이프 베슬을 가져다줘. 그게 있으면 대처 정도는 해 볼 수 있을 것 같거든.”
“못 가져오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PK가 불길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굳은 얼굴로 그와 눈을 마주했다.
눈 색이 저번과 미묘하게 다르다. 라임 색 홍채에 뒤섞인 군청색이 지나치게 눈에 띈다.
“군단장 레이드 하러 가야지.”
PK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다시 한번 비스킷을 집어던졌다.